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가 만든 불신의 늪
뭘 해도 허접해서
무엇을 하건, 하고 나면 허접하게 느껴졌다. 연구를 할 때도, 논문을 쓸 때도, 하고 나면 다시 돌아보기가 싫었다. 너무 허접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그것이 내 문제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왜 더 이상 이공계 연구에 종사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연구소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 조잡하고 허접하게 느껴져서 싫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과학 연구가 조잡한 일이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글을 쓰면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글을 쓰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쓰고 난 글은 조잡하고 허접해서 읽을 수가 없다. 소설을 쓰다가도 계속 이어갈 수가 없다. 시를 써도 이런 수준의 시는 결코 문학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다시 보고 손을 봐야 글이 더 나아질 텐데, 도무지 다시 펼쳐볼 수가 없다. 머리와 마음이 저절로 셔터문을 내리고 글을 다시 보려 하지 않는다. 언젠가 마음에 셔터문 현상이 오지 않을 때, 그때 글 수정 작업을 하고, 투고를 하고, 출간을 꿈꿔보겠다고만 생각했다.
브런치에 글이 가득 쌓여가고 있다. 벌써 브런치 북도 9 권이나 발간했다. 1 권만 더 발간하면, 나는 더 이상 새로운 브런치 북을 만들 수 없게 된다. 쌓여있는 브런치 북들을 어떻게 한담...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점검해야 했다.
마음의 거울을 펼쳐놓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분명히 깨달았다. 글을 낳기만 하고 끝까지 돌보고 있지 않는 무책임. 계속 새 글을 써 나가기만 할 뿐, 앞서 써 놓은 글들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는 무책임한 내 안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건 게으름에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혐오가 그 속에 녹아 있었다. 나 자신을 더 잘 돌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 속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자기혐오가 파 놓은 늪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내가 하는 일의 퀄리티를 믿지 않는 불신의 늪이었다.
믿어주어야 한다
얼마 전 서평단 지원 일로 나무산책 작가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보내주신 마지막 이메일에, 출간까지 오기까지 나 자신을 믿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게 문득 떠올랐다. 내가 내 글을 쓰기만 할 뿐 계속 방치하고 있는 것은,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 결과 나타나는 행동임을 깨달았다. 거기에다 나는 그럴듯한 변명까지 붙이고 있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야. 내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다면, 치유의 언어가 되어주었다면 그걸로 됐어.'
나의 변명 같은 생각이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생각은 잘못된 사고 바탕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의 글을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생각인 것이다. 심지어, 브런치 북 9권에 매거진 10개를 만들었으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출간 수확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브런치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브런치 운영단 입장에서 볼 때 가능성이 없는 작가로 분류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한 자락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브런치가 내 글을 이어나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인 걸까 하는 의심마저 생겼다.
사람은 생각이 흐르는 대로 결국 행동을 하게 된다. 이대로 생각이 흐르다간, 브런치에 글을 그만 쓰게 될 것 같았다. 그게 과연 내가 원하는 일일까 생각했다. 과연 브런치를 그만두고 전처럼 블로그로 간간이 글을 이어가는 것이 내가 원하는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나는 브런치에서 다른 작가님들과 교류하며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좋다.
내가 브런치에서 글을 계속 쓸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부터 내 글을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내 글이 널리 읽히도록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내 글을 위해 노력할 사람, 돌보고 키울 사람, 길을 찾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내 글은 온전히 내 책임 하에 있다.
낳았으면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내 글이 나아갈 길을 내가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 내가 쓴 글을 계속 보고 또 돌아보며, 정성으로 살피고 보살펴야 한다. 오랜 자기혐오를 씻어내고, 그 혐오가 남긴 내가 낳은 것들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씻어내야 한다. 그래야 관심을 주고 사랑할 수 있다. 그래야 보고 또 보고 싶다. 계속 들여다봐야, 길이 보이고, 방향이 잡힌다. 그래야 내 글과 내가 한 몸이 되어 나아갈 수 있다. 내 글과 내가 일심동체로 모든 것을 헤쳐갈 수 있을 때, 그때 나는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글을 사랑하며, 나를 믿으며 진정한 작가의 기본을 탄탄히 다지고 갖춘 후에야, 나는 내가 품은 글의 길, 글의 뜻을 활짝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에야, 나는 내 글을 사랑하는 구독자들과 한 마음이 되어 사랑과 진심이 가득 담긴 글쓰기를 성실히 흔들림 없이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내가 만들어 놓은 브런치 북 하나하나를 사랑으로 돌아보고, 투고의 길을 모색하고, 더 널리 세상에 알릴 길을 찾아가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