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르테논의 뮤즈 (2)

[소설] 도도한 도둑년

by 하트온

"파르테논은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이 전쟁의 여신 아테네에게 지어 바친 신전이에요."


클라리넷 부는 작가 김소은의 설명이었다.


"몰랐어요. 저는 그냥 도시 이름이겠거니 했는데. 그리스 여행도 다녀왔는데! 그러고 보니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세라 씨 그리스 가봤구나! 나도 아빠하고 여러 번 같었는데, 그럼 뭐해. 아빠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서 설명을 다 놓쳤는데..."


파르테논의 정확한 의미는 기억하지 못했어도, 그리스에 간 적이 있다는 것만은 꼭 밝혀두고 싶은 오정순이 먼저 입을 떼자,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자주 다니는 문화 지식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놓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윤정아도 재치를 발휘에 밉지 않게 집안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버지가 정치인 윤무열이라는 걸 밝힐 수는 없어도, 자신이 꽤 좋은 집안 자녀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는 주저하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면 조상의 역사까지 다 튀어나와 매국노 집안이니 마녀사냥을 당하지만, 그것들을 다 묻어 놓고, 익명의 아버지의 학식과 어린 시절 경험 정도 늘어놓는 것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 뿐이었으므로 그녀는 그런 식의 이미지 메이킹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테나 여신이 전쟁의 여신이기만 한 건 아니에요. 지혜의 여신이기도 하고, 직물, 요리, 도기나 문명의 여신이기도 해요. 아테네 수호신을 정하는 신들의 경합이 있었고, 거기에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참가를 했었는데, 포세이돈은 샘물이 솟게 하여 물을 주겠다 했고, 아테나는 올리브가 나는 기적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테네 시민들이 아테네의 올리브를 선택했다고 전해지죠. 그녀가 선물해줬다는 올리브 나무가 에릭테이온 신전 근처에 있어요..."


여자들의 모임에서 한 여자가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식을 이렇게 줄줄 읊으면 대개는 또 배운 체를 하는구나 꼴 사납고 얄미운 마음이 드는 법인데. 이상하게 이 여자 클로이 킴 만은 도저히 그런 느낌을 억지로 짜내려 해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냥 그곳에서 살았던 여신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더 많이 아는 것을 줄여서 말하는 듯한 겸손과 배려마저 느껴져, 결국은 더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더 들려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할 뿐이었다.


"클로이, 정확하고 자세한 정말 고마워요. 제가 여기 파르테논 신전 가운데 있는 아테나 여신 상 사진을 준비했어요. 함께 봐요."


김소은이 미리 와서 준비해 두었던 모양인지, 클럽하우스 회의실에 비치된, 프로젝트 스위치를 켜자 바로 거대한 여신의 사진이 떴다.


"상아와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하고요. 높이가 12 미터..."

"저 여신상 기억나요!"

"세라, 잠시만요, 여신상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는 제 설명이 끝난 후로 좀 미루어도 될까요."

"날씨 좋을 때 아침햇살 들 때 보면 진짜 예뻐요! 아빠가 이 여신상만큼은 아침 해 뜰 때 봐야 한다고 해서, 아침에 정말 투덜투덜 대며 억지로 가서 봤는데, 정말 '찬란하다'라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그 순간 깨달았어요. 아침에 전날 여행으로 피곤한 몸 일으켜, 비탈길 숨차게 올라온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제가 중학생밖에 안된 나이었는 데도 말이죠."


김소은은 오정순이 끼어드는 것에 짜증이 솟구쳤다. 가볍게 제지하고 설명을 이어가려 했지만, 윤정아까지 눈치 없이 나서는 것을 보고, 흐름이 깨진 설명에 아무도 집중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차피 윤정아의 경험담 속에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가 다 들어 있기도 했다.


"아테나 여신이 우리 파르테논도 지켜주고 있겠죠?"


오정순은 가끔 30대 중반 여자 입에서 나오기 힘든 이런 순박하고 뜬금없는 소리를 종종 했다.


"그럼요. 세라 씨의 맑고 고운 마음, 그 정성스러운 믿음이 아테나 여신에게 가 닿았을 것 같아요."


윤정아와 김소은은 사실 오정순을 속으로 비웃곤 했다. 하지만 클로이 킴 만은 이런 오정순의 말을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환영한다는 느낌이 들어, 두 사람은 오정순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급이 맞지 않는 여자인 것 같아 생각이 들었다가도, 클로이 킴의 말을 들으면, 아니야 정말 순수한 눈을 가진 맑은 영혼인 것 같아. 사실은 우리도 저런 겸손한 태도로 삶을 대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 사람은 아무런 불만 없이 거의 매일 만났으며, 이 파르테논에서 일어나는 어떤 모임 어떤 행사도 본인들의 손을 거쳐가도록 함께 단합해서 노력 봉사하는, 신전의 가장 중심축을 이루는 네 기둥이 된 것이다.


