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의 관종 여우 10

웰컴 투 아수라장

by 하트온

"미쳤어? 모르는 사람을 왜 초대해?"


헤어지는 인사 끝에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남규식을 집으로 초대하고야 마는 그의 오지랖을 꾹 참고 있다가, 남규식을 내려주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눈이 둥그레진 유리가 옆에서 움찔하는 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터져 나오는 울화를 누를 사안이 아니다.


"그 사람도 글 쓰는 작가래. 인도에 사는 한국 주재원 가정 취재하고 싶다 하는데, 내가 작가 남편이라 그 사정을 잘 알잖아. 작가들 서포트하는 정신이 배어 있잖아."


터진 입이라고 불륜 서포트하다 제 발등 찍을 소리를 하고 앉아 있다.


"우리가 남 서포트할 여유 있어? 남한테 그럴 여유 있으면 자기 딸이나 한 번 더 관심 가져주고 챙겨."

"나도 그 아저씨 변태 같아서 싫던데. 비행기 안에서도 옆에 여자들한테 계속 들이대서 시끄러워 죽는 줄..."

"야 유리! 너 자꾸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래? '변태'라니, '들이대'다니...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그거 애들이 할 말 아니야. 알았어? 앞으론 그런 단어 안 쓴다고 대답해 얼른!"

"마마보이 주제에 뭐래..."

"뭐, 마마보이! 주제!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어디서 배워 먹은 말버릇이야!"


유리는 귀를 파서 후 부는 시늉을 하며, 매사 어른, 아이를 구분 지으려는 남편을 '보이', 그것도 '마마보이'라고 제대로 깔아뭉갠다. 어린아이에게 철저히 우롱당한 어른이 방방 뛰며 소리를 꽥꽥 지른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어디서 애한테 소리를 질러?"


내가 더 크게 단전의 힘을 끌어올려 소리를 지르니 남편은 놀란 조개처럼 꾹 입을 다물고, 유리는 터져 나오려는 사춘기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돌린다.


나는 이 맛에 애 딸린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가식 없이 나 자신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모범생처럼 회사일 밖에 모르고, 다른 영역들엔 좀 어수룩해 보이는 게 나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건 어느 독서 카페에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죽치고 책을 읽는 편이었고, 그는 독서 카페의 조용한 분위기를 이용해 주말에 업무 관련 공부를 하는 편이었다. 나를 흘깃흘깃 보기만 할 뿐 좀처럼 표현을 못하는 그를 짓궂게 놀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아저씨, 난 여기 내일부터 안 올 거예요. 나한테 관심 있으면 지금 따라 나와요."


그가 물건을 사방에 떨어뜨리며,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따라 나오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대기업 사원의 전형이었고, 나는 아마도 그 '무난함'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그는 아마 나의 '비범'한 분위기를 느끼고 '일탈'을 갈망했기에 나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둘 다 이 기회를 놓치면 결혼이란 걸 다신 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조바심을 내며, 나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전력으로 매달린 건지도 모른다. 그가 이혼 전력이 있고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의 흠집난 결혼 이력이 내 몸의 흠집 이력을 커버해 줄 '피장파장'이라고 자의적 해석을 감행해 버렸다.


'평범'이란 건 가지자마자 싫증이 나는 것임을 '평범'과 결혼을 해 보고서야 알았다. 모든 면에서 나와 너무 다른 건 둘째 치고, 모든 면에서 평범한 선택을 할 것이 너무나 예상되는 그의 사고 패턴이 점점 지겨워졌다. 그는 '비범'을 선택한 것이 매일의 생활 속에서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난 돌'을 커버해야 하는 일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는 걸 들었다. 그는 내가 아파서 방에 조용히 누워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 사람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엄마가 이해 좀 해 줘. 그 사람이 부모도 없고 뭘 배운 게 있겠어... 당연히 예의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지... 그래도 좀 불쌍하게 봐줘... 헤어지는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결정적으로 그 통화를 엿들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급히 남규식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헤어지는 문제를 알아서 한다'는 말 뜻이 '헤어지겠다' 고 마마보이답게 어머니의 뜻에 수긍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그는 뭄바이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거란 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해를 해버렸던 나는 글을 다시 제대로 쓰기 시작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방법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끔 뼈저린 후회를 한다. 과연 그때 정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남규식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고, 글을 다시 쓰는 일이 불가능했을까. 나는 확실히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내가 그를 떠나고, 그가 내게 배당해 주었던 글 세계 인맥을 다 차단해 버렸을 때, 그 절망의 맛이 다시 올라왔었다. 기대했던 대학 장학금이 내 손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을 때의 그 검게 탄 맛. 결혼과 동시에 나는 다시는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구나 좌절했었다. 나는 내내 그 절망적인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절망을 걷어 내려면 남규식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원하는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두려움이 조종하는 조바심이 내 안에 가득 일어났다.


