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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Dec 26. 2020

'히어로'에 빠진 우리 엄마

트로트 열풍이 우리 엄마를 삼켰다

'히어로'에 빠진 우리 엄마

지나간 노래를 싫어하시던 엄마


노래를 잘 부르시기도 하고, 노래를 좋아하시기도 하는 엄마와는 만나면 항상 노래방이었다. 심지어 내 졸업식 날 서울까지 올라오신 엄마와 작은 숙모와, 친구들과 점심 먹으러 짜장면집에 갔다가 축하 뒤풀이도 할 겸 모두 함께 찾아간 곳은 노래방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후반, 나는 항상 익숙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의 노래를 불렀고, 나보다 신문물 영접 속도가 빠른 내 친구들은 1990년대 중후반에 나온 곡들을 불렀고, 엄마는 우리 모두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는 발표된 지 1달 정도 된 최신 댄스곡을 부르셨다. 친구들이 '아줌마 멋지다'라고 난리 법석을 떨었던 그때 그 노래방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 것은 엄마의 삶의 낙이자 중요한 취미였다. 이제 뜨기 시작하는 최신곡을 단시간 집중력을 발휘해 연습한 후,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부를 때, 특히 젊은 사람들이 '우와, 아줌마가 요즘 나오는 이런 신곡을 부르시다니!' 감탄할 때, 무척 만족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요즘으로 치면 50대 중년 여성이 방탄 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 후속곡 'Life Goes On'을 멋지게 부르는 느낌 정도랄까.


엄마는 유행 지나간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는데, 아마도 성격 유별난 할머니와 아빠의 수발을 들며 사는 삶이 그렇게 녹록지도 즐겁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나간 노래들이 되새기기 싫은 상처 투성이의 힘든 기억이라면, 새로 나오는 신곡은 희망찬 내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특히 트로트 음악은 채널을 돌려버릴 정도로 싫어하셨었다. 옛날 사람들이 술 취해 흥얼거리는 그 구성진 노래들은 외할머니를 일찍 잃고, 외할아버지가 새장가를 빨리 가버린 엄마에겐 아팠던 기억만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트로트는 딱 듣기 싫었다. 바꿀 형편이 되지 않아 계속 마주봐야 하는 '지겹도록 오래된 벽지', '닳고 닳은 낡은 장판', '외로운 노인이 절망 속에 들이키는 쓰디쓴 강소주' 같은 느낌. 그냥 진부하도록 지겨운, 어둡고 우울한 '한'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70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트로트'는 별로


엄마는 어느새 70 노인이 되셨고, 나도 만만찮은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우린 분명 '트로트'를 싫어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고, 엄마는 손주들과 방탄이들의 신곡을 찾아들어 보는 그런 할머니다. '가요 무대'나 '전국 노래자랑'보다는 '케이팝 스타'나 '슈퍼 스타 케이'가 더 끌리는 할머니. 


처음에 한국에 트로트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시큰둥했었다. 작년 이맘때쯤이던가, 주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조명섭'군의 '신라의 달밤'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내 시부모님들은 '조명섭'군이 나오는 '가요무대' 시간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실 정도로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작년 크리스마스, 설날에 시댁에서 모였을 때 온통 '조명섭'군 이야기만 하셨던 게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을 정도다.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들어 보니,  100년 전 사람이 빙의한 듯한, 스무 살 청년의 목소리와 표정 말투가 너무 신기하고 매력이 있어서 엄마에게 들어보시라고 권해드리기도 했는데, 엄마는 분명 이렇게 대답하셨었다. 


잘 부르네. 근데 난 원래 트로트를 안 좋아해.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가 왔다. 엄마의 소소한 즐거움이던, 친구들과 만나 밥 먹고 커피 마시던 모임도 없어지고, 노래 모임에도 교회에도 나갈 수 없게 된 상황. 코로나가 친구들 만나고, 좋아하는 취미 생활하고, 꽃구경 다니며 - 건강을 잃어가는 우울한 마음을 추스르고 가능한 즐겁게 - 노후를 보내고 싶은 노인들의 일상을 무참히 때려 부셨다. 그 사이 한국 음악 방송은 엄마가 싫어하는 '트로트' 장르가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상황!


엄마가 포기했다. 그나마 음악 방송 보는 게 하루의 낙인 엄마는 울며 겨자 먹기로 '트로트' 음악 듣기를 시작하셨다. '트로트'도 음악이다 수용하셨다.



'트로트'로 엄마를 감동시킨 '히어로'


엄마가 언제부턴가 '임영웅'이라는 이름을 자주 언급하신다. 원래 음악을 즐기는 편이 아닌 나는 티브이 본 적도, 음악을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엄마가 수시로 내게 뿌린 정보의 가랑비에 홀딱 젖어 버렸다. 임영웅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가수들과 다른지, 첫 소절 몇 마디만 불러도 감정을 제대로 실어 압도해 버리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정환경이 어떤지, 성격이 어떤지, 그 사람 모친의 직업이 무엇인지, 돈을 어떻게 쓰는 스타일인지, 기부를 얼마나 했는지, 이번에 누가 코로나 걸려서 격리를 며칠 동안 했는지... 다 알고 있는 나. 모르는 사람의 신상을 이렇게 자세히 알게 된 이 상황이 웃기다고 할까, 웃프다고 할까. 


엄마를 가만 관찰해 보니, 한국 음악방송이 없는 날엔 엄마는 계속 유튜브 방송을 보시는 것 같다. 들려오는 방송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임영웅'이라는 이름이 계속 언급되고, 그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로 봐서, 전에 봤던 음악 방송을 수없이 돌려보시는 것 같다. 



울 엄마 빠순이?


하루 종일 그 사람 얘기만 하고, 그 사람 영상만 보고,... 이 정도 좋아하면 '빠순이'라고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엄마가 혹시 그 사람한테 편지도 써 보고 싶은 거 아니신가 여쭤보니, 예전 같으면 


연예인이 뭐라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그냥 나 재밌자고 방송 보는 게 다지. 그거면 충분하지. 난 그렇게까지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 된다.


라고 말씀하셨을 분이, 


요즘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생기네.


라는 정말 평생 겪어 왔던 엄마와 너무 다른, 반전의 말씀을 하신다. 



제대로 엄마를 뺏긴 이 느낌. 그냥 두고 보는 게 맞는 걸까?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일, 전에 본 적이 없는 엄마의 모습이라 내 마음이 뭔가 편치가 않고 매우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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