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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Oct 31. 2023

2. 도시의 시골 쥐들

[소설] 루이의 나무 

히데오가 세상을 떠난 후, 루이는 더욱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뒷산 대신 동네에 놀이터가 생겼지만, 그는 그곳에 가서 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어른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만 생각하는 듯 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숙제를 끝내고 식당으로 내려와, 제 할 일을 찾아 도왔다.


바빠진 식당에는 두 사람의 직원이 더 생겼다. 교토 우토루 마을 출신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손님들 앞에서는 일본어를 썼지만, 부엌에서 자기들끼리 있을 땐, 한국어를 썼다.


왜 교토 사람들이 한국어를 말할까. 왜 오사카 사람이 아닌 교토 사람들을 데려왔을까 이상했지만, 루이는 묻지 않았다.


새로 온 직원들은 루이를 좋아했다. 식당일을 열심히 돕는 루이에게 ‘착한 소년’이라고 했다. 루이도 그들이 싫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분위기가 흥미롭기도 했다. 새로이 일을 배우는 그들 곁엔 루이도 늘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은 키가 크고 어른스러운 루이를 또 한 명의 직원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식당 어른들이 장 보러 나가고 없는 시간엔 직원들은 루이가 원하면 부엌 한 구석에서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보게 도와주기도 했고 루이가 궁금해하는 한국말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마이와 에이코는 루이가 아무 말 없이, 식당일 돕는 데만 전념하는 것이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아직 어린 녀석이 슬프고 힘들다고 떼를 쓸 만도 한데, 어른보다 더 어른처럼 굴고 있으니… 도통 입을 열지 않으니 그 속을 알 수도 없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이마이는 자신이 여전히 히데오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문득 깨닫자, 허전한 마음이 와락 밀려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해 주시던 할아버지도 갑자기 떠나시고, ’루이노 키’도 뛰놀던 언덕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애가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울까요!”


에이코는 아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히데오를 잃은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히데오는 황무지 같은 거친 세상에서, 약자에게 잔인한 완벽주의 사회에서, 상처 입은 새 같은 자신들의 삶을 의지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어버이였고,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그를 잃은 빈자리가 쓸쓸해서 에이코 자신도 어쩔 줄 모르겠는데, 할아버지 헌신적인 사랑을 그토록 누리던 아이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여장부 에이코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에이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슬프면 슬퍼해도 돼.”

“아니요. 절대 울지 않을 거예요. 우리 루이에게 강한 엄마가 되어 줘야 해요.”


속울음을 울면서도 이렇게 강한 척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여자임을 이마이는 이미 잘 알았다. 이마이는 속으로 내내 곱씹고 있던, 신이치가 어젯밤 이마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했던 말을 아내에게 꺼냈다.


“신이치가 쥰과 루이를 데리고 학교 가까운 데로 분가를 하면 어떻겠냐 하는데… 교코가 식당일을 그만두고 애들한테만 신경 쓰는 게 어떨까 하고. 쥰도 요즘 부쩍 떼를 쓰고, 손이 많이 간다고 하고, 지금부턴 루이 학교 생활도 신경 써 줄 사람이 필요하고. 에이코, 당신 생각은 어때?”

“좋은 생각이긴 하네요.”


이 동네에선 중학교가 너무 멀어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루이와 떨어져 지낸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에이코였다. 


에이코는 루이만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영리한 루이가 식당일은 잊고, 잠시라도 여길 떠나 학업에 매진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요. 루이만 좋다면 그렇게 해요.”


성격이 쾌활하고 밝은 교코가 돌봐주면 좋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루이가 마음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에이코는 생각했다.


“루이와 쥰이 같이 있으면 서로 형제처럼 의지가 될 것 같아.”

 “맞아요. 여기 이렇게 내버려 두면, 식당일 돕는다고 대학도 안 가려 할 거예요. 나는 루이가 꼭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훨훨 날았으면 좋겠어…….”


이마이도 에이코와 루이의 장래에 대해 같은 생각이었다. 아마 신이치와 교코도 쥰에 대해 같은 바람을 갖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아이들 앞에서 과거의 어떤 아픈 상처도 결코 내색하지 않으며 살아왔고, 아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루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그를 위해 최선일 거라는 결심이 그들의 가슴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


신이치는 식당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우에혼마치에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를 월세로 얻었다. 좋은 학군으로 알려진 만큼 그곳의 물가는 상당히 비쌌지만, 이마이와 신이치는 아이들을 위해 힘을 모았다. 루이가 곧 진학하게 될 중학교에서 걸어 다닐 수 있을만한 거리였고, 아파트 단지 안에 놀이터시설과 편리한 상가시설이 있어, 신이치가 하루 종일 바쁜 식당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교코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에 좋을 것 같았다.


