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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Dec 10. 2020

나에게, 책 읽기 (글 읽기)

 '의미 있는 일'을 위한 준비

많은 작가님들이 그러하겠지만, 저도 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소녀였어요. 저희 부모님은, 전쟁 세대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며 자라는 경험을 하지 못하신 분들이에요. 위인전집과 전래동화 전집 한 세트씩을 들여놓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집에 있는 책을 읽고 또 읽고, 점점 책이 더 고파져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집에 있는 책을 질리도록 읽은 다음부터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왜 더 이상 집에서 놀지 않고 밖에 나가는지 부모님은 궁금하셨을 거예요. 지금 어른이 된 입장에서 그때의 아이를 생각해보면, 아이는 새로운 책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던 거예요. 친구의 집에 가서 친구와 놀지 않고 하루 종일 그 집에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던 저. 친구 가족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저는 친구 집에 매일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머무르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괜찮은 분들이었다 싶은 게, 가끔은 라면도 끓여주시고, 밥 먹을 때 숟가락도 하나 더 놓아주시고, 밤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는 남의 집 아이에게 단호하게 한마디도 않으시고 책을 읽게 해 주셨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초등 고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제가 책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셨던 것 같아요. 엄마가 선생님께 추천받아 사 주신 책들 몇 권의 리스트입니다. 

-빨강 머리 앤

-톰 소여의 모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저는 이 책들을 수 백번, 수 천 번 읽었던 것 같아요. 이 책들은 질리지가 않았어요. 그 책들을 왜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생각을 더듬어 보면, 저는 그 순간 친한 친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행복감,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한 공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앤'과 함께 결핍과 비참한 현실을 이기는 상상의 나래를 힘껏 펼쳤고, 아빠에게 받는 상처를 '제제'와 함께 울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남동생과 차별당하는 불공평한 일상을 '톰'과 함께 만들어 가는 신나는 하루하루 속에서 위로받았습니다. 이 책들은 저의 예민한 사춘기를 함께 건너 준, 유일하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부모님이 고전 전집을 사주셔서, '안나 카레니나', '설국',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전쟁과 평화', '대지', '닥터 지바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데미안'.. 같은 책들을 열심히 읽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 나이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으므로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장님 코끼리 만지기' 열심히 했다는 기억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하얀 표지의 그 책들이 너무 좋아서 저는 방학 때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책에 빠져들어 폐인 생활을 하곤 했어요. 모든 것을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어른들의 세상을 엿보는 재미,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엿보는 재미만큼은 쏠쏠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졸업반, 고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부터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굳게 마음먹고 - 버스 안 성추행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에서 40분 이상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대형 서점 - 부산 서면 영광도서 -을 찾아가곤 했어요. 그때부터는 제가 용돈을 모아 원하는 책을 살 수 있는 시기였으나, 문제는 저 스스로 저를 위해 어떤 책을 사야 할지 잘 몰랐어요. 그때부터는 선생님께 여쭤보고 추천해주시는 책을 사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멘토로 생각하던 화학 선생님- 그분의 영향으로 저는 후에 '재료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 계셨는데, 그분께서는 러시아부터 시작해서 유럽, 중국, 일본,... 전 세계 문호들의 책을 폭넓게 읽어보기를 권하셨어요. 그 계기로 저는 세계 여러 유명 작가들의 소설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서, '체호프', '체르니셰프스키'와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미우라 아야꼬', '헤르만 헤세', 'AJ크로닌',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같은 제 스타일의 최애 작가들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점에 드나들면서, 당시 서점에 가면 입구에 놓여있던 책들의 영향도 받았어요. 그런 과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플라톤' 같은 철학서적들과 함께,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과 같은 책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책들은 제가 속한 세상에 대한 저의 시선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제가 믿고 있던 어른들, 믿고 있던 사회제도, 믿고 있던 학교 시스템,... 이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이 잉태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저를 잘 교육시킬 스승을 원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산업 사회의 일꾼을 생산해 내기 위한 같은 크기, 같은 역할을 할 '통조림'을 찍어내는 대기업 공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저는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학교를 불신하고, 교과서를 불신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생각을 많이 나누던 한 친구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교육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함께할 친구들을 더 모아 6명이 되었고, 우리는 역사와 사회 교과서 대신, 옛 고서를 찾아 읽으며 '역사'를 배우고, 서점에서 찾은 여러 책을 읽으며 '사회'를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또한, 우리 스스로 연구하고 의견을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저희는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마다 만났습니다. 광안리 바닷가에 둘러앉아 바닷가 땡볕을 그대로 쬐며 벌게진 얼굴로 곧잘 끝없는 말다툼으로 이어지던 '토론'이란 걸 해보았던 시간. 그때는 그런 삶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학교 공부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 힘들었던 시간은 이제 제가 그 시간을 깨어 잘 살았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때 시간을 쏟아부었던 나름의 희생이 지금의 저라는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서부터는 그 당시의 대학생들이 많이 읽던 책들을 저도 같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90년대 트로이카 여작가님들- '은희경', '공지영', '신경숙'-의 책들을 저도 열심히 읽었고, 당시 유명하던 다른 소설가들의 책도 많이 읽었어요. 90년대에 나온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들도 거의 다 읽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막연히 나도 나중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작가들의 글 내용과 함께, 문체와 글의 구성도 유심히 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때부터 수년 동안 '공학 책들'과 '공학 논문들'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항상 글을 간단하게 요약해야 직성이 풀리는, 뼈대만 남기고 다 버리는 습관이 이때 만들어져서, 호흡을 느리게 하며 수많은 디테일로 이야기 속 인물과 배경을 살려내야 하는 소설가의 길을 걷기에 아주 방해가 되는 '이과적인 글쓰기' 습관이 몸에 배고 맙니다. 


