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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Oct 30. 2023

1. 루이의 나무

[소설] 루이의 나무

# 23년 전, 오사카


150년쯤의 세월을 견뎌왔을까? 에도시대풍의 빛바랜 목조 건물들이 즐비한 카도마쿠의 골목길은 관광특구를 노리는 장사치들의 눈에 절대 지나칠 수 없는 금광이었다. 이 지역구 전체가 오사카 신도시로 편입되어 보수, 개발될 것이라는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바심 난 부동산 업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도톤보리, 난바의 뒷골목들이 전통문화 거리로 거듭난 후 흥왕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신도시 한가운데서 느껴보는 신기루 같은 옛 정취 옛 풍경, 얼마나 품격 있고 낭만적인가? 저 푸른 언덕을 밀어내고 들어설 주상복합 단지에 인구가 유입되기 전, 이 카도마쿠 거리가 값비싼 번화가로 변신하기 전, 지금이 바로 건물 매입 적기인 것이다.


부동산 업자들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리모델링 견적부터 미리 내려는지, 업자들을 불러와 건물을 꼼꼼히 살펴보는 인간이 있질 않나, 자신들이 건물을 사서 공간도 확장하고 멋지게 리모델링을 할 테니, 세입으로 식당 운영을 계속하라는 이도 있었다.


작은 테이블 네 개와 긴 테이블 하나로 꽉 차버리는 작은 식당이지만, 오랜 시간 그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동생 신이치와 함께, 작은 소년의 몸으로 히데오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이 20여 년 전. 그때부터 쭉 식당일로 잔뼈가 굵은 이마이였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 동무였던 에이코와 결혼을 했고, 이곳에서 아들, 루이를 낳았다. <오쿠다>는 이마이가 아는 모든 세계였고, 그의 모든 것을 품어준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기한 내에 리모델링을 하라는 정부 명령을 어기면, 억울하게 처벌을 당할 수 있다는 부동산업자의 으름장이 가슴에 턱 걸려 이마이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건물을 파시려 할까… 식당은 그럼 어떻게 될까?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야 할까……’


식당을 팔고, 아버지 치료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었다. 하지만, 명절이나 집안일로 며칠씩 쉬는 외엔 한 번도 닫은 적이 없었던 가게를 접고 떠난다는 생각은 이마이에게 큰 산이 가로막는듯한 막막함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태어나 한평생을 살아온 히데오에겐 이 일이 얼마나 더 막막할까?


“아버지, 부동산 업자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네요.”


건물을 어떻게 하실 거냐는 질문을 이마이는 우회했다. 히데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마이는 반죽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히데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죽을 힘껏 쳐올려가며 공기와 함께 버무리는 듯한  그의 손놀림은, 명지휘자의 계산된 손짓처럼 정확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손놀림을 보면서 이마이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기분이나 상황이 어떠해도, 식당을 열고, 손님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무언의 몸짓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오늘은 오늘만 살자. 오늘도 식당을 열어야 하고, 지금은 육수가 가장 중요하다.'

 

이마이는 서둘러 육수 솥을 불 위에 올렸다.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서 있던 그는, 솥바닥에서 기포가 떠오르자마자, 다시마를 건져내고 건어물과 버섯을 쏟아 넣었다. 그 순간, 에이코가 부엌 안으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보, 루이가 안 보이네요. 아까까지 할아버지 곁에서 반죽 만드는 거 보고 있었는데… 요즘 얘가 어디로 이렇게 사라지는 거죠?”


식당에서 주방기구를 갖고 놀며 식구들 주변만 맴돌던 루이가 요즘 들어 눈앞에서 종종 사라지는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에이코는 문득 조바심이 났다.


“루이노 키. 루이가 ‘루이노 키’라고 부르는 그곳에 있을 거다.”


지금까지 말이 없던 히데오가 반죽그릇을 냉장고 안에 넣으며 말했다. 생소한 단어에 의아해하면서도 에이코는 그의 말이 어린 손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은 사실일 것임을 믿었다.  


“루이의 나무요? 거기가 어딘데요?”

“뒷산 언덕 위에 어린 떡갈나무 말씀하시는 거죠, 아버지?”