루이는 이 카도마쿠 거리를 떠나고 싶은지 아닌지 마음이 서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생각을 따라 당분간 우에혼마치에서 작은 아버지 가족과 지내기로 했다. 식당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생각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루이는 이미 알아버렸다. 다만 루이는 히데오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루이가 무엇을 어떻게 하길 바라냐고. 


루이의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쥰 곁에 있어 주자고. 할아버지가 어린 쥰에게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사랑을 자신이 대신 전해주자고.


루이는 우에혼마치에서도 여전히 말이 없는 아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다만 쥰에게만큼은 정말 좋은 형이 되어 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쥰을 데리고 놀이터로 공원으로 데리고 다녔다. 


신이치가 에이코가 챙겨주는 음식과 반찬을 자주 가져왔으므로 집에 음식은 언제나 풍족했지만, 할아버지 음식을 그리워하는 쥰은 반찬 투정을 많이 했다. 루이가  쥰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으니, 부엌을 쓰게 해 달라고 교코에게 부탁했다. 루이는 쥰이 먹고 싶어 하는 히데오의 음식들을 마음에 그리며, 그 맛을 내려고 노력해 보았다. 


면을 좋아하는 쥰을 위해 우동이며 라멘도 끓이고, 쥰이 싫어할만한 재료를 빼고 오코노미야키도 구웠다.

신기하게도 루이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쥰이 먹었다. 오직 루이가 만드는 음식만을 기꺼이 잘 먹었다. 


“할아버지 맛이 난다. 할아버지 맛!”


일곱 살, 어린 동생 쥰은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잠시, 형과 살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금세 다시 깔깔거리는 장난꾸러기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신이치와 교코는 쥰에게 루이가 있어 너무나 고맙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교코는 정성껏 루이의 학교생활을 뒷바라지해 주고, 저녁을 먹고 나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루하루가 순조롭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옆에서 세심하게 돌봐주는 작은 아버지 내외, 루이가 잘 지내기 바라는 마음을 음식에 담에 보내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 사랑과 헌신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 루이였다.


다만 루이 마음속 깊이 묵직하게 들어찬 슬픔이 시시때때로 그를 음습한 밑바닥으로 잡아끌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지독히도 쓸쓸해지는 극한의 외로움이 엄습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렇게 신경을 써 주는 작은 아버지 내외와 천진난만한 어린 쥰 앞에서 그가 아픈 마음을 드러낼 길은 점점 멀어져 갔다. 루이는 감당할 수 없이 걸리적거리는 깊고 어두운 상실감을 무의식의 강 저편으로 힘껏 떠밀어 보내 버렸다. 그리곤, 모두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학업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


게으름 부리는 일 없이 학업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큰 아이들도 쩔쩔매는 산수문제를 척척 푸는 신동으로 유명했던 루이는, 당연한 수순을 밟듯 와세다 공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가족은 물론, 온 마을 사람의 축하와 기대를 업고, 그는 오사카를 떠나 도쿄로 상경했다.  


고향을 떠나 있어도 봄은 어김없이 왔다. 아직 주말에 만날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인 루이의 마음을 녹이며, 친근한 봄볕이 사뿐히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문득 소풍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집을 나서 봄기운이 손짓하는 대로 봄꽃이 만발한 도쿄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루이는 <도쿄 여행 가이드> 책자에서 본 우에노 공원이란 데를 찾아갔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그늘 아래, 연인들이 조각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고, 손을 잡고 호숫가를 걷는, 낭만 가득한 곳이었다.

사람들 틈에서 호숫가를 따라 산책을 하다가, 루이는 미술관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단아한 디자인의 건물에 드리워진,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의 사진과 타이틀이 루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켄지 이시모토 사진전: 오사카 이야기]


고향 이름이 담긴 정감 가는 타이틀과, 자연을 담은 풍경 사진이 도쿄의 빌딩숲에 지친 루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느낌으로 다가와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루이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와 1층 홀을 지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특별 전시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천히 사진작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감상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사진들은 그에게 가슴이 탁 트이는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의 고향이 이렇게 예쁘게 표현될 수 있는 풍경을 가지고 있었구나 생각하며 기분 좋게 관람하던 루이는 한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루이노 키......!'


