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의 관종 여우 19

최고급 기회

by 하트온

김종희가 바로 뛰어드는 것을 보니, 이게 정말 될 것 같은 기회이긴 한가 보다. 30분쯤 후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야, 기회 물 건너가기 전에 빨리 진행시켜! 내 친구 술집 접기로 했다. 그리고 이 일에 올인해 볼 거라나 어쩐다나. 우리 잘해 보자! 네 덕분에 관광사업을 벌이게 생겼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는데, 올인은 좀..."

"우리 성격이 원래 그래.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라도 올인해서 화끈하게 하는 편!”

“아무튼, 고마워요. 든든해요 정말."

"정말, 농담 아니고, 최선을 다해 잘해 보자 우리."

"그래요. 꼭 그렇게 해요, 우리!"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잘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설레고 겁내기를 마구 반복한다. 흥분되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인도의 상류층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 한국의 최고급 장소들을 몸으로 느낄 기회. 작가로서 좋은 글감을 엄청나게 얻을 기회다. 동시에, 정말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밥그릇을 책임질 내 사업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를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또한 강하게 든다. 벌써 김칫국부터 마시는 감이 있긴 해도, 아난트의 어머니로부터 직접 의뢰를 받은 상태이니 이건 알짜배기 김치에 고기와 밥도 곁들인 김칫국이라 마음껏 마셔도 안전할 것 같다.


나는 유리와 아난트하고 이야기하는 단톡 방에 문자를 넣었다.


[종희 선배가 도와준대]

[오! 잘됐네요! 굿굿! 유리도 학교 안 가고 도울 수 있어서 굿!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요]

[와 대박! 좋은 예감 뿜뿜입니다! 우리 진짜 잘할 거예요!]


기쁨과 축배의 이모티콘이 마구 날아다니고 난리가 났다. 셋이서 밤이 늦도록 문자로 손잡고 방방 뛰었다.


***


희망이 일상을 지배하는 느낌이란 이런 것인가. 처음으로 꿈을 꾸다 깔깔 웃는 경험을 했다. 어떤 꿈이었는지 왜 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안의 감정이 전보다 밝아졌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걸 느꼈다. 내가 전보다 더 행복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딱히 일상에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감정의 온도가 확실히 달라졌다.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생각을 더듬었다.


딱 하나 확실히 달라진 건 남규식과 연락이 끊어진 것이다. 전에도 끊어진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연락을 억지로 끊는 느낌이었다. 역행하는 느낌. 거슬러 나아가는 내 어깨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내 삶을 숨기고 작가의 꿈을 포기했다. 아니, 사실 마음 깊이 포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미련이 궁지에 몰리면 다시 연락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어둡고 축축한 망설임을 잉태했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느낌이다. 마치 물이 흐르는 대로 떠밀려 움직이다 결국 그의 차원과 나의 차원이 달라져 버린 느낌. 그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어도 나는 그대로 있다. 아무것도 내 삶을 축낼 수 없게 강해진 느낌이다. 예상했던 대로 잡지 소설 연재도 끊기고, 실제로 일에 타격이 있는 상황인데도, 나는 실망을 느끼지 않는다. 무기력한 여주인공이 아슬아슬하게 끌어가던 글의 연재가 끝나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스토리의 주축이 되어 나아갈 강한 힘을 가진 여주를 드디어 만나게 되리라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 날 밀어 쓰러뜨려 봐, 내가 더 강하게 일어나는 걸 보여주겠어. 이런 오기가 가라앉으려는 내 마음을 따악 경쾌한 홈런, 상공으로 쳐 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누가, 무엇이,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가장 확실한 한 가지 실체는, 인도 재벌 사모님들을 한국으로 모셔가야 하는 이 엄청난 여행이다. 처음 해 보는 이 여행 준비가 확실히 나를 점점 바꾸어 간다. 내 감정을 변화시켜 간다. 흠을 잡아 비난하기 좋아하는 내 안의 어두운 목소리가 재차 묻는다. 혹시 돈 많은 사람들과 거래한다고 네 수준이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는 건 아니지? 그런가? 내가 그렇게 상대하는 사람 수준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었던가? 스타벅스에서 아난트 같은 애들을 만나 관종 욕구를 채운 것처럼, 화려한 부자들 곁에서 호화 관광의 일부가 될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어 신난 건 아니고? 그런가? 그럴지도… 나는 확실히 관종이긴 하지. 누가 관심 있게 대단하게 봐주기를 바라는 그런 욕구가 있긴 하지. 하지만, 그게 다 일까.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내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을 일으키고 있는 사실은, 출간비용을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오래 곪고 아렸던 내 상처가 드디어 목소리를 터뜨리며 책으로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함께 쓴 책이 곧 나오고, 내 첫 소설집도 완성하는 대로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슴에 큰 물결을 일으킨다. 언젠가 티브이로 보았던 캘리포니아 바닷가의 하얀 파도를 타는 건강하게 그을린 사람들의 튼튼한 하체 같은 힘이 나를 강하게 지탱하고 있다. 남규식 같은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고도, 내 힘으로, 아니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거였다는 것. 이 당연한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그래도 더 늦지 않게 지금 알게 되고 맛보게 된 것, 이것이 나에게는 희망이고 행복이다.


