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관찰의 의무 (2)

[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by 하트온

어느새 기말고사가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화실은 도서관 분위기가 되었고, 선생님들은 자연스럽게 자율학습 감독 선생님이 되어 주셨다. 많이 친해지고 편해진 선생님들이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위기를 천지차이로 다르게 했다.


최강이 마음을 다시 먹은 것 같았다. 처음으로 같은 테이블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우가 옆에서 최강에게 자꾸 뭘 물어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여 자꾸 그쪽으로 쳐다보다가 최철광 선생님과 눈을 마주쳐 버렸다. 선생님이 그냥 내버려 두라는 눈짓을 했다.


"동우 공부 가르쳐 주는 게 강이 공부 복습도 되는 거야. 같이 공부하게 놔둬."


모든 걸 다 눈치챈 최철광 선생님이 내 곁을 지나가실 때, 슬쩍 말씀하셨다.


동우가 일어나 내게로 왔다. 그리고 내 가방 안에 무언가를 넣었다. 최강이 동우를 통해 보낸 답장 편지라는 직감이 왔다. 나는 일어나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나오면서 눈이 마주친 김영애 선생님께 어설픈 변명을 댔다.


"한 시간 안에 돌아와. 늦게 오면 점심밥 없다."


문득 김영애 선생님이 우리만 보면 밥밥 하는 엄마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실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대신 살금살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옥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 앉아 가방을 열고 동우가 넣어 놓은 내용물을 확인했다. 역시 편지였다.


최강

네 편지를 받고 나는 너의 말뜻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어. 네가 나를 관찰하고 응원하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에게 뭘 바라는지... 나 같은 놈에게 네가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옳은 일이 맞는지... 한때는 나도 너를 동경하고 응원하고 좋아했던 것 같아. 누나와 한 마음이었으니까.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이 거대한 벽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어. 이건 내가 친 벽인 것 같아. 내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것. 아니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된 것. 나는 누나가 간 뒤로, 나의 중요한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에, 마치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죽어가고 있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어. 이런 내가 네 응원을 받을만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이 세상은 못된 괴물 같아. 내가 어디에 있어도 어느새 몰래 등 뒤를 후려치며 나타나는 악마. 어쩌면 내가 벌을 받고 있는 악마인지도 모르고. 나는 세상도 사람도 미워하고 있거든. 나의 이 더럽고 거친 내면을 누구에게든 보여주는 게 정말 싫지만. 너는 제대로 나를 봐야 할 것 같아서. 네가 관심을 둘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최강의 편지를 읽으면서 또 눈물이 났다. 눈물만 나는 게 아니라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파묻고 엎드려 있었다.


"바람 쐬러 나간다더니 겨우 여기 앉아 있어?"


최철광 선생님이 담배를 입에 물며 올라오시다가 나를 보고 다시 담배를 빼서 주머니에 숨기셨다. 나는 일어서 인사를 하려 했지만, 내 일그러진 감정이 말을 듣지 않아 나는 서서 고개를 숙인 채로, 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선생님이 읽어 봐도 돼?"


최철광 선생님이 내 손 끝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편지를 천천히 잡아 가져 가셨다.


"누구 글씨체인지 알겠다."


선생님은 몇 분을 말없이 편지를 읽으셨다. 그리곤 차분하게 말을 꺼내셨다.


"너 어린 왕자가 사랑했던 장미 이야기 기억하니?"

"네."
"어린 왕자는 장미에게 실망했었지. 잘해줘도 계속 투정만 부리고, 허영 덩어리처럼 거짓말하고 말이지. 어린 왕자는 장미가 믿을 수 없는 존재라 절망하고 떠나갔었지. 그렇지만 한참 지나고 깨닫게 되지. 정말 중요한 걸 보지 못했던 것을. 장미가 그에게 준 기쁨, 그 향기, 정말 소중했던 것들을 깨닫지도, 거기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마음을 휘둘리고 실망했었다는 걸... 그리고 함께 했던 그 시간의 가치를 깨닫게 되지. 기억나?"

"네."

"지금 최강이 하는 말들은 장미의 투정 같은 거야. 아직 자신을 몰라서. 자신이 없어서, 다 자라지 못한 미성숙함이 내뱉는 말들... 그런 것에 너에게 소중한 것들, 너의 소중한 마음, 사람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말은 어려웠다. 함께 읽었던 어린 왕자와 장미와 여우의 이야기들이 기억났지만, 그것이 지금 최강과 나의 상황과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장미는 끝없이 관심을 바라고 돌봐달라고 요구하는 반면, 최강은 나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만 같은데... 어린 왕자는 장미가 싫어서 떠난 반면, 나는 이렇게 여기서 마음을 거절하는 편지를 받고 울고 있는데.. 뭐가 같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오늘은 집에 일찍 갈래? 동우는 선생님이 나중에 데려다줄게."


내가 자꾸 눈물을 쏟으니 선생님도 마음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화실에 들어가서 제대로 가방을 챙기고, 동우에겐 공부 다하고 나중에 선생님 차 타고 집에 오라고 말한 후, 화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입구를 빠져나가려는데, 뒤에 따라온 최강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최강!"


