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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Dec 30. 2020

코로나에 지지 않고 '집콕' 휴가 재미있게 보내기 1

2020년 12월 29일 서점 나들이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새해 첫날까지, 1년에 딱 한 번 있는 긴 겨울 휴가를 여행지가 아닌 집에서 보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야 했던 20대 시절에도 겨울 휴가에 어딜 안 가면, 친구 집이나 친척집에라도 가서 지냈으므로 '집콕'하며 연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뭔가 '비정상'적인 느낌이 든다. 그리고 동시에 하루하루가 몹시도 아까운 느낌. 내 하루를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감으로 삼켜 버리려는 코로나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연말 돌리 도. 내 휴가는 절대 못 뺏긴다!


'벌써 12월 29일이네' 하며 전화기 달력을 열어 남은 날을 세어보니, 1월 1일은 아침부터 시댁과 지인들 집에 떡을 돌리러 돌아다니기로 했으니 예정된 일정이 있는 셈이고, 정말 집콕하는 휴가는 29, 30,31, 딱 3일 남은 상황. 집에 있어야 하는 김에 새해맞이 대청소 대정리를 하겠다는 목표는 세워두었으나, 정말 3일 내내 청소만 할 수는 없는 일. 


이리저리 검색을 해 보다가, 내가 사는 도시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 전에 '기생충' 영화를 보러 갔던 백인 타운 - '반잰노블' 서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 입수. 애들에겐 사고 싶은 책을 사주겠다고 하고, 어른들은 남이 타주는 커피 서비스를 받자며 온 가족이 출동했다. 




서점에 딱 들어서자마자, 한국계 작가가 쓴 신간 한 권이 눈에 띈다. 미국에서 한국인 이미지를 그린 책 표지 중에서 이렇게 눈 크고 광대뼈 작고, 코 높고, 입술 도톰하게 표현한 한국인 얼굴은 처음 본다. 케이팝 아이돌 이미지의 영향일까. 몇 장 읽어보니 청소년을 타깃으로 하는 가벼운 로맨스 소설이면서, 동시에 소속감을 갈구하는 이민 가정 여학생의 결코 가볍지 않은 사색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Finding My Voice> by Marie Myung-Ko Lee

나는 미국에서 자란 한국계 2세 작가들이 쓴 책이 보이면 모두 읽어보는 편이다. 두 나라, 두 문화, 두 언어 사이에서 태어난 2세 작가들은, 그 사이 간극 안에 갇혀버리지 않기 위해, 두 문화와 소통하며 자기 세상을 키워나갈 수 있기 위해, 불안정한 정체성과 자아상, 소속감을 분명히 세워내기 위해 치열하게 갈구하고 고민한다. 나는 2세 자녀를 키우는 1세 부모 입장에서 그 고민들을 충분히 알고 싶고,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기에 그들의 책을 부지런히 읽는 편이다. 


무척 애석하게도, 많은 한국계 작가들이 그리는 한국계 이민 가정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들의 눈에 비친 부모들의 삶은 전쟁터 같다. 먹고살기 위해 새벽같이 나가 일을 하고, 먹고살기 바빠 서로를 돌아보지 못하는 사이, 가족 관계는 깨지고, 그 틈으로 온갖 비극이 일어난다. 배신, 상처, 학대, 무시, 냉대, 분노, 우울, 자살, 가출, 사고,... 어쩔 수 없는 절망의 기운이 모두를 집어삼켜 버린 지옥 같은 환경에서, 언어의 힘, 글쓰기의 힘으로 살아난 작가 자신의 경험들, 작가로서 정체성을 세우고, 구독자와 소통하며 소속감을 이루어낸 그들의 치열한 삶이 드러나는 것을 본다. 첫 소설을 쓰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는 그들의 성장 과정을 본다. 나는 그들의 글을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읽으며 그들이 글쓰기를 시작한 것에 미국 서점가에서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그들의 차기작도 곧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책을 사고 주변 지인들 자녀들에게도 선물을 하는 편이다. 한국에서도 이들 책이 널리 번역되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언제나 이들의 책을 마음을 다해 번역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지나가는 출판사 관계자가 계시면 문의해 주시라.


한국계 작가의 신간을 보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떠올라 마음이 찡해져 버렸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이 필요한 시간. 서점 내 커피점으로 갔다가 마주친 것은 우리의 멋진 글로벌 아이돌, 

BTS!

'인기 잡지' 코너를 만들어 사람들이 몰리는 커피점 줄 서는 자리 앞에 딱 배치한 서점 주인의 센스 보소! 헛, 이건 다른 작가님 문체 도용인 듯 한데...'BTS 사진 들어간 잡지가 요즘 젤 잘 팔려요. 잡지 찾아 삼만리 할 필요 없이, 서점 입구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길에 편하게 잡지 한 권 뽑아 같이 계산하시라고 이렇게 배치했습죠!' 하는 서점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커피를 사서, 아이들의 책을 골라 보려고 아이들 코너에 갔더니, 어린이책 코너 한 중간에 이렇게 눈에 띄게 전시된 '엑소'책이 있다! 옆에 보니 케이팝, 아이돌 관련 책들도 보인다. 아무래도 이 서점 직원 중에 혹은 서점을 자주 찾는 고객 중에 케이팝 팬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책 배치를 눈에 띄게 해 놓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아이돌이 수많은 책들 사이에 묻혀버리지 않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엑소 팬이 아니기에 사진 하나 찍고 조용히 지나갔지, 엑소 팬 이기라도 했으면 눈물이 터지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여행도 못 가고, 사람도 못 만났지만, 커피 바리스타가 만들어 주는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한국계 작가의 신간과, BTS와 EXO와 함께 한 휴가 하루, 나름 무척 행복했다. 


코로나와 싸워 이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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