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준비하는 장아찌

[힐링 푸드 에세이] 내 마음을 먹여 살리는 밥

by 하트온

긴 이별 앞에서


마음이 모여 상황이 만들어지고, 일어나야 하는 일은 결국 일어나는 법입니다. 올 것이 왔습니다. 늘 제 아이들 곁에 있어 주셨던 할머니, 저의 친정 엄마가 이제 미국을 떠나, 한국에 들어가시려 오랜 이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엄마와 떨어져야 할 때마다 한 겨울에 외투를 뺏기는 듯한 허전함과 황망함이 밀려오지만, 저는 엄마를 말리지 않습니다. 엄마와 한국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구간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도 문화도 훨씬 더 편한 한국에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모든 소통과 어울림을 찾아 누리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장아찌


한여름 폭염을 뚫고 운전해서 한국 마트에 왔어요. 함께 온 엄마가 깻잎을 보고 반가워하시며 정말 말 그대로 한 보따리를 사시네요. 한 보따리 가득 사도 이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정말 수지맞는 구매인 건 틀림없습니다. 몇 년 전까지 텃밭을 가꾸고 깻잎을 키워 따먹어 본 경험이 있어, 저만한 양을 키워 따려면 얼마만큼의 노력이 드는지 잘 알고 있거든요. 깻잎을 보고 눈을 반짝이는 엄마는 다 계획이 있으신 것 같았어요. 엄마가 큰 간장 한 병도 끼워 넣는 걸 보았거든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간장과 설탕 식초를 배합한 장아찌액을 끓이기 시작하시네요. 깻잎 장아찌를 만드실 거라는 게 확실시되었습니다.


우리 가족과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는 몇 달씩 놓고 먹을 수 있는 깻잎 장아찌를 담가놓고 가시는 편이지요. 이 깻잎 장아찌는 저 먹으라고 담는 것이 아니에요. 아기 때부터 유달리 깻잎 장아찌를 좋아하던 저희 집 두 녀석들을 위해 그 입맛에 딱 맞춰 담는 것이지요. 그 옛날 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겨울 한파 속에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구해주시던 콩잎 반찬이 우리 아이들에겐 깻잎 장아찌입니다.


엄마는 여기서 비행기로 15시간 날아가야 하는 한국에 갈 준비를 하고 계신 거예요. 코로나 전에 태어나 아직 만나보지 못한 손녀와도 시간을 보내고,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들 며느리와도 시간을 보내고, 엄마의 다른 피붙이 자매 친척들까지 전국을 돌며 다 만나 보실 계획입니다.



1950년생의 사랑


저의 엄마는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해에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잘 먹지도 못한 산모가 피난길에 죽음을 무릅쓰고 낳은 아기는 죽은 것 같았습니다. 한쪽으로 밀쳐놓고 이름 지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아기는 꿋꿋이 살아나 젖을 물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손주까지 보기에 이르렀지요.


엄마는 어디서건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의지가 몹시 강합니다. 아기 때 죽어가는 아기라고 한쪽으로 밀쳐놓았는데 살아났다는 말을 들으며 커서인지, 엄마는 인간 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밀쳐지는 일을 또 당할까 봐 몹시 두려운 사람 같아요. 어디에 가서건 편히 앉아 즐기는 법이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상대방이 필요한 게 뭘까를 고심해서 알아냅니다.


본인의 삶은 피곤하지만, 어딜 가나 환영받는 존재입니다. 어느 집엘 가도 그 집 아이 입맛까지 맞추어 정성스럽게 음식을 해 주니, 특히 아이들이 환영하는 할머니입니다. 당신 손주뿐 아니라, 한 다리 건너가는 사촌이나 육촌 집 아이들까지 할머니의 방문과 음식을 갈망합니다. 결코 남들이 못하는 수준으로 대단한 요리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어디에서건 누구에게 건 필요한 존재가 되고자 작은 어린아이 입맛까지 배려하는 마음 습관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곧 떠나시지만, 할머니의 장아찌는 오래오래 갈 거예요. 할머니가 그리운 날, 냉장고 깊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리 반찬통을 열 때마다 장아찌를 담근 할머니의 마음이 아이들의 코끝에 새콤 달짝지근 짭조름하게 피어오르겠지요. 아이들은 할머니의 그 감칠맛 나는 깊은 사랑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지요.





사진 출처: https://www.10000recipe.com/recipe/69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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