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설

깨끗하고 새로운 해피 해피 설

by 하트온

설이 너무 아픈 기억이라


설날뿐 아니라, 모든 명절을 싫어했다. 아니, 모여서 제사 지내야 하는 모든 날이 싫었다. 친척들이 제사상이 정성이 부족하네 어쩌네 타박하는 말도 듣기 싫었고, 그런 말들이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도 싫었고, 결국 며칠 동안 음식 하느라 생고생한 것으로 모자라, 문제 가득한 집단의 욕받이 볼모가 되어 온갖 심리적 물리적 학대의 집중 표적이 되는 엄마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발길질을 당하며 문밖으로 내팽개쳐지는 엄마의 이미지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다. 엄마가 극심한 압박감 속에서 차려낸 음식을 가지고, 떡 벌어진 제사상 앞에서 근엄하고 성스러운 표정으로 차례를 지내고 음복하는 아버지와 삼촌들을 보면 제사상을 확 발로 차서 엎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평생 귀신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듯 공포심을 조장하고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가스 라이팅 해온 미신인지 불교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정신세계에 빠져있는 어른들을 나는 혐오했다. 그래서 나는 설 같은 건, 제사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교과서나 백과사전에 실린 모두가 모여 차례를 지내는 사진이나 그림조차도 나에겐 공포물이었다. 나는 그냥 명절이, 평소 발이 부르트게 뛰어다니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푹 쉴 수 있는 날이었으면 했다. 어쩌면 나에겐 '행복한 엄마'가 절실했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설을 버리고 산지 20여 년


나는 고집스럽게 설을 무시하고 살았다. 음력으로 계산되는 모든 날들을 내 마음속에서 지웠었다. 미국에 산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인구수가 제법 되는 소수민족들의 큰 명절을 챙기는 편인 미국의 학교, 도서관, 미술관 같은 기관들에서도, Lunar New Year's Day 혹은 Chinese New Year's Day라는 이름으로 각종 이벤트를 열고, 한인 마트에서도 설 특별전 행사 같은 것을 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설음식을 다 챙겨 먹을 수 있고, 이벤트에 참여하며 기분을 낼 수도 있고, 심지어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설을 버리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설을 싫어했던 것은, 설을 그런 방식으로 지냈던 어른들의 문화를 싫어했던 것이고, 그 문화 속에서 일어났던 약자를 짓누르는 학대를 싫어했던 것이지, 내가 설을 버리고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즐거울 수 있는 명절날, 내 트라우마에 갇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아이들이 커 가는 걸 보면서, 설에 대해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이들에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날을 즐겁고 좋은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지금은 살아 있지도 않은 기억 속의 옛날 사람들을 탓하고 희생자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내가 지겨워졌다. 엄마는 기억도 안 나고,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꾸 엄마를 보호하고 지키려 드는 심리 속에 갇힌 내가 오히려 엄마를 더 괴롭히고 있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나 자신을 내 삶을, 나아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거란 걸 깨달았다.



하얗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는 더 이상 희생자의 자리, 피해자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로 결심한다. 엄마를 지키는 수호자의 자리도 버리려 한다. 나도 이제 설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올해 미국 설은 화이트 설, 흰 설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시작하기 위해 흰 떡국을 먹는 것이라는데, 흰 눈까지 와서 세상을 깨끗이 덮고 시작하니 더욱 기분이 좋다.


집 앞 나무


눈 덮인 나무 위에 '새해 복'을 닮은 빨간 새가 포로롱 날아와 앉아 놀다 간다.

집 앞 나무에 자주 찾아오는 빨간 새, 홍관조 (Northern cardinal)


우리 집 설 문화는 내 손에 달려있다


설에 우리 가족이 무엇을 하며 보낼지, 아이들의 마음에 설이 어떤 기억 어떤 의미로 남을지, 이젠 내 손에 달려있다. 일단 맛있는 걸 먹자고 했다. 내일은 좀 멀어도 한국 마트가 있는 곳으로 가서, 가족들이 좋아하는 떡과 음식들을 많이 사 올 것이다. 만두 넣고 떡국도 한 번 더 끓여 먹어도 되겠다 싶다. 그리고 집에 와서 윷놀이도 하면 좋겠다. 잊고 살았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더 재밌게 보내고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모두가 즐겁고 평화롭게 릴렉스~


해피 설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설 쓰다 졸려 쓰러지는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