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의 불안

[에세이] 나는 왜 나처럼 사는가?

by 하트온

그래도 불안하다


인간은 불안하다. 불안의 근원은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있다. 태어나서 살다가 소멸해 가는 변화가 인간 삶의 밑바탕에 항상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 그림자는 죽음이라는 끝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어둡고 서늘한 공포감을 짙게 드리운다. 개미의 운명을 결정하는 손가락 기둥 같은 그림자 속에서 행복할 이유를 샅샅이 찾아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역사를 추적할 수도 없이 오래전에 결정된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전 인류의 운명이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마지막 시간 앞에서 호들갑 떨기를 그만한 지 오래다. 누구나 당하는 일이라 괜찮다고 그다음에 더 좋은 내세가 올 거라고 마음을 다독이고 숙명을 수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도 불안하다. 도대체 완벽한 적응이란 있을 수 없는 삶의 불규칙한 흐름과 때때로 몰아치는 세파는 숨쉬기조차 힘들게, 무기력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나이 50이 가까운 이 시간, 새벽 위장병처럼 내면을 따갑게 훑으며 스치는 이 시간은, 한밤중 적막 속에 드디어 공격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초침 소리처럼 삶이 툭툭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불안과 공포로 가슴을 조여 온다. 오랜 시간 쌓여온 원인들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나 혼자만이 내 삶의 원인제공자가 아니기에 나 혼자서 예상할 수도 없었던 복잡하고 기함할만한 결과들이 여기저기서 오락실 두더지 머리처럼 하나 둘 쳐들고 올라온다.


아무리 살아도 삶을 선명히 통찰할 수 없다. 감당이 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시간의 연속이다. 파악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나의 지력만으로 알 수 없는 것임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나 이전의 모호한 원인의 역사만 파고 앉아 있기에도, 어차피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결과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느라 버둥거리는 것도 이젠 시간이 아깝다. 실체 없는 감정,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려 나아가는 삶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요리'의 불안


삶에서 두려움을 걷어내 보기로 한다. 불안한 마음이 밀려올 때, 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꿰뚫어 보기로 한다. 불안은 피하려 하고 못 본 척하면 할수록 더 끈질기게 달라붙어 커져가는 이상한 존재다. 그것은 항상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정당성을 내세운다. 조용한 밤 어둠을 타고 기습적으로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확대해서 상기시킬 줄 아는 영리한 머리에 끈질긴 태도까지 갖추고 있다.


문득 불안이 대단해 보인다. 싫어하고 피하기만 하기엔 너무 재능이 많은 아까운 녀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내 불안만 한 능력이 있다면 무슨 일이건 성공하지 않을까. 나는 이 놈의 불안을 숨기고 누르는 대신, 환한 대낮에 시간 잡고 만나 보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모른 척으로 일관했던 불안이 보내는 영리한 신호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을 관심을 보여주고 그것을 구슬려 속내가 뭔지 다 털어 토해내게 만들었다.


불안은 엉뚱했다. 내가 '요리'를 잘 못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소리를 했다. 낮에 들으면 코웃음이 날 만한 이야기다. 나가면 각종 음식을 파는 식당과 마트가 천지에 널려있는데, 요리를 잘 못하는 것이 불안하다니 헛소리 같다. 하지만 어두워지고 눈을 감으면 나는 여전히 요리를 잘 못하는 나를 들들 볶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 심하게 격앙된 불안이 붙어 요동친다.


내 인생에 '요리'라는 주제는 수많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원인과 결과들이 집약된 활화산 무더기다. 이 화산 용암 속에 모든 뜨겁고 불편한 것들이 부글부글 지옥불을 만들고 있다. 가부장 문화의 탈을 쓴 여성 학대, 폭력 트라우마, 왜곡된 성역할 정체성, 여성의 입장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충하는 가치, 도무지 편안해지지 않는 감정과 갈등으로 몸부림치는 내면... 아 이 죽일 놈의 세끼 밥이여!


