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경계선) 4

단편소설 '금(경계선)

by 하트온

상담사는 나이가 나보다 좀 더 들어 보이는 단발머리의 한국인 여자였다. 그녀가 처음에 어떤 질문으로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화를 내듯 앞뒤를 가리지 않겠다는 태도로 그녀를 찾아갔고, 입을 열 차례가 오자마자 남편의 과거 전적을 예로 들어가며 인터넷에서 긁어모았던 정보들을 쏟아냈다. 그녀가 남편은 잠시 제쳐두고 나의 어린 시절 경험과 내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미 충분히 내 책임이 아닌 것을 내가 책임지고 고치고 노력하고 할 것 다 해봤다고. 이젠 남편의 문제를 정확히 깨달아야 하는 때라고 말이다. 상담사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히는 것을 보고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 내 문제인 양 어린 시절을 파헤치거나 친정 부모를 탓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말해주었다. 그 말이 통한 건지 어쩐 건지 상담사는 난데없이 그룹 세미나가 효과적일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개인상담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 와중에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런 질문을 뱉어 놓고 나는 스스로를 한심해하고 있었다. 상담사는 의외로 내 말에 수긍을 해왔다.


“이미 본인의 문제를 자각하신 상태에서 오셨고, 저희 상담센터의 입장은 그러한 문제를 수용하고 다룰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하도록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편분이 가지고 계신 여러 가지 문제들은 남편 본인의 자각이 없으면 주변 사람들이 고치기를 원한다고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조종에 끌려다니지 않고 더 이상 정서적인 학대의 침범을 받으시지 않도록 ‘경계선’을 잘 세우셔야 합니다. 마침 이 주제의 그룹 세미나가 다음 달부터 시작됩니다. 타인이 회복하고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되실 거예요.”


상담사가 ‘경계선’이라는 말을 했을 때 어린 시절 짝꿍과 나눠 쓰던 작은 나무 책상이 떠올랐다. 욕심꾸러기 녀석이 함께 앉기라도 하면 저가 좁은 책상 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밀고 난리 법석을 떨며 자리싸움을 하게 만들던 그 책상. 늘 해결 방법은 자로 정확히 반을 잰 자리에 공평하게 ‘금’을 긋는 것이었다. 그 ‘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게 자로 재서 금을 그을 수 있을 만큼 삶의 문제가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잡한 ‘금’을 긋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나와 있다. 상담 오피스가 아닌 상담사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상담사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하이웨이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만 생각보다 멀지는 않았다. 하이웨이를 빠져나와서는 좁은 이차선 길을 쭉 타고 5마일 정도 달려야 했다. 집 번호는 5885. 왼쪽 언덕 위로 좌회전을 해야 하는 특이한 위치에 집이 있었다. 눈이 오면 어쩌나 싶은 가파른 비탈길 드라이브 웨이에 차를 세워놓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비탈길이 주던 느낌과 다르게 굉장히 평온한 안정감을 주었다.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자 두 세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서재방에 테이블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상담사와 부부로 보이는 늙수구레한 남녀가 기역자로 앉아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부부와 마주 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인사를 하자, 젊은 사람이 와서 참 좋다고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걸어온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요 하며 조심스러운 소개를 하는데, 내 또래의 중년 여자 둘이 방으로 들어온다. 꽤 차림새가 화려한 여자 하나와 수수한 차림에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다.


상담사는 한 묶음의 복사본을 각각에게 나누어준다. 복사물의 첫 페이지 머리에 <건강한 경계선 세우기>라는 제목이 굵은 글씨로 선명히 타이핑되어 있다. 상담사가 차를 준비해서 내오는 동안 나는 첫 페이지 내용을 대략 흝어본다.