그런 이공계 라이프를 열심히 살아가던 중에, 우연히 친구 책상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는데, 저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책을 빌려가 그대로 세 번을 연달아 읽었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였어요. 저는 이미 '미우라 아야꼬'의 책들과 '설국'으로 일본의 소설을 접한 적이 있었기에 일본 작가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기도 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문학에 대한 제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버렸습니다.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책들만으로 모자라, 다른 일본 작가들 - 무라카미 류, 바나나 요시모토,.. -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 문학에 대한 저의 열린 마음은 미국에 와서도 지속되어, 오쿠다 히데오, 에쿠니 가오리,... 그리고 여전히 열정적으로 글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편입니다.


그러던 중, 제가 사는 곳 지역 도서관에 한국 소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2010년대 들어서 '김영하'라는 작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재미난 이야기꾼으로 저에게 다가온 그분의 책도 보이는 대로 집어 들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에 찔끔찔끔 들어오는 책만 가지고는 요즘 한국 서점가의 변화와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기는 힘이 듭니다. 아무리 인터넷 서점으로 한국 책 주문 배송이 가능하다 해도, 쏟아져 나오는 신간을 마구 맛보며 책 고르는 재미는 턱없이 한계가 있고, 주변 사람들과 요즘 나오는 한국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도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한동안은 누군가 나와 책에 대한 입맛이 같은 사람이 좋은 책을 골라서 절기별로 한 박스씩 부쳐주면 좋겠다는 꿈을 꾸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조건인 '나와 책에 대한 입맛이 같은 사람 찾기'부터가 불가능하므로 그런 생각은 애초에 접어야 했어요.


그래서 저는 '영어책을 모국어처럼 읽을 수 있는 사람*'으로 저를 훈련시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서점을 내 집같이 드나들면서 각종 신간을 들춰보며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북클럽에도 참여하고, 이웃, 동료들과 책에 대한 대화도 나누는 그런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자고 마음먹고살았더니, 결국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영어책을 모국어처럼 읽을 수 있는 사람: 영어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과 저의 글쓰기 재능이 합쳐져, 저는 영어 소설을 한국어로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번역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직 충분히 발산해 보지 못한 저의 새로운 재능, 소설 번역.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꼭 해 보고 싶은 일입니다. 혹시 소설 번역가를 찾는 출판업계에 종사하시는 분이 계실까 싶어 이 기회에 '셀프 광고'를 해 봅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 동안 저는 미국 공공 도서관에서 '도서관 사서'로 근무를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 시간은 저에게 대학/대학원에서 접하는 학문적인 책을 넘어서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영어책을 방대하게  읽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도서관 사서'라는 자리는, 신간이 들어오면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자리였으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필요를 위한 책을 끊임없이 추천해 주어야 했고, 도서관 고객들을 최대한 많이 유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혹할만한 북클럽이나 독서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했고, 절기별로 사람들이 찾을 만한, 사람들에게 유익할 만한 책을 골라 도서관 입구에 배치하고, 연령별, 성별, 장르별 추천 도서 리스트를 만들어 내야 했어요. 무엇보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책을 사랑해서 도서관에 들어온 사람이었던 만큼, 끊임없이 책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좋은 책을 서로에게 추천하고 조언하는 문화여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도서관 사서'는 제가 경험해본 일 중에서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직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고 제 삶을 변화시킨 미국에서 만난 책들 이야기는 따로 다른 책으로 묶어서 소개하겠습니다. 다른 책으로 묶은 후, 여기에 링크를 걸겠습니다.


지금 저에게 '브런치'는, 한국 서점에서 신인 작가들의 신간을 마구 엿보는 그 시간 그 자체입니다. 여러 연령대,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의 호흡이 생생히 살아 그대로 제 마음에 다가오는 이 '브런치' 글 읽기 시간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세계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한국 밖으로 쭉쭉 뻗어나갔던 제 마음이, 지금 이 시간 저는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며 수많은 한국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한국으로 집중해서 마음이 뻗어가는 기묘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경험들이 언젠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저를 준비하는 일일 거라고 믿고, 오늘도 열심히 '글 읽기'와 '글 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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