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소설 파이팅!
고3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곗바늘이 고장 나 멈추어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 와서 건전지를 갈아 넣거나, 부품을 갈아 고쳐내기 전까지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그 자리에서 죽어있다. 그렇게 시험지와 정리 노트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잠자코 죽어 있어야 하는 것이 고3에게 기대되는 시간인 것만 같았다.
이 시간은 마치 모두 잠든 밤 고요한 공동묘지를 헤매고 다니는 느낌 같기도 했다. 춥고 음산한 시간. 연락 오는 친구들, 말을 걸어오는 친구들에게 공부에 집중하고 나중에 만나자고 말은 했지만, 나는 사실 너무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교 길에 최강에게 늘 같은 시간 전화를 할 때, 그때에만 나는 무덤을 빠져나와 사람 사는 세계로 내려온 듯한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하지만 최강이 고3으로서 집중해야 할 시간에 집중하고 잘 해내기를 바랐으므로, 그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늘 공부에 관련된 말만 하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공부하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어, ' '너는 공부 잘하고 있어?' '대학은 정했어?'... 같은 질문들을 했지만, 최강은 자신이 무슨 어린 왕자 이기라도 한 것처럼 내 질문엔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요즘 자주 듣는다는 음악 같은 것을 들려주곤 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음악들은 슬픔과 그리움 소중함 같은 감정들이 버무려진 느낌이었다. 그가 내가 모르는 그런 음악들을 좋아한다는 것에 이상한 소외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부모님을 따라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런 음악이 그를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했다.
최강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가 그림을 그릴 것인지 전혀 다른 길로 갈 것인지 스스로도 아직 정해진 게 없는 느낌이라는 것만 확실해 보였다. 나는 아마 장학금을 주는 어느 평범한 대학으로 가게 되겠지. 그리고 평범한 직장을 선택하게 되겠지. 어차피 평범한 선택밖에 할 수 없다면, 나는 최대한 돈이라도 많이 주는 탄탄한 직장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족이 집을 마련할 수 있게 어느 정도의 돈을 만들어 준 후에, 나를 위해 독립을 하고 싶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강이 어디로 가건 따라다니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것이 유일하게 희망이 되는 생각이었다. 그가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뭐가 있을까.
다시 생각해도 나는 공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학 기술이 있으면 언어에 상관없이 어디서건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공계 언어는 세계 공통이어서, 다른 나라 말을 잘 못해도, 소통이 된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했었다. 그러면 최강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게 되건, 나는 그곳에 가까이 가서 어떤 일이건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여자들이 선택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래야 지금까지 여성들이 살아온 길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되는 일에,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상식이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나는 공대 갈 끼다."
확신을 담아 최강에게 말을 했다. 최강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만나자 우리.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왜 들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바닥으로 까무러치며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단어였다.
"왜 마지막인데?"
"나 서울에 가."
"서울에? 왜?"
최강은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만 했다. 나는 그동안의 수면부족 후유증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 딛고 선 바닥이 훅 내려앉는 현기증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겨우 공중전화 부스에 매달리다시피 의지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최강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만나."
최강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내가......"
눈물이 터져 나와 말을 이을 수 없어, 끅끅 전화통을 부여잡고 울음을 삼켰다.
"갈게. 어디야?"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같았다. 한 동네 사는 최강이 숨을 몰아 쉬며 뛰어 왔다.
"야, 너 진짜......."
목소리는 매일 들었지만,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어서 나는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반가운 마음이 젖은 종이 위에 수채 물감이 떨어진 것처럼 번져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이네. 반갑다."
내가 눈물이 범벅되어 퉁퉁 부은 얼굴로 피식 웃으며 인사하자, 그제야 잔뜩 걱정스러워 보이던 최강의 미간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우린 동네 놀이터까지 걸어 가 벤치를 찾아 앉았다.
"울긴 왜 울어? 나 오해한다. 네가 날 그 정도로 좋아한다는 걸로."
"네가 심한 말을 했잖아."
"내가 뭘?"
"마지막이라는 말......"
"서울 가기 전에 마지막이라는 뜻이었지. 서울 가면 얼굴 보기가 정말 힘들어 지니까 가기 전에 한 번 보자고."
"그렇게 말을 똑바로 했어야지."
"결국 내 잘못이구나.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지도 몰라. 만날까 물어볼 때마다 공부하라고만 하고. 넌 공부에만 온 신경이 가 있는 것 같아서, 공부가 참 잘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어떻게 되어도, 어디로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나 좀 심술이 나 있었던 것 같아."