"우리 별명이 '파르테논의 뮤즈들' 이잖아요. 저는 사실 느낌이 안 왔었어요. 음악 하시는 지나 언니와 소은 언니만 뮤즈가 아닌가 생각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파르테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나니까. 나도 진짜 뮤즈가 되고 싶어 졌어요. 뮤즈는 꼭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거예요?"


회의실 문을 나서며, 파르테논 신전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클럽 하우스 로비에서 정순이 구슬 같은 목소리를 또르르 울리며 뜬금포 주제를 꺼내자, 윤정아는 자신도 모르게 얘 뭐야 하는 눈빛을 김소은에게 보냈다.


"신화 속에서 뮤즈는 제우스의 아홉 딸들을 의미하고요, 요즘은 예술적 영감을 주는 대상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에게 별명 지어주신 분은, 우리가 함께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의미 셨을 것 같아요. 근데 실제 신화 속 뮤즈들이 관장하는 영역들도 음악만이 아니에요. 요즘으로 치면, 문학, 연극, 천문학, 역사, 춤,...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다 포함해요. 그러니 어떤 의미로 해도 세라 씨는 진자 뮤즈죠! 저는 세라 씨에게 많은 영감을 받고 있거든요!"


클로이 킴이 아니었다면 부자 동네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과 불화 차별과 은근한 모욕으로 점철되었을 여자들의 모임이, 지적이고 아름답고 충만한 모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정순을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 때때로 거슬리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모임 안의 못난 사람들까지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는 존재도 필요한 법이었다. 혹시 내가 실수를 하거나 추락하는 순간에도 비웃지 않고 감싸줄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윤정아와 김소은은 자신들이 추락하는 순간 따위는 있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여기까지 삶을 쌓아 올리고 이미지를 만들어 온 게 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오정순 같은 졸부 냄새나는 레벨의 여자와 같아질 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오정순은, 자신을 감싸는 듯 말해주는 클로이 킴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이 더 크고 잘났다고 믿을 때 포용하는 법이다. 동등한 입장이거나 못하다고 느끼면 위협과 결핍을 먼저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클로이 킴이 나설 때마다 오정순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편들기에 휩싸이다 다른 사람들과 멀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나 언니나 소은 언니처럼, 분명하게 눈치 줄 땐 눈치 주고, 나이도 정확히 따져 언니 동생을 나누고, 확실히 체계를 잡는 것이 더 동등하게 대해주는 것 같고 마음 편했다. 이런 사람들의 기준은 결국 처음엔 좀 까다로워도 맞추어 내면 그뿐이었다. 정순은 상대에게 맞출 줄 아는 것이 자신의 무기이자 재능이라 믿고 있었다.


클로이 킴이 나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고 모두에게 누구누구 씨 존칭으로 일관하고, 자신의 배경 및 모든 것에 대해 항상 두리뭉실 철학적인 말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모두를 존중한다는 듯,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에 자세한 인적사항들은 알 필요 없다는 듯,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무식한 당신들을 배려해서 조금만 들려주겠다는 듯한 그 모든 자상하고 존중하는 느낌이, 순간적으로는 뭔가 대단히 외국 느낌이고 멋있다는 환심이 드는데, 지나고 곱씹을수록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혼돈스럽고 불확실한 느낌이 설익은 감처럼 혀에 찝찝하고 떫은맛을 남겼다.


클로이 킴은 파르테논에서 만난 여자들이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불안정한 자리에 서 있는 듯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들이 그녀에겐 가장 매력적이었고, 그녀가 추구하는 예술에 가장 강렬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녀들의 경직된 표정들. 자꾸 증명해야 하는 압박 속에 기회를 노리는 눈치들. 너무 달콤하고 짜릿해서 클로이 킴은 당 분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극한의 쓰고 드라이한 와인을 마시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혼자 너무 무료한 그녀에겐 최고의 자극이었다.


"아, 이 맛이야."


클로이 킴은 디오니소스의 극장 최고 쾌적한 자리에 자리 잡고, 파르테논 신전으로 올라가는 여자들의 비극 관람을 기대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단전 깊숙이서부터 짜릿한 쾌감의 전율이 해일이 일듯 격하게 넘실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고요한 방 적막을 깨고 일어나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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