내가 조금만 마음에 여유가 더 있었더라면, 좀 더 대범했더라면, 의지할 마음 한 조각이라도 가진 게 있었더라면, 남규식이라는 꼬리표를 단 등단 작가 '이은수'를 내려놓고, 필명을 만들던, 개명을 해서라도 새로 시작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신춘문예, 공모전에 도전하고, 출판사 문을 스스로 두드려 봤을지도 모른다. 아니, 글이 아닌 다른 분야를 개척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여기는 생각의 덫에 빠져있던 그때의 나는, 그 길 밖에 없다고 믿었다. 믿을 사람이 없는 나는 평생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운명인지 모른다. 나는 남편이 뭄바이행을 택했어도, 그를 내 생계의 책임자로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없다. 그의 어머니가 살아계신 한, 나는 그와 평생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지금은 잠시 뭄바이에서 사십춘기를 부리고 있다 해도, 그는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유리가 왔기에, 유리 아빠에게 기생하는 어른으로 비치고 싶지 않다. 유리 앞에선 아빠의 인정받지 못하는 후처보다, 모범이 되는 어른이 되고 싶고, 좋은 글을 쓰는 존경받을 만한 작가가 되고 싶다. 무엇보다 경제적 결정 앞에서 당당히 선택하고 주장하고 싶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완전한 독립'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제대로, 한 사람의 성인으로 독립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땐 부모에게, 청소년기는 친척집, 20대 초반은 남규식, 20대 후반엔 남편. 그까진 용서할 만하다. 30이 넘어서 다시 남규식에게 기댈 마음을 먹었던 선택이 나는 두고두고 부끄럽다. 이젠 정말 어른이 되자 싶다.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 꿋꿋이 일어서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유리를 곁에 데리고 있고 싶은 건, 이 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 내가 강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걸 상기시켜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름난 작가가 되는 순간, 독자들이 너무 읽고 싶어 하는 작가가 되는 순간부터는 나는 남규식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에게는 글 밖에 없다. 어떻게든 글을 부지런히 써야 하고, 글로 내 삶을 일으켜 내야 한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는 남규식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는 넘어야 할 산일 것이다.


남규식을 최대한 내 삶에서 밀어내고 싶은 나이기에, 나는 정말 남규식이 나의 사적인 공간 - 결코 여기까지는 내어줄 마음이 없는 - 까지 치고 들어오는 것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이 그를 초대한 것이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화가 난다. 단 하나의 보루, 나의 성역이 그의 농간에 허물어져 가게 둘 수 없다. 더욱이 유리가 있기에, 어른들의 가증스러운 쇼를 더 이상 보여줄 수 없다.


유리가 화장실에 들어 간 사이 나는 남편에게 낮게, 하지만 충분히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


"전화해서 와이프가 시간이 안된다고 해. 일요일엔 난 글 쓸 거야. 이제 평일은 내 시간 가지기가 쉽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은 글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

"이미 뱉은 말인데 어떻게 번복해. 이번 일요일만 손님 한 번 치르고, 그다음 일요일부턴 글 쓰든지 해. 일요일엔 내가 유리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뭐? 날 어쩐다는 거야?"


유리가 화장실에서 나오다 제 이름 말한 걸 듣고 캐물으려 든다.


"아, 네 엄마가 글을 써야 하는데, 평일엔 힘드니까. 일요일에 작업한다고... 스케줄 의논 중이야. 참 넌 아빠가 알아보니까, 여기 국제 고등학교는 8월에 시작이더라. 근데 영어가 안되면 본 수업에 들어갈 수가 없대. 교사들이 대부분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래. 아빠 생각엔 8월까지 한 4개월 남았으니까 그동안 영어 공부를 좀 집중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얘를 영어 단기 코스에 집어넣을까 싶어. 괜찮은 단기 코스 있는지, 어디다 물어봐야 되지? 회사 사람들한테 물어볼까."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아난트가 떠오른다. 그를 가르쳤던 교사들이 미국인들이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인도 재벌집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실력도 있고, 경험도 풍부할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아난트는 적어도 믿을 만한 교사를 알고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 아이들을 잔뜩 모아놓고 가르치는 영어보다 원어민 교사와 1대 1로 소통하는 영어가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조금 가격이 세더라도 제대로 배워 놓으면, 다음 단계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유리 영어 교육은 나한테 맡겨 봐. 내가 확실한 방법을 알 것 같아."