언제나 혼자였던 내게, 언제 이렇게 내 사람들이 생겨난 것인가! 아난트, 유리, 김종희,… 피 한 방을 섞이지 않은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들이 내 사람들이 되었다.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아니었었다는 것을 이젠 알겠다. 혈연도 학연도 지연도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내 사람들은 나의 일부가 되고, 나의 힘이 된다. 내 사람과는 함께 힘을 뭉쳐 큰 힘을 발휘하며 싸울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뭉쳤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도 부자들을 위한 여행 안내자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는데, 그냥 일이 나를 끌고 달리는 상황에 말려들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자꾸 움츠려 들려는 마음을 달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래며 상황에 발맞추어 달려간다. 의지를 품는다. 나는 할 수 있으니까! 마음먹으면 해 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


비행기 하나를 전세 내는 클래스라니! 그림같이 고상하고 우아한 인도 귀부인들을 인솔하는 여행을 떠나는 날이 순식간에 닥쳐왔다! 인도 최고 자산가 집안 부인과, 대등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부인의 친구들, 그리고 출중한 외모와 뭔가 많은 것을 겸비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뿜어져 나오는 그들의 비서 아가씨들까지, 이 비현실적인 집단과 이 호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이 순간. 영화에나 그려질 법한 이 장면이 정말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동화 속 이상한 나라 같고, 현실과 동떨어진 말도 안 되는 꿈같다.


비행기 여행 동안 부인들을 즐겁게 해 드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기내 시설 자체가 최첨단 호화 시스템이어서, 영화, 드라마 시청부터 음악 듣기까지 취향 따라 선택의 폭의 넓었고, 친한 여자 친구들끼리 가는 여행이라,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듯 보였다. 거기다 사교왕 아난트까지 끼어있고, 부인들은 이제 막 영어 말문이 틔어 이말 저말 조잘거리는 유리를 무척 귀여워해서, 유리에게 말을 계속 시키며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도 하니, 지루할 틈은 전혀 없어 보였다. 유리도 영어를 빨리 배우는 것이, 제 삶을 세우고, 꿈을 이루어 가는데 중요하다는 판단이 서는지, 영어를 한 마디라도 더 익히려고 미국 생활 경험이 많은 부인들 옆에 꼭 붙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진지한 배움의 자세로 대화에 임하고 있다.


사람이 전에 가져본 적 없는 너무 좋은 기회를 만난 다는 사실이 수반하는 고통과 책임에 대해 나는 절실히 깨닫고 있다. 무엇보다 감정 고조 상태가 너무 오래 계속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서비스를 기획하고 큰돈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꿈같고 설레는 일이긴 한데, 그 모든 뜀박질 하는 감정에 더해, 제대로 잘 해내야 한다는 긴장감까지 습격해, 몇 날 며칠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돈 앞이라 정성을 다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내 삶에 최초로 밝은 빛을 드리우는, 어둠을 이기고 내려앉는 새벽빛 같은 기회에, 정성을 다해 공들여 돌을 쌓고 내 인생을 부탁하고 싶은 경건한 심정이 있었다.


특히 어젯밤엔 임무 수행 하루 전이라는 시간이 불러오는 압박감 때문에, 한국에서 진행될 일정을 계속 되새김질하며, 이젠 명확히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찌릿한 감정들이 밤새 불꽃 축제를 여는 바람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몸이 한계에 이른 탓인지, 아님 일등석 자리가 지나치게 안락한 탓인지, 자리에 앉자마자부터 나른하더니, 금세 눈이 감겼다. 깜박 잠들었나 싶었는데, 문득 눈을 떠 보니, 비행기는 곧 착륙할 참이다. 오래간만에 개운한 낮잠을 잤다는 느낌도 잠시, 한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잠시 떨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철썩 들러붙었다.


다시 온 한국. 애증의 실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초여름 특유의 장마를 머금은 눅눅하고 무거운 느낌의 공기가 기도를 압박해온다. 비서들이 이미 매만진 부인들의 화장과 머리 모양은 비행기 여행을 한 사람 같지 않게 완벽하게 우아하다. 어딜 가든 완벽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누구 하나 빈틈없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같은 전통 인도 복장이라도 옷감과 디자인에 따라 굉장히 다른 느낌이 든다는 것을 부인들의 복장을 보면서 깨닫는다. 부인들의 옷차림은 인도 고유의 전통이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세련되고 우아하고, 현대적이다. 아니, 그런 수식어들로는 이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랄지 에너지랄지, 이 기운을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들의 옷차림마저 무언가를 강렬하게 주장하고 자신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와 힘을 세우고 축적해 낸 사람들의 기운인 것일까. 돈이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이 일구어 낸 것들이 아무나 쉽게 일굴 수 있는 무엇이 아닌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들 곁에서 그들이 뿜어내는 모든 느낌을 관찰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나는 하나의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당당한 그 기운의 일부라도 얻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겸허히 곁에 머물 수 있는 데까지 머물 참이다.


약속한 게이트 앞에 이미 김종희와 친구가 영화에 나올 법한 검고 긴 리무진 두 대와 기사들을 섭외해서 마중 나와 있다. 그 사이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재킷을 친구와 둘이 맞춰 입은 김종희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동시에 느껴지는 듬직함. 신뢰. 그녀가 슬며시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이는 ‘브이’.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내 사람이 함께할 때 드는 느낌이다.


부인들이 리무진에 오른 후, 김종희는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내 들어 보인다. <수배자들>라고 제목이 붙은 검은 책을 보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 안에 부푼 멍울 같은 것이 치민다. 드디어 완성된 우리의 책이다. 저자 이름이 따로 없는 우리 모두의 책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들고, 가슴에 꼭 끌어 안은채 부인들이 김종희가 준비한 한국 음료와 간식을 맛보며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에 올라탄다.



투고할 때 쓸, 소설 제목을 고민 중입니다. '뭄바이의 관종 여우' 는 처음에 쓰기 시작하면서 그냥 붙인 제목인데, '뭄바이의 북극여우'로 할지. 아니면 다른 제목을 생각해야 할지... 이 소설을 읽어 오신 구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의견이든 남겨주세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피 킨셀라 신간 소설 <Love Your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