 <추억>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찢어질 듯 너무 아파와 숨을 쉴 수 없었다. 


멀리서 찍은 풍경이었다. 언덕 위의 떡갈나무 한그루, 나무를 타고 노는 어린 소년의 해맑은 얼굴. 소년을 바라보며 서 있는 마른 몸의 노인. 그 노인의 등에 업혀 잠든 아기.    


낯설디 낯선 곳에서 자기 피부처럼 익숙한 장면을 마주한 순간, 루이의 의식 저편 어딘가에 눌러져 있던, 어린 시절 그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짧은 찰나에 그 한 장의 사진이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가 되어 루이의 영혼 깊숙이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막혔던 혈관이 뚫리면서 고름과 피가 솟구치듯, 숨죽이고 있던 세포들이 깨어나 기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진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수많은 잔상들이 루이의 마음에 영화 장면들처럼 떠올랐다.


늘 자비롭고 너른 품을 내어주던 나무, 지금도 손을 뻗으면 느껴질 듯한 나무껍질의 질감, 스치는 바람결을 따라 코끝에 맴돌던 나무 향기, 루이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다정한 눈빛, 인자한 미소. 그가 먹여주던 음식의 깊고 깊은 맛,……. 


꽁꽁 뭉쳐 두었던 그리움이 슬픔이 눈물이 되고 콧물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루이는 가슴 정 중앙에 총알탄을 맞은 사람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져 앉았다. 


미술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경험 많은 미술관 직원들이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장성한 청년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저렇게 구슬피 흐느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직원 중 한 사람이 다가왔지만,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 루이의 서러운 울음은 어느 누구도 당장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길고 긴 흐느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루이는 다시 마주 다가온 이 깊은 상실의 기억을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밀어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그는 슬픔이, 상실감이, 외로움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의식을 헤엄치고 돌아다니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면의 아픔이 덥수룩한 수염과 마음대로 자란 긴 머리카락이 되어 몸 밖으로 흘러나왔지만, 끊어내지 않고 몸에 그대로 달려있게 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도쿄는 오사카 촌놈에겐 그 정도 고통으론 부족하다는 듯 잔인한 멸시와 소외를 더 얹어 주었다. 


“저 노숙자같이 생긴 녀석은 뭐냐?”

“오카다 루이 몰라? 이번에 공대 수석으로 들어온 오사카 놈이잖아.”

“뭐, 저 냄새나게 생긴 오사카 촌놈이 올해 수석을 했다고?”

“공대 수석이면 전액 장학금도 받을 텐데, 왜 저러고 다녀요? 정말 싫다!”

“이발소 갈 돈도 없고, 와세다의 스타일도 매너도 모르는 오사카 촌놈 새끼. 딱 느낌 오잖아!”

“시골출신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게다가 저런 차림이라니요. 저런 사람과 데이트하고 결혼하면 어떤 수준으로 살게 될지 뻔해요.”

“게다가 집에서 오사카 사투리를 하루 종일 듣는다고 생각해 봐!”

“완전 구려!”

“너희 같이 귀여운 애들에겐 도쿄에서 유복하게 자란 도련님이 어울리지. 오늘 오모테산도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고, 명품점 좀 둘러볼까?”

“어머, 선배, 좋아요! 호호호......”


섞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루이는 들판 위의 어린 떡갈나무처럼 그렇게 홀로 서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 5 년 전, 도쿄 <미키하우스>


루이는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 대학 중간쯤 위치한 <미키하우스>라는 숙소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미키하우스>는 이곳을 운영하는 주인, 하세가와 씨의 디즈니 캐릭터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태어난 이름이었다.


도쿄에서 가장 싼 가격을 자랑하기도 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름도 한몫 톡톡히 하여, 그곳은 장기 투숙하는 외국인 학생들부터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까지, 집 떠난 외로운 청춘들로 늘 북적거렸다. 


루이는 대학 시절 내내,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한 지금까지 여기 <미키하우스>에서만 쭉 지내왔으므로, 이 숙소는 그에게 집처럼 익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 되었고, 뜨내기 손님들은 숙소 사용에 관한 질문에 모든 답을 알고 있는 루이를 종종 숙소 주인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숙소에서 오랜 시간 많은 외국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로, 루이는 영어 회화와 한국어 회화에 꽤 능숙해지고 자신이 생겼다.