나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에 나를 믿는 안도감이 깃드는 게 느껴진다.


"유리 교육 문젠 다 내가 알아서 제대로 할 건데. 단, 난 손님 초대 같은 거 절대 못한다. 그건 당신이 번복을 하든, 직접 밥을 차려 주든 알아서 해. 뭘 하든 유리하고 난 빼 줘."

"완동 완동!"

"..."

"뭐?"

"못알아 듣는 거야? 아, 이 문찐들... 완전 동의한다고요!"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어른 둘의 눈이 저에게 모이자, 유리는 귀찮다는 얼굴로 풀어서 설명해 준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너 신경 안 쓰이게 처리할게."


남편은 몹시 곤란하게 됐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지만, 자기 입장 세우자고 고집을 부릴 마음은 없어진 듯하다.





역시 아난트는 기상천외한 답을 제시하는 해결사였다. 그가 자기 집안 아이들의 홈스쿨 클래스에 유리를 끼워 넣겠다고 했을 때 나는 뭐라 대답할지 몰랐다. 게다가 교육비는 이미 집안 재단에서 감당하는 것이라 따로 수업료를 낼 필요도 없다고 했다. 얼떨떨해하는 나에게, 다만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조심해 달라고만 했다.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의 집안 아이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아이를 참아줄 수가 없을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오전에 요가와 영어, 컴퓨터와 에티켓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원하면 오전 수업 다 참여해도 된다고 했다.


유리는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일단은 요가와 영어만 하겠다고 한다. 어차피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면 바보가 될 뿐이라는 완벽한 분석을 순식간에 해낸 유리였다. 무료 귀족 수업을 일부 놓치는 것이 아깝지만, 사람의 자존감도 중요하니 강요하지 않았다.


유리의 첫 수업 날, 나는 유리를 데리고 아난트의 집안 건물 앞으로 왔다. 아난트가 건물 로비 입구 벤치에 앉아 있다 우릴 보고 성큼 걸어 다가온다.


"하이, 레이디즈!"

"하이, 아난트"

" 대박... 잘생... 이민호인 줄... 와... 인도 사람 중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 첨 봄."


오늘 유난히 아난트에게서 후광이 번쩍인다. 인도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된 유리가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거침없이 묘사한다.


"네가 유리구나!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오늘은 첫날이라 조금 어색하겠지만 차차 괜찮아질 거야. 다들 좋은 애들이니까, 친구 될 수 있을 거야. 요가하고 영어 수업만 참여한다고 했지?..."

"뭐라는 거예요?"


아난트의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유리가 나를 보며 도와달라는 얼굴을 한다. 아난트가 한 말을 그대로 한국말로 통역해 주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짓는다.


"쌤, 대박 잘생기셨어요. 쌤이 가르치시는 과목은 뭐예요?"


유리는 아난트가 교사인 줄 아는 모양이다. 하긴 아난트가 어떤 존재인지 달리 설명을 해준 적이 없다. 내가 유리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아난트에게 통역해 주자 아난트가 이빨을 다 드러내고 빙구같이 웃는다. 예쁘고 잘 생겼다는 말이 입 찢어지게 기분 좋은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웃으니까 더 빛이 나는 아난트에게 유리도 나도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요가 쌤이야."


아난트가 진짜 선생님으로 집안 아이들 교육에 참여하고 있을 줄 몰랐던 나는 깜짝 놀란다.


"요가 수업에는 어른들도 올 수 있으니까 엄마도 같이 들어와요."


어차피 근처 카페에 앉아 기다릴 참이었으므로, 요가 수업 참관 제안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아난트가 요가 수업을 이끄는 것을 보고 싶기도 하고, 요가는 전부터 배워야지 하던 것이기도 해서 나는 제안을 굳이 뿌리치지 않고 같이 요가 수업에 들어 가 보기로 한다. 아무리 '천하 센캐'지만 첫날이라 긴장되는데 같이 들어와 준다니 유리도 더 안심하는 눈치다.


