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너만의 방이 생기면

[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by 하트온

숨어 도망 다니던 아빠가 돌아온 건, 여름의 감촉이 서서히 느껴지고 녹음이 제대로 짙어진다 싶은 어느 날이었다. 더 많아진 흰머리와 길게 자라난 수염. 아빠의 행색에서 패잔병이라는 단어가 느껴졌다. 늘 칼날같이 단정하고 깔끔한 아빠의 모습에 익숙한 나와 동우는 어른의 외모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어색해했다.


아빠는 엄마가 구세주 이기라도 한 것처럼 바라보았다. 아빠가 두려워 떨며 숨어 있는 동안, 이래저래 처리하고 정리하고 추스르고, 온 가족 살 도리를 마련하고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 엄마는 우리가 봐도 놀라울 정도의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런 엄마 앞에서 아빠의 태도는 마치 거두어 달라고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적군 포로 같았다.


당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 만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내 곁에 있어 주는 진짜 내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는 소리를 새 왕권에 충성하겠다는 맹세처럼 거듭 반복했다.


나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보기 싫었다. 화가 치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못됐게 군림하다가 궁지에 몰리니 제 한 몸 건사하자고 바로 몸을 바짝 낮추는 수작 같았고, 그런 수작에 엄마가 넘어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평소와 다르게 흘러가는 이 기류가 언제 하루아침에 또 뒤집힐지 몰라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 엄마가 필요하다는 마음과, 엄마가 이혼하고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두 개의 마음이 내 안에서 격렬하게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돈 많고 잘 나갈 때 엄마를 어떻게 대했었는지, 어떻게 배신하고 농락했었는지를 엄마는 잊지 말고 되갚아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돌아온 탕자를 품은 아버지처럼 아빠를 품었다. 품은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새벽같이 일어나 상다리 부러지게 아침 상을 해 바치고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지치고 허기진 몸으로 정성스런 저녁상을 대령하고 섬겼다.


엄마에게 고분 하고 협조적인 태도도 한철 피었다 지는 개나리처럼 아주 잠깐이었다. 점점 아빠는 다시 군림할 길을 찾았다. 다시 아빠를 왕으로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은 술이었다.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왕년의 잘 나갔던 시절이 성냥팔이 소녀의 불빛처럼 잠시라도 되살아나는 모양인지, 매일 술에 절어 인사불성으로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집안이 떠나가라 호통을 치고, 엉엉 울기도 하고,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재기는 불가능하다고 믿어 버린 사람 같았다. 엄마에게 한 푼이라도 더 용돈을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구는 못된 아들처럼 굴기도 했다. 점점 사람이 진상이 되어 갔다.


나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못된 딸인 것일까. 나는 아빠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보기 싫었다. 고3이라 새벽같이 집을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만 집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엄마와 동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 오면 집에서 꾹 참고 가져온 울분이 터져 나왔다. 화목한 집에서 안정적인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굳이 이런 답 없고 끝없는 불화의 나날들을 공유할 이유도 힘도 배짱도 없어, 나는 혼자 어느 구석에 숨어 눈물을 토하곤 했다.


오직 최강이 나의 숨통을 터 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언제나 나에게 열어주는 그의 마음과 시간 덕분에, 그를 생각할 때의 즐거움과 설렘 때문에 분노와 죄책감, 무기력과 슬픔이라는 수렁에 완전히 매장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절망과 기쁨이 공존하며 이리저리 서로 자리를 바꾸어 내 마음을 차지했다. 최강을 생각하면 기쁨이 앞으로 오고, 집안 꼴을 생각하면 절망이 대번에 박차고 나와 앞자리를 차지하는 식이었다. 힘든 감정을 밀어내고 조금이라도 부드럽고 가벼운 마음에 거하고 싶은 나는, 한밤중 하교하는 길에 꼬박꼬박 최강에게 전화를 걸어 밝은 힘을 얻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는 어느새 나의 연예인을 넘어서 종교가 되어 있었다. 그 어느 누구보다 나를 잘 알는 사람,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번은 하굣길에 최강이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 통화를 할 때, 토요일은 주로 무엇을 하냐고 시간까지 자세히 물었었다. 오후에 자율학습을 하고, 5시에 하교를 한다고 말해준 기억이 났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학교 앞 분식집 같은 데서 대충 저녁을 때우고, 학교에 좀 더 남아 공부를 하다 밤에 집에 간다고도 말해주었다.