짚이는 데가 있는지 이마이가 거들며 아는 척을 했다.


“맞다, 그게 ‘루이의 나무’다. 요즘 우리 루이가 눈만 뜨면 찾아가는 장소니 기억하고 있거라.”

“저녁 손님들 들이닥치기 전에 애 저녁 먹여야 해요. 여보, 당신이 가서 애 좀 데려와요.”


에이코의 미간에 날 선 주름을 본 이마이는 얼른 우동 육수의 불을 낮추고,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아무리 식당일이 바빠도 그들에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루이를 챙기는 일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내가 다녀오마.”

“아버지가 가시게요?”

“오냐.”


다시 불을 높이고 육수 거품과 건더기를 걷어내기 시작하는 이마이의 얼굴에 엷게 미소가 떠올랐다. 불조절과 시간에 민감하게 맛이 달라지는 육수를 두고 나갔다 오기가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데, 히데오가 대신 간다는 말에 이마이는 다행이다 싶었다. 게다가 내성적이고 숨기 좋아하는 루이 녀석을 다루는 데는 히데오만한 흥정가가 없었다.


히데오가 예상했던 대로 루이는 그곳에 있었다. 몽상가의 눈빛 같은 연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루이의 파란 바지가 얼른거렸다. 히데오는 그 모습을 마음에 새기기라도 하는 듯,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루이가 오랫동안 누리고 가져야 할 것들을 지켜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히데오의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루이는 아직도 부동자세를 하고 있었다. 문득 그 모습이 안쓰러워진 히데오가 성큼성큼 걸으며 루이를 불렀다.


“루이!”


루이는 이미 들킨 줄 모르고,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발끝에 힘을 꼭 준 채, 숨도 쉬지 않고 앉아 있었다.


“루이가 없네! 어디 갔을까? 이 할애비가 우리 루이 주려고 구워놓은 오코노미야키 다 식어 버리겠는데! 그냥 할애비가 먹어야겠네.”

“할아버지! 나 여깄어. 내려갈게요.”


히데오가 몸을 돌려세우며 떠나는 척 하자, 루이는 마음이 다급해져 고사리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거친 나무껍질을 노련하게 옮겨 짚으며 내려왔다. 어린 녀석의 날렵하고 능숙한 움짐임을 보는 히데오의 눈에 안도와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나 배고파요. 빨리 오코노미야키 먹으러 가요!”


히데오가 루이 입맛에 맞춰 구워주는 오코노미야키보다 맛있는 건 이 세상에 없었다. 루이는 노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허기가 급속도로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마음이 다급해졌다.


“할애비가 업고 빨리 뛸까?”

“네!”


히데오의 제안에 루이의 얼굴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업어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저는 다 컸고,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피곤하시니까…….”


히데오의 건강상태가 예전과 달라지고 있음을 민감하게 느낀 이마이와 에이코가 루이에게 당부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루이는 차마 ‘할아버지가 아프니까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단어를 말해버리면, 진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괜찮아. 할아버지 오늘은 안 피곤해. 이리 오렴.”


루이는 할아버지가 내민 등에 얼굴을 묻으며 매달렸다. 익숙한 할아버지의 체취와 온기가 그의 마음에 편안하게 스며들었다. 익숙한 것에만 마음을 여는 루이는 할아버지가 그 누구보다 소중했다. 할아버지가 안 피곤 해서 너무나 다행이다 안도했다.


요즘 많이 컸다 싶더니,  루이 녀석은 제법 묵직했다. 자신의 건강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는 히데오는,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자신이 손주들을 거뜬히 업고 다닐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먹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으로 이룬 가족들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은 그에게 큰 의미고 전부였다. 소중한 가족 곁에 조금만 더 머무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암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병은 오래 가슴속에 품어온 거짓말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오쿠다 집안의 병약한 아들 대신 가짜 히데오 행세를 하며 살아왔으며, 지금까지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발설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관동 대지진 직후 벌어진 학살 현장에서, 어느 한국 여자 시신의 품에서 주워온 아기였다는 걸 알아서 좋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오쿠다 이름을 잘 지켜 이마이와 신이치,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 루이와 쥰이 이 일본 땅에서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갈 근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 오랜 거짓말이 암의 씨앗이 된 것이라 해도 그는 제 근본 출생의 비밀을 죽는 날까지 지키기 위해 암 또한 기꺼이 삼키고 살아갈 속셈이었다.