아난트가 이끄는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발레 무용실처럼 사방이 거울로 된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바닥은 고급 목재 재질의 마루로 되어있고, 천정엔 수십 개의 핀 조명이 공간을 무대 위처럼 멋들어지게 밝히고 있다.


아난트가 매트 2개와 방석과 블록들을 가져다주며, 첫날엔 다 따라 할 필요 없으니 무리하지 마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다. 아난트가 당부하는 것들은 유리에게도 전한다.


아난트가 옆에 연결된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자, 곧이어 차분한 음악이 코너마다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우리는 그 사이 아난트가 아까 알려준 대로, 양말과 재킷을 벗어 소지품과 함께 뒤편 입구에 마련된 보관장 한 칸에 넣어두고, 매트를 깔고 자리를 잡는다. 곧이어 아난트는 그의 날렵한 상체 잔근육이 다 드러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나타난다.


"대박! 와... 몸짱 몸짱!"


역시 유리는 거침없는 소녀답게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감흥을 숨기지 않는다. 그나마 장소가 장소니만큼 손뼉 치고 발을 구르고 싶은 것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눈치다.


아난트는 우리와 마주 보는 위치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긴 호흡을 시작한다. 유리와 나도 그와 똑같은 자세로 앉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감고 호흡을 따라 해 본다. 한 사람 한 사람 조용히 실내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들어 슬쩍 둘러보니, 함께 요가를 배우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다 해서 한 1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모두가 편히 요가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딱 적당한 수다.


아난트는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요가 동작들을 이어간다. 동작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각 동작의 이름을 영어와 힌디어를 섞어 가며 설명해 준다. 아난트는 고난이 동작을 이어가는 중간중간, 그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쉬운 동작들도 알려주니 따라 하기가 쉽다.


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난트가 요가 선생님 역할을 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유리는 아난트에게 눈을 고정하고 열심히 요가를 따라 한다. 꽤 힘들어 보이는데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따라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땀이 줄줄 흐르고 악 소리 나게 근육이 당기는 데도, 불평 한마디가 나오지 않는다. 힘든데 행복한 경험은 처음이다. 수업을 가르쳐 주는 교사가 누구인지가 이렇게나 중요하다. 아이돌이 교사라면 전과목 만점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뭇 여학생들의 바람이 너무도 이해가 간다.


요가 수업이 끝나고 땀을 닦고 소지품들을 챙기며 전화기를 보니, 문자가 들어와 있다.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뱃속이 찌릿 뒤틀린다.


[야, 나 심심해. 도대체 언제 시간이 나는 거야? 내 소설 ㅅㅅ 씬 손보려면 네가 있어야 해.]


지금까진 아이 핑계를 댔다. 하지만 한 번은 그 짓을 해주어야 넘어갈 일이다. 지난 2여 년 동안 뭄바이에서 자유로웠던 몸은 이 상황을 더 힘들어한다. 너무 싫다고 배를 뒤틀고, 두통을 일으키며 발악을 한다.


[일요일엔 갈 수 있어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원하지 않는 문자를 보내 놓고 나는 입안에 모래가 씹히는 걸 느낀다.


"유리 영어 수업하는 동안, 나하고 커피 한 잔 할래요?"


유리를 영어 수업에 데려다주러 갔던 아난트가 어느 틈에 옷을 갈아입고 와 내 곁에 서 있다. 모래 씹는 기분을 없애는데 '녀석'의 밝은 에너지가 최고긴 하다.


"그래. 커피 마시자."


아난트가 이끄는 대로 창가 테이블 자리로 가서 앉아 있으니, 그의 부름을 받은 누군가가 커피를 가져온다. 매끄럽게 잘 빠진 하얀 커피잔이 매우 고급스럽다.


"커피 잔이 참 예쁘다."

"무슨 일 있어요? 뭔가 표정이 안 좋아. 처음 만났을 때 딱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무척 궁금했었던 것 같아. 무슨 사연을 가진 사람인지."


내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게 아난트의 눈에도 보이는 모양이다. 기구한 팔자를 모두가 알아챌 만큼 어두운 느낌을 내뿜고 다녔던 모양이다.


"해결이 안 되는 고민이 있어."

"제발 말 좀 해 봐요.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의외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까."