[경계선이란…… 나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분명히 하는 ……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분명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아닌지 한계를 정하는 것…… 경계선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조종하도록 허락……상처를 받을 수밖에…… 악행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배우자나 부모에게 잔인하게 학대를 당하기도……]


여러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해 상담사가 준비해 준 커피, 녹차, 한방차의 향들이 문 닫은 방 안에서 어우러지는 동안 상담사가 경계선의 정의를 설명한 후 경계선 설정을 못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무 사람이 좋아서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들으며 수수한 차림새의 여자가 한숨을 후우 내쉰다.


상담사는 이어 경계선을 세워야 하는 영역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복사물에 열거된 항목들을 눈으로 읽으며 따라가다가 <재능과 능력> 그리고 <욕구 인정>에 동그라미를 친다. 다음으로 상담사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학대당했던 어떤 부인의 치유와 극복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며 경계선을 세우기의 구체적인 적용 사례를 들려준다. ‘결속’, ‘분리’, ‘경계선 침범’ ‘감정의 책임’, 상담사가 쓴 생소한 단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음에 쌓이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즈음 상담사가 질문을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책임을 지거나 다른 사람이 나의 감정에 책임을 지도록 경계선을 침범한 적이 있으면 나누어 주시겠어요?”


노부부의 아내 되는 쪽이 입을 연다.


“저희 딸이 이번에 아기를 낳았어요. 이 딸이 저희가 장사를 하느라 할머니 손에 컸던 아이인데 할머니가 뭐든지 다 해줘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자주성이 없고 혼자 알아서 할 줄을 몰라요. 저희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딸이 사는 버지니아 주까지 두 시간 걸려 다녀와요. 그것도 우리는 시간을 최대한 내는 거거든. 청소 다 해놓고, 반찬까지 일주일 분량 다 해서 만들어 주고 오는데도, 딸이 애 혼자서 못 보겠다고 자꾸 우리 부부를 불러요. 전화로 힘들다고 징징대니 어떡해…… 우린 마음이 약해서 여기서 장사하다 말고 또 버지니아 주까지 달려가는 거야. 여기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딸도 자꾸 기대려고만 하고……”


딸의 의존적인 태도 때문에 마음도 생활도 엉망이라고 아내가 호소를 한 것이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살림과 육아 부분만 그런 것이지 신앙도 좋고 얼마나 공부도 잘하는 착한 애였는지 남편 쪽이 슬며시 덧붙인다. 상담사는 어른이 된 딸의 감정 및 의무를 부모가 대신 소유하고 책임지고 있는 좋은 예라고 설명한다.


“저도 나눌 게 있어요.”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저의 올케들 이야기예요. 올케들의 책임을 제가 다 떠맡고 있어요. 친정아버지 어머니 병원 가실 때마다 제가 모셔가고 약도 제가 타다 드리고. 제가 애가 셋이라 정신이 없는데 친정 부모님이 자꾸 저한테 심부름을 시키니 제가 거절할 수도 없고 너무 화가 나요. 올케한테 전화해서 언니가 오늘 아빠 병원에 모시고 가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러면 냉랭한 목소리로 갑자기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라고 말할 뿐이에요. 기분 나빠서 다신 전화도 하기 싫어요. 오빠들한테 얘기하면 오빠들은 언니들이 일하면서 애들도 키우고 해서 너무 바쁘니까 영어도 잘하고 전업주부인 너한테 부탁한다 이러고 제가 하는 말을 심각하게 듣지도 않아요. 저는 올케들이 너무 밉고 화가 나서 견디기가 힘들어요. 너무 오래 사람을 미워하고 있으니 우울증이 오는 것 같아요.”


조근조근 말하는 고운 목소리 안에 시커먼 원망이 그득하다. 사람들의 표정이 뜨악해지기만 할 뿐 끼어들기나 충고를 하지 말라하니 아무도 말을 못 한다. 교통정리라도 좀 해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 상담사의 입만 쳐다본다.


“힘이 많이 드시지요. 아이 셋에 친정부모님 돌보기까지.”

