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금 (경계선)'
삼일 째 같은 면 티셔츠를 입고 잤다. 일주일을 채운 후 빨래를 할 생각이다. 옷을 벗어 빨래 건조대 위에 건다. 볕이 깔깔하니 좋다. 약을 오랫동안 복용한 후유증인지 몸이 나른하여 밖에 나갈 의욕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커피부터 좀 내려둘까 하고 부엌으로 향한 발걸음이 투명 플라스틱 상자 안의 빨간 열대어 앞에서 멈춘다.
“얘는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 정 주지 말고 키우세요”
애완동물 가게 개업 이벤트 행사라며, 고객들에게 물고기 한 마리씩 든 벽돌 한 장 크기 중국산 야광색 플라스틱 어항을 나눠주는 아가씨의 자신 없는 말을 듣고 받아 온 것이 벌써 2 년 전이다. 그 사이 붉은 실크 드레스처럼 화려했던 지느러미 자태가 패전 군의 깃발 끝자락처럼 까맣게 타들어가 버렸다. 늙어가는 모습이 애처롭긴 해도 매일 코딱지만큼의 밥을 먹고 이 좁은 사각 공간 안을 헤엄쳐 다니는 일상에는 아직 변함이 없다. 언젠가는 열대어가 배를 뒤집고 물 위에 떠오를 것이다. 사각 공간의 투명한 플라스틱 벽을 사이에 둔 너와 나의 공존관계. 서로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도, 서로를 침범할 일도,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일도 없었던 관계. 그래서 평화롭고 편안했던 관계. 이 아이의 생명이 다 하는 날 이 부엌 한편이 얼마나 쓸쓸해질까.
하염없이 물고기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약속시간이 생각보다 임박하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커피는 내리지 못하고 서둘러 물고기 밥만 주고 바로 욕실로 들어간다. 옆 집 여자 ‘나디아’가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져다준 불란서제 비누의 강한 향이 그녀의 독설처럼 거침없이 훅 끼쳐온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었지만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세면대 아래 캐비닛을 열어 비누를 구석으로 밀쳐 놓을 뿐이다.
손등이 오슬 오슬 가려워 오는 것을 꾹 참고 수도꼭지를 튼다. 샤워기에서 내리는 축복의 물줄기 아래 몸은 갈라지고 메마른 땅이 되어 납작 엎드린다. 따뜻한 물이 밤새 굳은 몸을 달래고 살점 곳곳에 남아 있는 가려움의 열을 식혀준다. 물세례를 받고 또렷해진 의식은 물이 굳이 씻어낼 필요가 없는 것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씻어낼 수 있다는 이면에 대해 생각한다. 물의 위험성을 생각하면서도, 뜨거운 물줄기 아래 시원함을 느끼는 흐물 해진 몸은 박차고 나갈 줄을 모른다. 물과 함께 흐르고 있는 시간에 의식이 충분히 초조해진 후에야 겨우 몸을 억지로 밀어낸다.
얼굴에 로션을 문지르며 흘깃 보니 남편은 변함없는 자세로 누워 있다. 밤의 정적을 가르고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테지만 예민한 귀를 가진 그는 그것들에 잠을 도둑맞곤 한다. 그나마 아침에 잠이 깊이 몰아 드는지 그는 항상 늦잠을 자는 편이다. 어젯밤 미리 꺼내 욕실 캐비닛 안에 넣어 두었던 면 속옷을 살금살금 꺼내 입는다. 마른 수건으로 감싸 머리카락에 남은 물도 꼭 짜서 닦아낸다. 물기가 가신 마른 몸에 면소재의 가벼운 여름 원피스를 소리 없이 걸친다.
고양이처럼 발끝으로 소리 없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몸에 익은 완벽한 배려의 습관이 뭔가 비굴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다. 한 번 깨달아 버린 생각을 이젠 되돌릴 수가 없다. 상담사는 경계선이 어쩌고 하는 말을 했다. 그 말은 어쩐지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상담사와 다시 말을 섞을 의욕도, 밖에 나갈 기분도 들지 않지만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