"니 많이 보고 싶었지만, 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만, 할 이야기가 정말 많지만,... 너도 고3이고 네 시간 뺏는 게 미안하고 그래서... 꾹 참고 억지로 공부 얘기만 한 기다."
최강이 갑자기 허탈하다는 듯한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와 웃노? 조용히 해라. 한밤중이다."
"우리 지금까지 뭐한 거냐? 나는 너 공부에 집중하라고, 너는 나 공부에 집중하라고, 그렇게 조심조심 슬슬 피해 준 게 다 서로를 섭섭하게 만드는 거였네. 난 너 공부에 집중하게, 서울에 가 있으려고 서울에 있는 내 사촌에게 일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그랬단 말이야. 공부 열심히 하는 네 옆에서 뭐 하는 짓인가 공부도 안 하면서 부산에 남아 빈둥거리고 있는 나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고... 근데 시골에 내려가기는 또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서울에 가서 일이나 배우려고 했지."
"네 장래를 위해서 네가 네 길을 정하는 데 내가 방해가 되긴 정말 싫거든."
"강아,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애 같아.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다면 함께 갈 길을 찾아야지, 그렇게 피해 주고 쏙 빠져버리는 태도를 하면, 상대방은 함께 하기 싫다는 뜻으로 생각하게 돼."
"맞나?"
"맞나? 난 부산에 오래 살아도, 그 '맞나'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젤 웃겨."
"맞나?"
"그래 맞다."
정말 오랜만에 우린 함께 킬킬 거리며 웃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머든지."
웃다가 정적이 다시 찾아왔을 때 최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왜 공대 가고 싶어?"
"내 상황에서 그게 최선인 거 같아서."
나는 그동안 우리 집에 일어난 일들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최강은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놀라는 것 같았다. 쌤들이 최강에게 내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은 것 같았다. 직접 들으라고 배려해 주고 말을 아껴주신 쌤들에 대한 신뢰가 순간 더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해. 난 아무것도 모르고, 솔직히 네가 공대 갈 거라는 말이, 남자들이 많은 곳으로 가겠다는 말이 이상하게 굉장히 섭섭하게 들렸어. 네 삶이 더 이상 나와 상관이 없게 될 거라는 말처럼......"
"니 때문에 공대 가겠다고 확정한 기다."
"뭐? 네가 공대 가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나는 우리 집 마련만 되면, 그 이후엔 네가 뭘 하든 네 근처에 따라가서 살고 싶다. 그게 한국이든 외국이든. 기술자가 되면 말이 안 통하는 데 가서도 취직이 잘 된다 케서. 혹시 모르잖아 니가 프랑스나 미국에 그림 그리러 가게 될지. 그때 니가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본 적이 있기도 하고. 왠지 니는 언젠가 외국에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어서......"
걱정의 빛이 가득하던 최강의 얼굴에 햇살 같은 웃음이 번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감싸 안았다.
"너 정말 나 좋아하는구나. 내가 했던 말들까지 다 기억해 주고, 내가 어딜 가든 따라와 주겠다니... 이거 정말 감동인데. 나도 제대로 성공하고 돈 열심히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막 드는데!"
"그래, 니도 꼭 성공해라! 니는 내 연예인이잖아. 니는 내한테 힘을 주는 존재다. 니가 나를 젤 기분 좋게 행복하게 해 준다. 나는 앞으로 니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서울에 가지 마라. 서울에는 갈라믄 같이 가자."
최강의 눈에 순간 웃음기가 가셨다. 그리고 그대로 다가와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몇 초쯤 그렇게 있었을까.
"거, 학생들 머하노."
경비복을 입은 아저씨가 이쪽으로 손전등을 비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오는 길이라, 교복을 입고 있으니 학생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학생들, 다 큰 학생들한테 길게 말하몬 내 입만 아프겠제. 간단히 결론만 말할게. 학생들 집에 가라 인자. 부모님 걱정하신다. 연애는 졸업하고들 실컷 해라. 그때는 아저씨가 방해 안 놓으께."
다행히 아저씨는 소리 지르거나 유머감각이 좀 있는 차분하고 온화한 분인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일어나 집으로 달렸다. 무안한 마음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경비 아저씨도, 최강도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였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최강이 저 멀리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웃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짧게 흔들어 주곤 집으로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