다행인 것은 노인의 암은 급속도로 퍼지지 않는다. 다만 하루하루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 죽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떨쳐 낼 도리는 없다.


다행히도 첫 손주인 루이와 갓 태어난 아기 쥰, 기적처럼 신비롭고 소중한 이 작은 생명들을 마주 대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에 대한 의식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히데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남은 평생은 모두 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빨리 커서, 다음엔 내가 할아버지 업어 줄게요.”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할아버지는 쉬고, 내가 대신 반죽도 만들고, 요리도 하고,……”


할아버지를 돕겠다는 루이의 아름답고 거창한 계획을 들으며, 히데오는 감당할 수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녀석을 등에 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그는 목구멍까지 내려온 뜨거운 감정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데 할아버지, 내가 여기 숨어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늘 자신을 찾아내고야 마는 할아버지가 신기한지 루이가 물었다.


“할애비는 루이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루이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잘 알고 있지.”

“나도 할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할아버지는 루이하고 쥰을 제일 좋아해, 그쵸?”

“그래. 정확히 맞혔네. 어떻게 알았지?”

“헤헤… 저도 할아버지가 젤 좋으니까요.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 주는 할아버지가 소중한 만큼, 루이는 조바심이 났다. 이마이와 에이코가 할아버지의 건강에 관해 염려하는 대화를 어깨너머로 듣고 난 후부터, 할아버지 오래 살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매일 입안에 맴돌았다.


***


신이치의 아내 교코가 이층에서 쥰과 루이를 재우기로 하고, 이마이, 에이코, 신이치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문을 여니 신선한 맥주와 구수한 음식이 어우러진 특별한 날의 냄새가 와락 풍겼다. 히데오는 오사카 특산물인 도톤보리 맥주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명절 요리 몇 가지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음, 이건 분명 도톤보리 맥주 향인데! 도톤보리는 냄새부터가 달라.”

“아버지,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반가운 사람이 올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마시는 도톤보리 맥주였다. 좋은 예감이 드는 세 사람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실로 오래간 만에, 히데오의 얼굴빛도 밝아 보였다.

 

“여기들 와서 맥주 한 잔씩 하려무나. 신이치는 접시 하나 가져와서, 교코 몫의 음식과 맥주를 가져다 주렴.”


신이치가 2층에 다녀오고, 이마이와 에이코가 맥주 한 컵씩 다 비울 때까지도, 히데오는 입을 열지 않았다. 히데오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듯한 몸짓으로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낡은 상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신이치와 이마이, 에이코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게 뭐예요?”

“이마이가 열어보거라.”


이마이가 일어서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아버지……!”


상자를 덮고 있는 흰 천을 걷어 내다가 이마이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마이가 하는 것을 지켜보던 신이치와 에이코도 상자 안을 들여다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랫동안 모아 온 듯한 색색깔의 지폐가 상자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생 나는 행운아였다. 이 건물과 식당을 조상에게 물려받았고, 물려받은 가업 기술로 평생 돈 걱정 직장 걱정 없이 살았고, 결혼을 못했는데도, 이렇게 너희들을 만나 가족이 되었고, 이젠 아들 손자가 둘이나 생겼다…….”


히데오는 자신이 얼마나 운 좋은 사내였는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사람은 돈이 어디서 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기다리며 열심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가 타고난 행운을 다 물려주고 싶었다."


이마이와 에이코 신이치는 그들을 향한 히데오의 진심을 들으며 가슴 깊숙한 데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건물이 좀 많이 낡았다는 생각은 진작 했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외관 보수공사도 해야 하지만, 우리 가족이 지내는 2층에도 부엌시설도 넣고, 개조를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언젠가 해야 할 공사를 위해 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었지…….”

“아버지, 이게 다 아버지 혼자서 모으신 돈이란 말이에요?”