루이는 그곳에서 또 한 명의 촌놈, 필립을 만났다. 루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그가 일본 게이오대학 경영학부에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였다. 자신은 프랑스 몽펠리에 출신이며, 프랑스 밖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서 왔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일본의 모든 것을 맛보고 싶은 의욕과 달리, 일본 음식이 아직 혀끝에 생소한 몸의 솔직한 요청에 따라 그는 숙소에서 프랑스 음식을 해 먹으며 익숙함을 갈망하는 향수를 달랬다. 


“루이, 통밀빵이 일본어로 뭐지?”


녀석은 루이를 걸어 다니는 사전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루이, 신주쿠에 치즈 전문점이 있다는데, 혹시 들어본 적 있어?”


루이를 도쿄 탐험 가이드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필립은 제가 원하는 프랑스 음식 재료를 다 찾아낼 때까지 루이를 가만 두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필립이 해대는 노크소리에 지친 루이는, 주말마다 필립과 함께 시내의 식재료 가게들을 모조리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함께 밥 해 먹는 사이가 되었다. 루이는 필립에게 오사카 고향집에서 배운 음식들을, 필립은 루이에게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 음식들을 선보였다.


“오, 맛있어! 해산물 냄새 같은 게 좀 나긴 하는데, 그게 싫지 않아.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고소해. 식감이 바삭한데, 부드러운 느낌도 있고 신기하네. 밀가루로 뭘 어떻게 한 거지?”

“이건 보통 밀가루가 아니거든. 우리 선조의 비법이 담긴 오코노미야키 가루야. 우리 아버지가 직접 각종 해산물과 야채를 동결건조시켜 배합한, 오사카 전통의 맛이지.”

“난 솔직히 일본 음식에서 나는 해산물 냄새 좀 별론데, 네가 만드는 음식은 이상할 정도로 다 맛있어!”

“나도 서양요리는 늘 좀 기름지고, 느끼한 맛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필립 네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어. 배워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좋아, 원하는 거 뭐든 가르쳐 줄게. 넌 ‘모나미’니까.”


루이와 필립은 이상하게 많은 것이 참 비슷했다. <미키하우스>에서 두 사람은 ‘츄바카 브라더스’ 혹은 ‘사자 두 마리’로 통했다. 루이의 길게 기른 머리와 수염도 그랬지만 필립의 마음대로 자란 뻣뻣한 더벅머리도 만만치 않게 원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인종과 국적만 다를 뿐,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가 닮았고, 점점 더 닮아갔다. 


필립이 다니던 대학을 마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도, 그들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서로에게 소포를 보내주기도 했다. 혼자서 견뎌보려고 버티는 사람들에겐, 먼 곳에서 오는 선물이 때로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이었다.


루이와 함께 했던 일본이라는 나라는 필립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일본어를 더 확실하게 익히고 아시아에서 좀 더 견문을 쌓자 생각한 그는 졸업 후 직장을 구해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그때쯤 루이는 대학원에 진학해 있었다. 적성검사 결과가 추천하는 대로 선택했던 산업공학이라는 학문이 꽤 재미있다고 느끼기도 했고, 성실하고 두뇌명석한 루이를 알아본 교수들이 대학원 진학을 여러 차례 권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바쁜 식당 운영 과정을 현장에서 보고 자란 루이에게 효율적인 공장 이론들이 무척이나 현실적인 대안으로 다가왔다. 재료를 찾기 쉽게 잘 정리하고, 공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일하는 사람의 동선을 생각하여 작업장을 디자인하고, 불량품을 최소화하는 순서 체계를 확립하고… 이미 루이의 몸에 깊숙이 배어있는 주제들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원 진학에 뚜렷한 목표나 소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 취직을 하더라도, 좀 더 전문 지식을 쌓은 다음에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시작한 대학원 과정은 학비 면제와 함께 생활비가 조금 나왔다. 덕분에 루이의 형편은 조금 더 나아져 2인 1실에서 독방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때쯤, <미키하우스>에서 가장 오래 머문 터줏대감이자 하세가와 씨의 신임을 독차지하는 친동생 같은 존재가 된 루이는 부엌에서 가까운 방을 배정받고, 부엌 관리와 신입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아 어느 정도의 부수입까지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온 필립은 루이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끝없는 볼키스를 퍼부었다. 


