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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Mar 26. 2022

봄날의 금요일 그리고 기다림

엄마를 모시고 8주에 한 번 병원에 갑니다

황반변성을 앓고 있는 엄마를 모시고 안과에 왔다. 8주에 한 번씩 맞는 안구 주사를 맞는 날이기 때문이다. 봄방학이 끝난 직후의 금요일 병원은 몹시 만원. 한 타임에 환자를 서넛씩 중복 예약한 것이 틀림없다. 눈이 힘든 사람들은 많은데, 이 지역에 닥터 톰슨 같은 홍채 전문가는 그 수가 너무 희박한 탓이다. 대부분 7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다. 홍채 전문가인 닥터 톰슨도 머리가 새하얀 백발노인이다. 그의 오래 쌓아온 경험과 실력이 시력을 잃어가는 같은 또래 노인을 돕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고통을 줄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평생을 단련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파렴치한 스캔들이 만들어내는 다른 이미지가 생겨나도 결국 내 몸에 이상이 생기는 순간 결정적으로 믿고 의지할 은인이 되고 마는 존재다.


노인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스스럼없이 앉아 있다는 것이 문득 특별한 교류, 특별한 기회의 시간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선뜻 말을 걸기는 두렵다. 턱 근육이 느슨해지고 치아가 빠져버린 노인들의 힘없는 말소리가 마스크를 통과하면서 더욱 알아듣기가 힘든 웅얼거림이 되면, 나도 힘들고 그들도 힘들어질 거라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라는 핑계로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말을 걸지 않는다. 대신 나는 조심스러운 관찰을 한다.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니 뚫어지게 눈으로 응시할 수는 없고, 살짝 눈길을 아래로 향한 채 다만 마음에 온 힘을 모아 주변을 느껴 본다. 노인들은 대부분 조용히 고요히 무척 편안해 보인다. 설렘이나 호기심의 에너지가 적은 만큼, 긴장감이나 불안의 파장도 훨씬 약하게 느껴진다. 삶의 막받이에 다다라 애쓸 것도 아등바등할 것도 없는, 흘러가는 물살에 온 몸을 맡긴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그들에게 있다.


여기서는 내가 가장 젊고 가장 건강한 존재가 되는구나 생각이 밀려들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자신만만해지거나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삶의 경험으로 나 또한 빛의 속도로 그들의 시간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엔, 빛의 속성이 조금도 스며들지 못한다. 머리가 멍해지고 몸이 뒤틀릴 만큼 몹시도 지지부진한 기다림. 사람들이 많은 만큼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휠체어와 보조 기구에 의지해 몸을 지탱하는 약한 노인들의 체력이 지쳐가는 것이 보인다. 겨우 몸을 지탱하고 정신줄을 붙잡고 던 허리와 고개는 점점 내려가고 어두워진 표정엔 망연자실이 스며들고 있다. 간간이 간호사들이 환자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속도는 ‘가뭄에 콩 나듯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느리고,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것인지, 새로운 환자는 계속 끝없이 밀려 들어온다. 


기다림이 힘든 나의 조급한 마음은 머릿속에 판타지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비극적 서사를 시작한다. 어느새 나는 어떤 괴물이 인간을 한 명 한 명 끌고 가 죽이는 현장에 줄 서 기다리고 있다. 왜 이렇게 늦게 진행되나 지루와 짜증이 차오르던 가슴이 세차게 뛰고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한 사람씩 불려 가고 그 사람이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면,... 간간이 무언가에 목구멍이 틀어막힌 듯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이곳은,... 한 사람씩 불려 가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는 죽음의 심판 대기소!


제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 달라고, 꼭 불러야겠으면 최대한 천천히 불러달라고 소원하며,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에게 연락을 시작한다. 사랑해. 항상 고마웠어. 내 인생에 네가 있어서 너무 좋았어. 함께 걷는 성장하는 길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씩씩하게 잘 살아가기를 멀리서도 응원하고 지지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건 상관없이, 쉼 없이 한 사람씩 불려 가고 한 사람씩 사라져 간다. 가슴이 떨리고 조마조마한 그 순간, 마침내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 


미시즈 홍! 


엄마의 이름이다. 벌떡 일어나, 대답한다. 


네, 우리 여기 있어요!


우리를 부르는 얼굴은 괴물도 악마도 아닌, 몹시도 아름다운 미카엘 천사! 우리를 구원하러 금발 장발을 휘날리며 파란 눈을 상냥하게 빛내며 천사가 다가온다. 올해 갓 인턴쉽을 시작했다는, 아직 솜털을 채 다 벗지 못한 순수한 얼굴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끈다. 그를 따라 좁은 골목길이 이끄는 방으로 들어가니, 백발의 닥터 톰슨이 온화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준다. 믿음직한 두툼한 손에 들린 구원의 주사기가 우리를 향하는 순간, 철사로 고정시킨 엄마는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했고, 나는 눈을 꼭 감아야 했다. 3년 째인데도 엄마의 안구에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것을 나는 볼 수가 없다. 모녀의 눈가에 서로 다른 이유로 눈물 방울이 돋아난다. 그다음엔 이제 다 끝났다는 공통의 안도감. 다음 약속까지 눈앞에 펼쳐진 8주의 여유에 대한 기대감. 엄마가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8주마다 반복되는 엄마와 둘 만의 병원 여행은,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같은 반복이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권하는 늘 새로운 배움과 성장으로 행복을 찾는 길이면서, 다시 또 나의 신의 손길을 느끼는 따뜻한 감동이 가득한 구원의 순간이다. '언제까지 이 주사를 맞으라고...' 라는 생각으로 엄마는 몹시 불안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셨다. 나에게도 엄마 눈에 주삿바늘이 꽂히는 것을 보는 일이 즐겁고 신나는 일일 수는 없다. 하지만, 피할 수 없기에 엄마와 나는 파도를 맞는 대신 파도를 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8주마다 반복되는 오늘을 즐거운 둘 만의 나들이로 만들기로 했고, 언제나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끝없이 되돌아 가는 영원회귀 여행 속에서, 살아 함께 하는 모든 순간에 감사하며 오늘도 인생의 파도타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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