신이치가 성급한 마음에 끼어들었지만, 히데오는 대답 대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오늘 내가 구청에 갔었다. 리모델링이란 게, 내가 가진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인지도 알고 싶었고, 이 지역 개발 시기에 관해서도 질문할 것이 있어서.”

 “아, 그래서 오전에 외출을 하셨군요. 진작 말씀을 하셨으면…….”


에이코는 시내에 나간 김에 병원에도 들렀으면 좋았을 거란 말을 하려다가, 다 지나간 시간 의미 없지 싶어 말을 얼버무렸다.


“부동산 업자들 말만 믿었다가 낭패를 볼 뻔했더구나. 구청에 가서 리모델링 신청을 하는 전통 목조 건물 주인들에게 무이자 대출과 함께, 정부 보조금이 나오더구나. 오늘 건물 전체 리모델링을 신청하고 계약을 하고 왔다.”

“그럼 리모델링 자금은 대출과 정부보조금으로 해결이 된 것인가요?”

“그렇다. 대출금은 일단은 한 달에 3만 엔씩 10년 상환으로 계약을 했다.”

“한 달에 3만 엔이면, 일 년에 36만 엔, 10년이면 총액이 360만 엔… 아무것도 아니네요. 저희들이 아버지 집에서 그동안 숙식하며 모은 돈으로 금방 갚겠는데요?”

“그래. 너희가 모은 돈에, 내가 모은 이 돈을 합해서, 대출금도 갚고, 너희가 쓰기 편리한 대로 집을 개조하는데도 보태려무나. 역시 우린 운이 좋지 않니? 이번 고비도 이렇게 쉽게 넘기고 우리 가업을 지켜낼 수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 앞으론 대출금도 모두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돈도 충분히 모아두었어요. 이 돈은, 아버지… 아버지 자신을 위해 쓰세요. 그리고 이젠, 식당도 저희들에게 맡기시고요. 아버진 이제 좀 쉬면서 건강도 회복하시고 노후를 편안하게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이마이는 아버지 암치료를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히데오의 잠시 밝아진 얼굴빛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는 없어, 하고 싶은 말을 이리저리 우회했다.


“그래. 이젠 너희들이 식당을 맡으렴. 성실하고 좋은 실력을 가진 너희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걸로 믿는다.”


그동안 리더역할을 해 왔던 히데오 없이 식당을 운영한다는 생각이 쉽게 소화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이마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는 이제 아버지만을 위해서 사세요. 그동안 남을 위해 충분히 사셨어요.”

“이젠 건강을 돌보셔야 해요.”

“아버지 형수님 말이 맞아요. 항암치료 시작하세요. 너무 미루었어요.”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의 신이치는 이마이와 에이코가 차마 꺼낼 수 없어 우회하는 말을 직진으로 몰았다. 그게 지금 히데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고, 하루라도 빨리 의논해야 할 사항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히데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세 사람은 히데오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맥주를 마시며 침묵했다.


“항암치료는 하지 않겠다. 독한 암치료 과정이, 노인의 수명을 더 단축시킬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노인의 암은 전이 속도가 느리다는 이야기야.”


히데오의 말이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완치하려는 시도를 해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마이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히데오 같은 착한 사람이 이런 몹쓸 병을 앓다 죽어가게 둘 수 없었다.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 말씀 이해는 해요. 하지만, 간단한 수술이나 치료로 완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요. 오사카 시내 큰 병원, 아니 일본 최고 암병원 어디든지 찾아가서 다시 한번 더 검사를 받고 큰 병원 의사 의견을 들어봐요, 아버지.”

“그래요, 아버지! 형 말대로 해요.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은 받아봐야죠. 얼마나 진행이 빠른지 물어보고, 완치 방법이 있는지 의사 말을 들어는 봐야죠.”

“제발요, 최선을 다 해봐요. 요즘 암치료 기술도 많이 좋아졌대요."