“네에! 정말 힘들어 죽겠어요.”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상담사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사람들이 행동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올케를 미워하는 것은 올케에게 내 감정의 책임을 묻고 있는 거예요.”

“뭐라고요? 올케의 책임을 제가 지고 있는 게 아니라 제가 올케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고요?”


여자는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한다.


“감정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래요. 오늘 남아서 저랑 단 둘이 이야기를 좀 더 나누시지요.”


딸인 자신의 책임과 며느리로서 올케의 책임을 금을 긋고 나눌 수 있을까? 올케와 시누 사이의 감정을 각자가 책임지면 서로 미워하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일까?


“저는 분노조절이 안돼요.”


수수한 차림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주변 사람들은 저를 굉장히 착한 사람이라고 해요. 저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정말 싫어요. 제가 그런 말을 듣는 이유는 제가 남이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기 때문이거든요. 속으론 저의 그런 모습에 화가 나요. 그리고는 남편과 애들한테는 독재자가 돼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화를 내요. 제 모습이 이중적이라는 걸 저도 알아요. 그래서 너무 괴로워요.”

“언니!”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깜짝 놀라며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인격적인 언니가 그런 줄 몰랐다고 속삭이자 수수한 여자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오른다.


내 차례가 온 것 같은 기분에 남편이 조종하는 대로 살아왔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말까 얼마나 자세히 이야기를 할까 망설이는 사이에 상담사가 경계선을 건강하게 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증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담사가 쭉 읽어가는 내용이 생소한 용어들 때문에 귀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부당하게 취급받는 상황에 놓이면서 우울증이 와요…… 일을 강제적으로 억지로 하니까 일 시킨 사람을 원망하고…… 상호 종속관계에 놓이게 되면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은 지면서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무시합니다……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으므로 정체성에 혼란이…… 사람 의존증은요……”


갑자기 ‘사람 의존증’이라는 말이 귀를 딱 때린다. 자기 힘으로 생존하지 못하고 남을 의존함으로 살아가는 나약한 인생. 나디아가 말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가 머무른다는 어린아이의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독립했던 적이 있었던가? 서울에서 고등학생 입시 과외를 여러 개 뛰면서 하숙 생활을 하던 대학시절이 생각난다. 하루 한 끼 제대로 사 먹을 돈도 없어 컵라면으로 수많은 끼니를 때우고 살 던 그때. 뜨거운 물도 쓸 수 없던 궁상스런 하숙집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그 가난을 딛고 일어서지 못했다. 유학과 결혼을 선택하는 대신, 내가 직접 돈을 벌어 자취 살림을 키우고, 전세로 옮기고 작은 집을 사는 경험을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사이 상담사는 세미나를 마무리하고 있다.


“자 다음 시간까지 해 오셔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상담사가 나누어 준 숙제지에는 [내가 누구인지 솔직하게 정의하시오, 원하지 않는 것에 ‘아니오’라고 하시오, 남 비난하기/희생양 역할을 중지하시오, 주도적이 되고 수동적이 되지 마시오, 다른 사람의 ‘아니오’를 수용하시오] 다섯 가지의 지침이 적혀 있었다.


“이 다섯 가지 경계선 설정 지침들을 연습하시고, 그 연습한 결과를 다음 주에 만나 나누기로 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하게 정의해 보는 것은 글로 써 오셔도 좋습니다.”

“아유 숙제가 많기도 하네요.”


노부부의 웃음 띤 얼굴과 대조적으로 그들의 눈동자엔 곤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당장 딸한테서 전화가 오면 ‘안 돼, 못 가.’라고 말하는 것이 노인들의 마음에 큰 돌을 얹는 일일 테니까.


“전 확실히 상호 종속관계 문제가 있다는 걸 오늘 확인했어요. 남의 일은 과도하게 책임을 느끼고 제 가족은 너무 함부로 대하고 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전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연습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수수한 차림의 여자가 씩씩하게 이야기한다.