십 년 이십 년 전에도 나는 '요리'라는 주제에 대해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화만 냈다. 요리를 잘 못하면 어떠냐고, 왜 밥밥 거리냐고. 여자들만 보면 필요할 때마다 뚝딱 밥 차려 내는 식모 노예로 만들어 놔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고. 기혼 여성을 향한 요리 실력 압박에, 어딜 가나 며느리한테 밥 잘 대접받아먹었냐, 아내가 아침밥은 잘해주냐, 너희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주냐는 소리부터 나오는 문화에 화를 냈다. 거부하고 도망갔다. 여자들이 부엌에 모여 음식을 해서 나눠 먹는 자리들을 가능한 피하고, 여성에게 요리실력을 요구하는 집단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분명, 밥밥 거리고, 요리 한 상을 잘 차려 주변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을 중요한 기혼 여성의 덕목으로 부담을 주는 문화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고, 이 부담이 주는 고통과 힘겹게 싸우며 살아가는 여러 입장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납득하고,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기에, 지난 10년 사이 요리 잘하는 남자 요리사들, 요리 배우려는 남성들이 티브이에 나와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는 장면들이 급격하게 늘어났을 것이고, 그것은 모두 반갑고 정의로운 변화다.


누구나 즐겁게 밥을 지어 스스로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지금 '요리'라는 주제가 내 안에 불러오는 불안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부담이라기보다, 그 부담이 걷힌 이후에 생겨난 불안이다. 한 인간으로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을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피해온 만큼 요리와 나 사이에 생긴 거리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을까 봐 불안한 것이다.


'음식'이라는 주제에는 오래 미루어온 숙제 같은 찜찜한 느낌이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또한 자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선물하고 챙겨 먹이는 문화가 만드는 일종의 사회적 강박 일지 모르겠지만, 이젠 사회 문화를 탓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가족과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은 이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고, 쓰린 위장병처럼 내 속을 자꾸 파고들어 모든 여성 역할의 부담이 걷힌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요리'에 대해 화만 내고, 내 안에 깔려있는 이 욕구와 감정들을 무시하면, 나는 내 생애 남아 있는 모든 식사 시간들을 자기기만적인 불쾌한 감정들로 채우게 될 것 같아, 미래의 식사시간들을 행복한 일로 느낄 수 없게 될까 봐 몹시 이상하고 찜찜하게 불안한 것이다.



'1'이라도 있다면 괜찮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안의 불안, 이 이상한 욕구와 마주하기로 했다. 몹시도 유치하고 원시적인 방법일지 모르겠지만, 종이를 펼쳐 놓고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쭉 적어 보았다. 내가 스무 가지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써 보니, 나는 스무 가지 이상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스무 가지 이상의 음식을 할 수 있으면 돌려가면서 맛있게 해 먹으면 되지 않을까.


내 안의 불안은 '내가 할 수 없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막연한 짐작이 두려움을 낳은 것이었다. 이건 마치, 나에게 팬티가 두세 장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불안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막상 옷장을 뒤져 보면 여기저기서 예전에 사 둔 팬티가 10장쯤 쏟아져 나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내 삶의 살림살이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있으면, 문득 착각과 짐작이 불러오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안될 것 같고,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보잘것없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너무 불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나 자신을 샅샅이 뒤져보고 철저히 조사 파악을 해 보면, 내 삶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쌓여있고 짱 박혀 있고, 비상금이 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착각의 불안에 속지 말자. 불안을 마주하고 적어 보면,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나의 두려움을 쫓아내 준다. 삶이 툭툭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사실은 상당히 탄탄하게 기반이 다져져 있어, 중심은 굳건히 버티고 있다. 흰머리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도, 사실은 검은 머리가 훨씬 많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노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도, 아직은 건강하게 나를 위해 잘 싸우는 건강한 세포들이 더 많다.


오늘 하루 이런저런 것들이 흘러내리고 빠져나가고 무너져 떨어진다 해도, 아직 남아 있는 나의 탄탄한 중심이 든든하게 내 삶을 지키고 있다. 그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주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안정감이 바탕을 이루는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시간의 끝이 드리우는 묵직한 그림자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풍족하게 느끼고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막을 것은 없다.


결국 다 날아가고 마지막엔 '0'이 남는 삶일지라도, 어차피 '0'에서 시작한 삶이었고, 다시 '0'에 이르는 순간까지 주어지는 모든 것은 공짜로 얻은 선물이다. 그러니 삶은 '1'만 있어도 공짜, 받은 김에 즐겁게 누리면 되는 선물이다. 밀려오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내 편으로 만들면 나를 돕는 친구가 된다. 모든 것이 아직 '0'이 아니고 '1' 이상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현상이다. 몰아치는 어려운 상황들도,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 한 발 한 발 걸어갈 수 있는 나를 '1'이라도 남겨주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 오늘도 나는 삶이라는 선물을 실컷 받고 누리고 있는 언젠가는 '당연히', '0'으로 돌아갈 존재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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