나는 많이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그 애를 힘없이 쳐다보았다.


"내 편지가 너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 줄 몰랐어."

"담 주에 보자."


나는 모기만 한 소리로 겨우 대답하고, 천천히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응할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뒤에서 내 가방을 낚아챈 최강이 곁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데려다줄게. 너 좀 위험해 보여."


괜찮아 라는 말이 목구멍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그냥 함께 집으로 가는 51번 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그래서 아무에게도 내 이야기를 안 해."


사람 없는 넓은 버스에,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최강이 몸을 옆으로 돌리고 긴 다리를 앞으로 뻗은 채 말을 시작했다.


"내가 말을 하면, 다들 나의 어둡고 분노 미움 가득한 내면을 감당 못하는 것 같거든."

"그래도 누군가한테 말을 하면 좀 시원해지지 않나?"

최강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그의 두 눈은 햇살이 잔뜩 내리쬐는 잔잔한 바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걸 왜 네가 해야 하는데. 네 책임이 아닌데"

"과연 내 책임이 없을까. 나도 너와 지원 언니를 마음 아프게 했잖아. 나와 달라고 했는데, 약속을 안 지켰잖아."

"아니야. 그게 사실은 내가 억지를 부린 거야. 그때 누나의 상태가 몹시 위독해졌을 때, 네 모습 보면 힘을 내지 않을까 싶어서. 누나는 너를 찾지 않았어. 이미 마음에 있어서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누나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내가 계속 아픈 누나를 억지로 밖에 데리고 나가 너를 찾아다녔어. 네 모습 보고 힘 내줬으면 해서... 근데, 누나의 상태가 오래 버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어. 누나는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어. 나는 누나가 떠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화가 나서 인정할 수가 없었어...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누나가 그렇게 불완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서 잠시도 편히 당당하게 걷지도 못하고 그 어린 나이에 떠나야 했는지..."


결국 최강은 앞으로 돌아 앉았다. 어깨를 들썩거리는 최강의 뒷모습이 아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하늘색 셔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 토닥거리는 움직임은 결국 내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던 건지도 모른다.


다행히 최강의 뒷모습이 점점 편해지는 듯하더니, 다시 몸을 돌리고 말했다.


"편지에도 썼지만 아직 사람을 못 믿어.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헤어지게 되는 일이 나는 너무 무서워."

"나도 니 입장이라면 무서울 것 같다. 나는 그냥 나를 위해서 니를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그 애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좀 숨 막히는 사람들이거든. 특히 아빠가. 애들 성적 떨어지면, 어른들이 더 괴로워하는 그런 집안. 동우하고 나는 집에 가면 긴장하고 벌벌 떨면서 방에서 공부하거든. 그런데 네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이 좀 편해지고 위로가 된다. 그래서 니 생각을 하는 기다."

"내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위로가 된다고? 난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은 안 되는 일이다. 그냥 니를 떠올리면, 그 생각 자체가 내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마음이 두둥실 날아가는 가벼운 느낌... 설명은 기대하지 마라."

"무슨 연예인 좋아하는 느낌인데?"

"그럴 수도 있겠데. 네가 나의 연예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희극이든 비극이든 어떤 장르에 나와도 상관없이 좋은."


이런 말들은 내가 계획했던 말들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내 입에서 술술 나와 나도 놀라고 있었다.


"내 마음이 어둡든 말든, 화를 내든 욕을 하든... 너에겐 상관이 없다는 거네... 연예인이니까."

"글치, 그러니까 어떤 장르의 음반을 내도 무조건 응원하고 지지하는 거지. 헤비메탈을 해도, 힙합을 해도."

"근데, 그거 너한텐 너무 시간 낭비 아니냐? 그런 응원과 지지를 돌려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계속 비극 장르만 해서 너를 자꾸 울게 만들 수도 있잖아."

"그럴 것 같지 않다는 믿음이 내한테 있다. 전에 이 연예인이 하는 다른 장르를 본 적도 있고. 이 연예인이 그린 멋진 그림을 본 적도 있고. 이 연예인이 내를 응원하고 지지해 준 적도 있다. 이 친구가 다양하게 보여줄 것 같다 내 느낌에는."


내가 이렇게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 앞에서 말을 잘할 수 있는 애였나 스스로 몹시 기가 차고 놀라며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을 듣는 최강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언제 절망과 비탄에 빠져있었나 싶게 내 마음에도 웃음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밌겠다. 그래 해 보자, 연예인하고 팬."

"내가 팬레터 열심히 보내주게"

"원래는 네가 팬레터 많이 받던 애잖아. 내가 보내던 사람이고. 네 책상에 초콜릿 하고 꽃, 편지 가득한 거 내가 많이 봤잖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줄 수도 있는 기다. 니도 이제 팬레터에 함 깔리가 숨막히 바라."


나는 왜 최강 앞에서 이렇게 과감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늘 긴장 타고 조심스러운 내가 몹시 장난기 있고 뻔뻔하고 능청맞은 애로 변하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내가 그럴수록 최강이 재밌어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너 알면 알수록 상당히 웃기는 애네."


결국 최강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내 안에 고인 슬픔을 깨끗이 말려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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