“루이 정말 보고 싶었어! 무엇보다, 내가 너의 손맛을 그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 몰랐어. 프랑스에 있는 일본 식당을 다 돌아다녔는데도 그런 음식 맛은 찾을 수가 없었어.”


루이도 필립이 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차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한 팔로 필립의 목을 꽉 조르며 말했다.


“잘 돌아왔어! 오늘부터 루이표 일본음식을 실컷 먹게 해 줄게.”

“켁…… 후우우 우라! 좋았어! 내일 아침은 내가 크레이프 구워줄게. 몽펠리에 산 크레이프 믹스를 잔뜩 가져왔어.”


필립은 <라 프랑세즈>라는 오모테산도 명품거리에 위치한 프렌치 베이커리에서 홀 매니저 일을 맡게 되었다. 그곳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문난 맛집이었다. 덕분에 그는 하루 종일 일본인 손님을 상대하며 일본어 실력이 점점 늘어갔다. 


일본어가 술술 나온다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일본어만 잘하게 되면 아무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본어를 잘 알아듣게 되니까 더 불행해.”  

“왜 그래? 무슨 소리야?”

“일본 사람들 정말 이해 안 돼! 도무지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직장사람들하고 무슨 일 있었어?”

“화났으면서 겉으로 괜찮다고 말하고. 싫어하면서 칭찬하고. 돌리고 돌려서 말하는 내용을 해석해야 하니 미칠 것 같아.”

“일본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니라, 깍쟁이 같은 도쿄 사람들만 그런 거야.”

“맞아 루이, 넌 다른 일본사람들과 달라. 나에게 진짜 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일본인이야 넌.”

“난 오사카 사람이거든. 오사카 사람 중에서도 카도마쿠 거리 출신이지. 내 고향 사람들은 도쿄 사람들보다 훨씬 솔직하고 인간적이라고!”

“경박하고 콧대만 높은 파리지엥들과 진중하고 남자다운 남프랑스 사람들 같은 차이가 있구나! 우리가 왜 잘 통하는지 이제 알겠어!”


필립은 오사카 사람과 도쿄 사람의 차이를 단박에 이해하고 무릎을 탁 쳤다. 


필립과 루이는 도시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허덕이는 두 마리의 시골 쥐 같았다.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에 어수룩한 성격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는 이도, 마음 주는 이도 없는 도쿄 한가운데서 인정에 목마른 그들은 스스럼없는 감정표현과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서로가 가슴을 축여주는 샘물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함께 하는  <미키하우스>는 답답한 도쿄생활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미키하우스>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취미생활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형편이 전보다 나아진 루이는 제대로 된 조리 도구며 장비를 갖추기 시작했고. 언젠가 자신의 가게를 열기로 마음먹은 필립은 <라 프랑세즈>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고급요리와 베이커리를 집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둘은 2인 1조 요리대회 선수들처럼 부엌에서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들이 함께 차리는 상은 때론 축하였고, 때론 위로였으며, 때론 치료제였다. 훗날 그들은 서로에게 맛을 보여주기 위해 함께 밥 하던 그 시간을 가장 즐거웠던 젊은 날의 순간으로 추억했다.


***


가을학기가 끝나고 자취생들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부터 신년 초까지의 시간은 <미키하우스>가 가장 조용한 때였다. <미키하우스>의 주인인 하세가와 씨는 매년 이 시기에 도쿄를 떠나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곳엔 꿈과 환상의 세계 <디즈니 월드>가 있었다. 하세가와 씨의 꿈과 행복 또한 거기에 있었다. <디즈니 월드>의 시간이 끝나면, 그는 그곳에서 찍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디즈니 캐릭터로 무장하고 행복에 겨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미키하우스> 복도에 전시해 놓고, 매일 사진을 보고 추억을 음미하며 다음 휴가까지 기다리는 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해 겨울은 필립도 루이도 고향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미키하우스>에 남아 있었다. 필립은 자기 가게 창업이라는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돈을 모으는 중이었고, 루이는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논문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상황이었다. 1년 동안 일본어 연수를 와 있던 마크라는 영국친구도 곧 귀국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그들과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세 사람은 유난히 추운 그 연말의 시간을 밥심으로라도 이겨보자는 듯, 매일 저녁 함께 밥을 해 먹었다. 특히 필립은 크리스마스 명절 분위기를 내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 동네 문구점에서 작은 플라스틱 트리와 오너먼트를 사서 장식도 하였고, 그 아래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부쳐 준 선물도 쌓아 두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었다. 루이가 금방 구운 오코노미야키의 노릇노릇 고소한 향이, 필립이 만든 푹 익은 토마토 스튜의 구수한 향과 어울려 온 집에 퍼지고 있던 시간. 마지막으로 마크가 부드럽게 잘 익은 푸짐한 감자요리를 오븐에서 막 꺼내는 찰나에 누군가 문을 열고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여대생인가 싶은 젊은 여자 두 사람이었다.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 모양인지, 두 사람의 어깨에 하얀 모래알 같은 눈송이들이 붙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의 볼은 매서운 겨울바람에 뺨을 맞기라도 한 듯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다. 