그의 능청스러운 말은 항상 나를 웃게 만들어 준다. 나를 웃을 수 있게, 마음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사실 일찍 알았다 해도 감히 이렇게 잘 자란 밝은 사람들은 연인이나 결혼 상대로는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의존하지도 않는 동등한 친구이기 때문에 가끔 고민도 털어놓는 부담 없고 편한 우정 비슷한 걸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주 하기 싫은 걸 해야 해. 안 해도 되는데, 안 하면 내 일이 없어져."

"얼마나 하기 싫은데요?"

"죽도록 하기 싫어."

"일이 없어진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나에게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사람이 내가 글을 쓸 기회들을 잡고 있어..."


나는 아난트에게 내가 글을 쓸 기회들을 어떻게 남규식이 좌지우지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아난트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사실 이런 남이 밥줄을 조종하는 일은 상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어렵지. 어려워서 나도 해결 못하는 문제야. 그래도 네가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 주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난트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연다.


"잘 모르겠지만,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 아빠 말씀을 전해야 해서 제가 좀 민망하긴 한데,... 당신에게 가장 도움이 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중요하니까, 그냥 솔직히 아빠에게 들은 말을 할게요. 저희 아빠 말씀이, 생각이 하는 말만 듣지 말고, 몸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라고 하셨어요. 특히 큰 결정을 할 때, 그 느낌을 무시하면 일이 틀어지는 걸 보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사업가는 몸이 하는 말에 아주 예민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그 말이 생각이 나요. 사업가뿐만 아니라 누구나 몸이 하는 말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몸이 하는 말... 그런 걸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나는 내 몸이 하는 말을 한 번도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자기 느낌을 잘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느낌 좋은 일로 가득 차는 하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제가 이렇게 할 일없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는 열심히 느낌 좋은 일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요가를 하는 것도,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저에겐 느낌이 좋은 일들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느낌을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도 있는가 싶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으니, 좋은 느낌만 찾아다닐 여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뒤틀린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좋은 느낌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데, 결국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할 기회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


"난 먹고사는 일이 급해서. 글로 돈을 벌 수 없게 되면 곤란해."


'녀석들' 앞에서 항상 여유로운 사람인척 했는데, 처음으로 내가 궁한 사람임을 고백한다. 이 나이에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이런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 많이 부끄럽다. 부모를 어릴 때 잃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핑계를 대고 싶지만, 입을 열려니 구차한 느낌이 들어 그만둔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돈에 영혼을 팔고 있는 상황이군요... 영혼을 먼저 구해내요!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요! 우리 인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불행한 일들이 있었다면 그건 전생의 삶이나 과거 삶의 결과라고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해요. 하지만 지금부턴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가는 거예요. 행복을 위한 지혜롭고 덕이 되는 선택을 하면 돼요. 내 영혼을 돌보고 성장시키는 만큼 행복한 인생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제발 영혼부터 구해야 해요. 영혼을 살리고 나서,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해요. 영혼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영혼이 바로 서야 좋은 글도 쓸 수 있어요. 그게 순서예요......"


아난트는 복음을 전하는 확신에 찬 부흥회 목사님처럼 목에 핏줄을 세우며 나를 설득한다. 아난트가 외치는 말들이 내 가슴에 후두두둑 박혀 들어온다. 영혼을 구해야 한다는 말, 영혼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말, 영혼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며, 영혼부터 살리고 돈을 생각해야 한다는 그 말들이 너무나 맞아서, 나는 아무 대꾸를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린다.


"여기 있었네요!"


어느새 영어 수업이 다 끝났는지 유리가 옆에 와 앉는다. 유리에게서 무척 신난 에너지가 느껴진다. 언제 열을 냈냐는 듯 아난트가 유리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준다.


"애들이 영어를 다 잘해. 나보다 어린애들도 대박 잘해. 빡세긴 한데, 따라갈 만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완전 친절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신경 써 줘. 수준이 조금씩 다 다른데 거기에 맞춰서 다르게 뭔가를 해줘. 이런 수업 완전 좋아. 한국에서도 이렇게 수업해줬으면 내가 영. 포. 자는 안되었을 텐데.... 아, 참, 작가님 '문찐'이지? 영어 포기한 사람요..."


유리가 재잘대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 구멍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싶어 진다. 내 영혼을 다시 살려 낼 어떤 구멍 속에서 다시 잉태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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