최강의 등장은 마치 오래 공들인 기도 응답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 매일 아빠를 기다렸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매일 넘어져 무릎이 성하지 않았다. 창문으로 내내 쳐다보고 있다가, 길 끝에 아빠가 보이면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그땐 엄마와 아빠 나 그리고 아기 동우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빠는 첫 딸인 내가 신기하고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고 들었다. 나를 그렇게 사랑했고, 나도 아빠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사랑은 퇴색했고, 서로의 믿음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내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가 아닌 최강이다. 사랑하는 사람! 아! 나는 문득 깨달아 버렸다. 내가 최강을 향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렇구나! 나는 최강을 사랑하는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달려가고 싶은 것이 사랑이구나!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최강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저절로 두 손이 올라가 얼굴을 가렸다. 손을 거두면 최강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너무 그립다 보니 신기루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을 최강으로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치우고 다시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졌다. 지금 여기 최강이 없다면, 나중에 전화하면 되잖아. 나는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법을 벌써 알고 있다. 손을 내리고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최강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느낄만한 기쁨의 봇물이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나는 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가 나만 알아챌 수 있는 만큼 고갯짓을 했다. 하교하는 고3 여학생들의 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남학생 입장에서 여학교 앞에 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는 그 무모한 일을 감행했다.


최강을 힐끗힐끗 보는 여학생들 때문에, 그는 좀처럼 내 곁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우리는 몇 발짝 떨어져 평행선을 그리며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따라 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비어있는 두 자리 좌석을 찾아 앉아 최강을 기다렸다. 기대했던 대로 그가 버스에 타서 옆에 와 앉았다. 그 순간, 내 옆에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 나는 온 마음 가득 따뜻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를 같이 탄 다른 반 여학생들이 두엇 있었지만, 모두 앞에 1인석에 앉아 있어, 우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나는 최강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손을 들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미쳐가고 있나 싶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아야지. 사실, 그냥 옆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버스에서 내리고, 우린 배가 고프고, 앉아 이야기할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 가족과 마주칠지 모르는 동네를 어슬렁 거릴 수도 없었다. 정류장 근처의 가락국수와 김밥과 고로케를 파는 길가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전에 동우와 가본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는 가락국수와 김밥과 카레 고로케를 하나씩 시켜 나누어 먹었다. 최강과 단 둘이 음식점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난 자꾸 뭘 떨어뜨렸다.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물컵까지 쏟아, 다 다시 달라고 해야 해서 식당 아줌마의 눈총을 받았다.


화실에서 다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곤 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편한 친구 사이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최강에게 한눈에 반했던 것이었다. 최강은 어떤 걸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학교에서 아이들이 남자 고등학생들에 대해 떠드는 것처럼 최강도 성욕과 거친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일까. 나는 최강을 알 것 같으면서도, 때때로 하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소중하고, 그가 지금의 내 전부인 것 같은 감정이 들수록, 그를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확실한 느낌은 수시로 불안으로 밀려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믿음과 의심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리를 바꾸어 대며 나를 괴롭혔다. 내 안의 절망과 기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것들이었다. 최강이 나를 그렸다는 그림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가 내게 가진 마음이 정확히 어떤 온도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니 그림 그리나 요새도?"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적이 없어. 어릴 때부터. 아주 어릴 때도 몇 시간씩 앉아 그림을 그렸대. 엄마 말론."

"니는 그림 진짜 좋아하는갑다. 미대 갈 생각 진짜 없나?"

"없어. 내가 그리는 그림은 대학에서 좋아할 만한 그림이 아니야."

"어떤 그림을 그리는데?"

"여자."

"머? 여자? 어떤 여자?"


나를 그리냐고 대놓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어떤 여자를 그리는 거냐고 딴청을 부렸다.


"예쁜 여자. 매력적인 여자."

"연예인 그리나? 아니면 남자 고등학생들이 돌려본다는 잡지 같은데 나오는 여자?"


예쁜, 매력적인, 이 수식어들이 나에 대한 말일까 기대감을 부풀리려고 심장이 나대려는 것을, 나는 또 억지소리들을 늘어놓으며 겨우 잠재웠다.


최강은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상한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 바라. 네가 가장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누군데? 최진실? 이승연? 이미연? 아니면 외국 여자?"


나는 계속 엉뚱한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제발 그가 진실을 말해주길 바라면서. 최강은 난감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며 한 숨을 크게 쉬더니, 다음 순간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너 그려."


예쁜 여자, 매력적인 여자가 진짜 나를 말한 거였다고!