히데오는 자식들의 간곡한 애원 앞에서,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히데오는 북받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자신이 정한 생각을 정중히 부탁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부탁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겠니? 나는 남은 평생을 아이처럼 걱정 없이 즐거운 시간만 보내고 싶구나. 내가 식당 신경 안 쓰고, 병에 대해서도 잊고, 루이하고 쥰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 주겠니? 그게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


히데오의 간절한 속내를 들으며, 세 사람은 서로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눈빛만 교환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 동안, 식당은 문을 닫았다. 1층공사를 하는 동안엔 2층에서 지내고, 2층 공사를 하는 동안엔 1층에서 난민처럼 지내며 가족들 모두 그 건물을 떠나지 않았다. 히데오가 계획했던 대로, 식당과 외관뿐 아니라, 가족들이 사용하는 2층 가정집도 편리하게 개조하고, 현대식 부엌도 넣었다.


식당 문을 닫은 그 시간 동안, 히데오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부지런히 전수했다. 식당 메뉴에 없는 선조로부터 배운 모든 종류의 음식 레시피까지 빠짐없이 전달했다. 루이도 꼼짝 않고 곁에 서서, 눈을 빛내며 어른들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았다.


식당을 다시 열었고, 이마이는 히데오를 대신해서 리더 역할을 했다. 돈을 들여 고치고 재단장한 카도마쿠 거리엔 확실히 전보다 더 관광객들의 방문이 많아졌고, 그만큼 <오쿠다>도 더 바빠졌다.


히데오가 리모델링에 관한 질문을 하기 위해 구청에 갔을 때, 그는 건축 허가 담당자에게 뒷산 언덕을 밀어내는 공사가 언제 시작될 것인지 물어보았다. 히데오는 그 자리에 대형 주상복합 건물 공사를 맡기로 했던 건축 업체 사장이 거액의 공사대금을 들고 사라진, 전무후무한 큰 횡령 사건이 벌어졌다는 말을 거기서 들었다. 두 달 후에 시작하기로 했던 공사가 무한정 연기된 상황이라고 했다.


떡갈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처럼, 변함없는 든든한 등을 내밀고, 루이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다. 루이의 가족과 이웃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 나무를 ‘루이노 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무척 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루이는 높이 나무를 타고 오르다가 힘이 빠지면, 안락하게 뻗은 굵은 가지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포근히 감싸주는 나뭇잎 지붕 아래서 내려보는 세상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여 주었다. 바람이 속살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옛이야기처럼 재미있었고, 나무껍질의 투박한 감촉은 진실한 친구의 우정처럼 자연스러웠다. 떡갈나무는 수줍음 많고 말 없는 루이를 답답해하지 않고 항상 반겨주고 함께 있어 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나무와 함께 있을 때 그의 마음은 가장 평화로웠고, 즐거웠고, 마음 놓고 믿을 수 있었다.


루이가 나무와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을, 어린 쥰을 품에 안은 히데오가 항상 지켜보고 서 있었다. 매일 소풍 가는 가족처럼 쥰을 업고, 도시락을 싼 가방을 어깨에 메고, 루이 손을 잡고 뒷산 언덕을 오르내리는 히데오의 모습은 동네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히데오와 루이의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오사카 관광산업 개발을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횡령 문제가 정리되었고, 도시개발이라는 야수의 발톱이 날을 세우고 그들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그 날카로운 끝은 루이의 어린 시절 추억들을 잔인하게 할퀴고 지나갔고, 괴물이 지나간 자리에 그의 오랜 나무 친구는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거리, 새로운 가게, 새로운 숙박시설들이 낯선 이국의 풀처럼 돋아났다.


그때쯤, 오래된 사람 히데오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눌려 서서히 기력을 잃어갔다. 병마와 오랜 씨름을 해온 몸이었다. 소풍 가기 딱 좋은 어느 청명한 가을 아침, 루이는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루이… 루이야……”


루이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을까?'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할아버지방으로 건너갔다. 요즘 부쩍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는 쥰이 녀석이, 아침 일찍부터 할아버지를 깨우다 지쳤는지, 할아버지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편안히 누워 있었다.


“할아버지…….”


루이는 이 상황은 말이 되지 않는 오류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쥰과 루이에게 할아버지는 항상 먼저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루이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루이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소년 루이는 가녀린 몸을 떨며 고요하게 오열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누워 있는 몸 위로 푹 쓰러지는가 싶더니, 히데오의 투박하고 차가운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belajatiraihanfahri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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