“네, ‘아니오’ 연습 많이 하세요. 그게 바로 정서적 근육을 키우는 연습이랍니다. 이 연습을 많이 하실수록 건강한 경계선 세우기가 가능해지실 거예요.”


상담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확신에 찬 어조로 여자를 격려한다.


“전 선생님과 일대일 면담을 좀 해야죠?”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입을 삐죽거리며 확인을 한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데도 어쩐지 그녀의 몸짓은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다. 나도 저런 느낌의 사람인 걸까? 화려한 차림의 여자와 상담사가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그 집을 걸어 나오면서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그래서 금도 그을 줄 모르고 사는 바보들이 이 세상에 참 많은가 보다고.


남편은 분명 내가 외출을 한 동안 골방 매트리스 위에 '나르시시스트'라는 제목의 자료가 즐비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인터넷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본 후 애써 버리거나 숨기지 않았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내 랩탑을 열어 이혼 절차를 보여주는 웹 페이지를 열어 본 흔적도 발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예민한 그는 당황하고 굳어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참으로 요상하게도 지금 나를 안아주고 있다. 실로 오래간만이다. 나는 내 면역력을 키워내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밤 샤워를 건너뛰고 삼일 동안 입고 잤던 면티셔츠를 나흘 째 입고 자려던 참이었을 뿐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키스를 해 온다. 내 입안에 있는 병균을 꺼려해서인지 키스를 원래 싫어하는 건지 결혼 전 프러포즈할 때 딱 한 번 이후 서로의 입 안을 느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먼저 입을 맞추고 다가가도 결코 입을 열어 주는 일 없던 그는 입을 활짝 열었을 뿐 아니라 혀로 내 입 안을 샅샅이 훑고 다니기까지 한다. 참 갑작스럽고 적응이 안 되는 딥 키스. 게다가 그는 이제 내 몸을 발가 벗기고 키스를 하던 그 입으로 내 온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나갔다 와서 샤워를 하지 않은 몸의 체취가 그를 괴롭힐까 잠시 생각했지만 나는 몸을 움츠리는 대신 그의 혀의 움직임에 대담한 태도로 몸을 맡긴다.


그러나, 그러한 혼미한 감정 속에서도 깨어있는 의식 한 자락이 차가운 생각 한 움큼을 불러온다. 그는 나를 다시 정복하려고 하는 것일까? 의문의 찬 기운이 그가 불 붙인 몸의 열을 식히려는 찰나, 그의 손이 마른 잔가지에 쉬운 불을 붙여 다시 열을 살려내려는 듯 허벅지 안 쪽과 둔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강하게 옥죄었다 하며 점점 몸 위로 올라온다. 그는 이제 정복자가 빼앗은 땅에 깃발을 꽂는 것처럼 그의 단단한 몸을 나의 몸속에 꽂아 넣는다. 나는 잠시 이것이 사랑이 있는 행위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기로 한다. 의식의 스위치를 잠시 끄고 그의 강한 몸에 결박된 채 한 곳으로 집중되는 흥분과 쾌락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따라갈 뿐이다. 몸은 더 이상 절정의 흥분을 주체 못 하고 탄성을 지른다. 곧이어 남편의 단단한 몸이 꿀럭이며 토해내는 느낌이 미세하게 몸을 울린다. 그는 물러진 몸을 빼내지 않는다. 내 몸을 결박한 채로 귀에 속삭인다.


“우리 아기 가지자.”


그 순간 나는 눈을 뜬다. 창 너머 둥그런 은백색 달의 날카로운 시선에 깜짝 놀란다. 달빛이 거울이 되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기도 하고 분명한 경계 없이 희뿌연 구름 덩어리 같기도 한 내 마음을 보여준다. 마음이 ‘아니’라는 말과 ‘그래’라는 말 중간 어디 즈음에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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