"니, 혹시 내를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는 기가?"


나를 그린다고 고백하고 무안한 마음을 물과 함께 삼키려던 최강은, 뜬금없는 나의 도발에 사레가 들려 한참을 켁켁 거렸다.


"넌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거냐!"

"남자 고등학생들은 다들 그렇다던데. 한참 성욕이 왕성할 때라서. 여자들 사진 방에 막 붙여 놓고, 침대 밑에 야한 잡지 있고...... 니는 안 그라나?"

"그런 이야기를 내 앞에서 대놓고 한다고!"


나도 내가 이런 소리를 최강에게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지난 몇 년 동안 옆에 붙어 앉아 야시시한 얘기들을 수도 없이 늘어놓았던 수민이 때문이다. 그녀가 내 머릿속에 그려놓은 남자 고등학생의 이미지가 이렇게 강렬하게 새겨져 버린 것이다. 이런 노골적이고 무례한 말들을 다 뱉어 버린 내 혀를 때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물은 엎질러졌고, 끝까지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림 내놔 바라. 내를 어떻게 그렸는지 봐야겠다. 내를 이상하게 그린 거 아이가?"

"딱 너처럼 그렸어."

"그럼 보이 도. 그림으로 증명해라."

"아직 안되는데. 나중에 선물로 줄 건데."


그가 나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갑자기 목이 따가워지는 감각에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기다려."

"진짜 내한테 선물로 줄라고 지금까지 그린 기가?"

"처음부터 너에게 주려고 그렸던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내 마음이 그러고 싶다고 하네."


심장이 또 빠르게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 나 진짜 좋아하냐고 대놓고 확인받고 싶었지만, 가락국수와 김밥과 고로케를 파는 식당에서, 식당 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며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언제 줄 건데?"

"몰라. 언젠가."

"왜 지금 안 줘?"

"지금 주면 너 집에 들고 갈 수 있어?"


생각해 보니 들고 갈 수가 없었다. 최강이 나를 그린 그림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 줄 사람이 없었다. 아빠 술 먹고 들어오는 날 가장 먼저 산산이 부서지고 찢겨나갈 품목 1순위 희생양이 될 게 뻔했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모두 들어온 최강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을 내가 자유롭게 가질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너만의 방이 생기면 줄게. 예쁜 액자에 넣어서."


나만의 방.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내 방. 갑자기 나만의 공간에 대한 갈망이 끓어올랐다. 지금은 할머니와 방을 같이 쓰고 있어서 밤에 불을 켜고 공부하기도 눈치를 봐야 하는 나는, 갑자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


"나만의 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노. 빨리 독립하고 싶다."


독립을 할 수 있을까. 집안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는데, 내가 과연 나의 독립을 꿈꾸어도 될까. 독립하고 싶은 열망이 일자마자, 가능성을 의심하는 의구심이 동시에 연속 폭격처럼 잇따라 일어나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대학을 서울로 가버리면 저절로 독립이 될 터였다. 하지만 우리 형편에 그게 가능할까.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을까. 장학금을 받는다 해도 생활비는? 알바를 금방 구할 수 있을까? 최강도 서울에 함께 갈 수 있을까? 함께 갈 수 없다면 나는 혼자 서울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너무 많은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나야 가능해질 수 있는 꿈인 것 같았다.


"독립하기 전에 니가 내 그림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

"무슨 방법?"

"니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 거지."

"우리 식구들이 내 그림 실력을 뻔히 아는데. 속아 넘어간다 해도, 지금 공부 안 하고 그림 그릴 시간이 어디 있냐고 억수로 야단맞을 걸."

"지금 말고. 대학에 일단 들어간 후,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하는 거지. 그리고 네가 그린 자화상이라고 집에 가져다 걸어 놓는 거지."

"오........ 기발한데."

"그리고 그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나인 거지."

"그림을 배워야 하니까 나는 너를 만나야만 하는 거고?"

"그렇지. 그러면 너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게 완성되는 거지."


최강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안도감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우리가 계속 만나는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네 그림 볼라면 1년은 기다리야 되네."

"원래 좋은 건 쉽게 얻는 게 아냐. 어렵게 얻어야 더 귀한 법이지."

"알았다. 기다리께. 대학 들어가고 나서, 진짜로 그림 가르치 도. 배우고 싶다. 니 내 미술쌤 해라."