자그마한 몸 라인을 드러내는 검정 코트를 야무지게 여며 입은 포니테일을 한 쪽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다부진 목소리로 자신들을 소개하고 예약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은혜, 제 친구는 이나무라고 합니다. 여기 <미키하우스>의 2인 1실에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저희 둘이 묵는 것으로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왔는데요.”


다행히 은혜라는 이름의 다부진 검정 코트 여자가 영어를 제법 했다. 오사카 식당 직원들 틈에서, <미키하우스>의 한국인 유학생들 틈에서 한국어에 계속 노출되었던 루이는 한국어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 했지만, 필립과 마크가 함께 있는 이 상황에선, 영어를 하는 쪽이 훨씬 의사소통이 자연스럽고 원활할 것이었다. 


루이는 잠시 잊고 있었던 하세가와 씨의 부탁이 퍼뜩 생각났다. 크리스마스에 도착하는 손님들이 있을 거라고 했었다. 도쿄 시내를 통틀어 가장 값이 싼 방에 묵으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려는 가난한 연인들이리라 그는 짐작했었다. 


그 예상을 뒤집은 한국 여자들의 등장에 잠시 멍해진 루이는, 은혜의 똑소리 나는 소개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 열쇠를 가져와 방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루이는 ‘나무’라는 이름의 긴 머리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스치듯 마주친 그 짧은 찰나에, 가슴을 파고드는 몹시 기이하고 강렬한 느낌에 루이는 멈칫했다. 그녀의 눈. 그 눈빛이 너무나 익숙하고 가까운 느낌으로 그의 마음을 벌컥 열고 내면 한가운데로 진입하는 듯 느껴졌다. 아는 사람인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싶어 그녀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향한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저 하늘 끝 우주로 떠올랐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았다. 영혼이 잠시 육체를 초월해 허공을 떠도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정적의 공간에서 이상할 정도로 가깝게 느껴지는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와 자신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곧 비가 쏟아져 내릴 듯한 그녀의 슬픈 눈망울이 마음속 비밀문을 여는 열쇠가 된 것처럼 루이의 무의식을 파고 들어가, 어떤 장면 하나를 불러왔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백일몽이 시작되었다. 오래전 제 가슴속에 묻은 친구, '루이노 키', 루이의 나무가 나타났다. 시간 태엽을 뒤로 감은 것처럼, 낯선 인간들의 공격에 쓰러져 죽은 나무가 점점 살아났다. 다시 살아난 나무가 뿜어내는 생명의 기운이 점점 강해졌다. 잠시라도 살아나 죽기 전 하지 못했던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나무가 힘껏 뻗어 올린 가지 끝에 돋아난 아주 작은 떨림 하나.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주 작고 연한 잎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 작은 생명이 처음 보는 세상을 마주하고 파르르 떨었다. 그 미세한 떨림이 나비의 가냘픈 날갯짓으로 날아올라, 루이의 온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 떨고 있는 것은 루이 자신이었다. 루이의 마음을 장악한 그 떨림은 점점 더 격한 감정의 회오리가 되어 세차게 루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제발이지 누가 좀 넘어지지 않게 꽉 잡아주었으면 싶었다. 


“나무야!”


은혜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듣고서야, 루이는 그 이상한 꿈에서 퍼뜩 깨어났다. 바로 그 순간, 미동도 없이 마주 보고 서 있던 그는, 빛을 잃고 소멸하는 별처럼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쓰러진 쪽은 루이가 아니라 그와 눈이 마주쳤던 나무였다.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kanen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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