"미술쌤......그림을 가르쳐 주는 사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미술쌤' 이라는 말이 최강의 마음에 남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최강은 정말 좋은 미술쌤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니 미술쌤 하면 잘할 것 같다. 니는 그림도 잘 그리지만, 왠지 가르치는 일도 참 잘할 것 같다."

"내가 한 번도 누굴 가르친 적이 없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해?"

"사람의 느낌이란 게 있잖아. 니하고 있으면 용기가 생긴다고 해야 하나. 뭐든지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게 되는, 마음 놓고 뭐든 시도해 볼 수 있는, 그걸 다 받아주고 응원해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왠지 나는 그게 좋은 쌤의 자질 같다."


최강의 두 눈이 깊이 생각에 잠겨 드는가 싶더니, 그는 갑자기 서둘러 일어나 갈 데가 있다고 재촉했다. 그는 식당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잡아끌다시피 어딘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큰길 가 공중전화 부스였고,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리곤 전화기를 쥔 반대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상대 쪽에서 전화를 받았는지 동전이 딸깍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삼촌, 물어볼 게 있어요. 나 삼촌처럼 미술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미술 가르치면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어요?......."


최강은 마음에 솟아나는 질문을 다 토해낸 후엔, 가만히 한참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했다.


"삼촌, 나 미대 들어가게 도와줄 수 있어요? 지금 준비해도 안 늦어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길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대답을 들은 최강의 표정이 밝아 보여 안심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보는 최강의 두 눈이 별을 한가득 품은 은하수처럼 기쁘게 반짝거렸다.


"화실 삼촌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당장 입시 미술 시작하러 나오래. 날 진짜 미술쌤으로 만들어 주시겠대. 내가 너의 미술쌤이 될 수 있게."


나는 최강을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요즘 문득문득 드는 이 생각들에 나는 매번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내 안의 바람들이 스스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것은 나의 욕구인 걸까. 나는 진심으로 이 아이를 사랑하는데. 이 욕구는 왜 있는 것일까. 원래 인간의 마음은 욕구와 진심이 뒤섞여 있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일까. 연애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더 가까이 다가가 끌어안고 만지고 맞대고 싶은 충동 덩어리의 감정인 걸까.


나는 내 안에 들끓는 감정들을 조용히 잠재우며, 최강의 곁에서 묵묵히 걸었다. 우린 공중전화 부스를 떠나, 전에 그를 만났던 동네 놀이터까지 10여분을 걸어간 후, 전에 앉았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첫 키스의 놀란 기억이 정리되지 않고 아직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곳, 내 심장을 잠재우는 일이 더욱 힘든 곳이었지만, 나는 내색 앉고 최강의 옆에 따라 앉았다.


"난 처음이야. 우리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진 것도.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 것도."


최강이 말을 꺼냈다.


"나 사람 싫어했거든."

"왜?"


사람을 싫어했다고 말하는 최강의 얼굴 표정에 오래 외롭고 슬펐던 사람의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난 우리 누나랑 항상 같이 다녔잖아. 사람들이 장애인을 보고 짓는 표정은 몇 가지밖에 없어. 불량품이라는 듯 경멸하거나, 값싼 동정을 하거나, 낯설고 당황스러워서 피하고 싶어 하거나. 난 그런 감정을 보이는 사람들이, 전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되지 않았어. 나는 늘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불안해했고, 화가 났고, 서러웠어."


생각해 보니, 나도 예전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최강의 누나를 보고 그 세 가지 안에 들어가는 얼굴을 했었을 것 같아, 마음이 찔리고 따끔거렸다.


"내가 어떤 표정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미안해. 만나보지도 않고 거절했던 거."

"너에게 우린 일방적으로 좋다고 다가오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미안해. 너와 언니 마음을 실망시키고 슬프게 했던 거."


최강은 내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듯, 손을 뻗어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이 이렇게 큰 행복감을 주는 일이었구나 오늘 하루 정말 제대로 깨닫고 있었다. 내 속에서 요동치는 떨림과 흥분이 그대로 전해질까 봐, 땀이 나서 불쾌감을 줄까 봐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지금 손을 잡고 하나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 주는 기쁨이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다른 의식들은 스쳐 지나갈 뿐, 내려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너를 좋아하게 된 걸까 생각해 봤어. 네가 나를 좋아해 주었기 때문에? 너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점 네가 좋아져서? 그런 게 아니었어. 그것보다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더라. 생각해 보니까 나는 어렸을 때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아했어. 너의 표정은 내가 혐오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의 눈빛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있었어도 차별은 없었어. 누굴 봐도 같은 눈빛. 맑고 또렷한 그 눈을 자꾸 더 보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널 그리기 시작했고. 사실은 내가 누나를 데리고 너를 찾아다닌 거였어. 내가 너를 보니까 누나도 너를 본 거였고,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누나도 널 좋아한 거였어. 그냥 처음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 내 마음을 소통할 길을 몰라서 화가 났던 거였지. 나도 어렸고 너도 어렸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니가 내를 더 먼저 좋아했다고 고백하는 기가?"

"그래! 너 이제 어쩔래? 나는 한 번 좋아하면 끈질기게 안 떨어지고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놈인데."


나는 몸을 돌려 최강을 끌어안았다.


"경비 아저씨 오신다."


나는 나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고, 그의 말에 두 번 놀라 후다닥 떨어졌다. 최강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헝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웃음소리가 맑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성욕 가득할지 모르는 남학생 안 무섭냐?"


최강은 아까 내가 저를 당황시킨 말을 품고 있다가, 되돌려 주었다.


"와, 그래 안 봤는데, 니 뒤끝 작렬이네. 니는 하나도 안 무섭거든."


내가 뱉었던 말에 내가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 무안한 나는 그를 비난하며 툴툴거렸다.


"그래 무서워하지 마. 난 언제든 너를 먼저 위하고, 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니까."


최강의 말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사람이 말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구나 싶었다. 나도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니는 내가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다. 닌 진짜 좋은 사람이다."

"우리 어쩌냐 이제. 이렇게 서로를 좋아해서."

"이 마음을 돌보고 지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가야지."

"나는 그동안 너무나 두려웠었어. 너와 내가 점점 다른 길을 가게 될까 봐. 난 지금까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사람들이 싫으니까 대학이고 뭐고 다 싫었어. 혼자 숨어 있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어. 그래서 화실에 처박혀서 그림만 그렸던 거야. 그런데, 널 만나게 되면서, 내 세상이 뒤집힌 거야. 엄청난 혼란을 느꼈어. 지금까지 대학 준비를 제대로 안 한 걸 이렇게 후회하는 날이 올 줄 몰랐어. 내가 돈을 잘 벌 수 있는 능력이 없을까 봐 이렇게 무서워지는 순간이 올 줄 몰랐어."


나의 고민과는 몹시 다른 최강의 고민. 나와 다른 삶을 헤쳐온 그의 고민이 완벽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절박한 심정만은 내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자신 없는 두려움을 이기고 헤쳐 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았다.


"내가 그림을 좋아했어도, 내가 갈 곳이 미대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았었거든. 근데 너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는 상상을 해 보니까, 갑자기 미술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마음이 정해지는 거야. 아까 화실 삼촌 말이, 미술 선생님이 가장 돈 많이 버는 길이 입시 미술을 가르치는 거래. 그래서 입시 미술을 직접 경험하고, 미대에 입학해 보고, 미대에 다니는 경험까지 다 해봐야 한다고. 나 잘할 거고, 좋은 미대 갈 수 있을 거라고 엄청 격려해 주시더라. 공부를 잘할수록 좋은 미대를 간다고, 공부도 같이 열심히 하라시는데..... 그것만 자신이 없네."

"야, 걱정 마! 내가 그동안 정리한 노트들 다 있잖아. 영어 수학은 쌤들, 너의 삼촌 숙모께서 책임져 주실 거고, 암기 과목은 다 내가 책임 지고 달달 외우게 해 주께. 대신 나중에 미술 레슨비 받지 마라. 그림도 많이 그려주야 된다."


이번엔 최강이 몸을 돌려 날 끌어안았다. 경비 아저씨가 오지 말기를...... 이대로 세상이 끝나기를......


결코 이대로 세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끝없이 길을 찾아야 하고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최강이 갈 길을 정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뻤다.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어떤 사람이 되면 최강에게도 또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가족도 돕고 나도 독립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내가 공대 가는 것이 정말 나의 길이 맞을까. 잃었던 길을 다시 찾아내고 전력으로 달릴 준비가 된 최강이 나는 무척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어쩌면, 한 번도 내 길을 찾아보겠다는 용기를 가지지 못해, 주어진 길만 부모가 가라는 길만 쭉 걸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길을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는 더더욱 없다. 용기 없는 이 비겁한 느낌을 나는 과연 떨쳐낼 길이 있을까. 진짜 내가 가야 할 나의 길에 도달하게 될까. 나만의 방에 최강이 그려준 그림을 거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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