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루이의 나무
나무는 죽고 싶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진짜 죽음이 넘실넘실 눈앞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느꼈다. 고층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도, 약국 앞을 지나갈 때도 죽음의 유혹이 차가운 뱀처럼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어 휘감았다.
그토록 죽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
나무 자신도 의아했다. 엄마라고 부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남이 되어 떠나갔을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못 먹는 술을 먹고 몇 날 며칠을 슬픔과 상실감으로 피를 토할지언정 죽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첫사랑에 실패한 게 뭐 큰 대수라고 몸을 던져 삶을 버리고 싶을 만큼 좌절하는 것일까. 나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나무와 진욱은 단짝 캠퍼스 커플이었다. 모든 것을 같이 했고, 언제나 같이 있었다. 나무의 할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도 진욱이 아버지처럼 오빠처럼 곁에 있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나무의 텅 빈 세계에 진욱이 가득 밀려 들어와 든든히 채웠다.
나무는 진욱이 정말 많이 좋았다. 매일 같이 있는 것이 좋았고, 모든 것에 관해 말할 사람이 있어 좋았고,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그의 이름만 불러도 좋았다. 진욱이 곁에 있는 한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진욱은 그녀에게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진욱은 어땠을까? 나무와 매일 하루종일 붙어 지내는 것이 좋았을까? 나무의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을까? 그는 나무에 대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했을까?
진욱을 잘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생각해 보면 나무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무가 알던 진욱은 실체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 낸 첫사랑의 환상, 환영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을 비추고 감싸는 보호막이 되어달라고 일방적으로 떼를 쓰고 있었던 걸까.
나무는 진욱과의 사이에 틈이 자라고 있음을, 그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이미 느꼈으면서도 못 본 척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분리의 틈은 크게 자라났고, 어느 날 갑자기 그 균열이 검고 깊은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욱에게서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건 그의 여름 제대를 몇 달 앞두고 있던 무렵부터였다. 그리고 여름 내내 연락이 없었다. 여름 열기가 식은 마음엔 찬바람이 스산했지만, 그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부여잡고 나무는 가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가을 학기가 시작되고도 진욱은 캠퍼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대학 마지막 학기여서, 졸업 전 마무리 해야 할 일이 산 넘어 산이었음에도, 나무는 엄마 잃은 젖먹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늦가을 바람이 매섭게 불어 치던 11월 어느 늦은 밤,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던 진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무는 전화를 받자마자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달려 나갔다. 진욱은 나무와 은혜가 살던 자취방 근처 가로등이 훤히 비추던 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진욱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 나무의 마음은 찬바람을 이기고 싹을 틔우려는 간절한 봄기운처럼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휘몰아치는 눈폭풍처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말로 한줄기 지켜온 나무의 기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나무야, 미안해. 난 정말 나쁜 놈이야.”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난 널 믿어.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난 알아.”
나무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의 말을 막아 보려 했다.
“나무야, 그러지 마. 너,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잖아. 내 마음 너한테서 떠난 거 너도 이미 느끼잖아.”
나무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그 한 마디, 마음이 떠났다는 그 잔인한 말을 진욱의 입으로 들으면서, 그녀는 귀를 막아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게 실수로 잘못 나온 말이기를, 결코 진심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진욱아, 왜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너한테 뭘 잘못해서 화가 난 거니? 뭔지 몰라도 내가 사과할게. 내가 고칠게”
나무는 진욱의 발아래 꿇어앉았다. 거칠고 차디찬 시멘트 바닥 기운이 맨살을 찌르며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진욱을 잃는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무야! 너 정말… 사람 말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나무가 꿇어앉는 것을 본 진욱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본 사람처럼 기함하며 돌아섰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문처럼 느껴지는 진욱의 등을 마주한 나무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를 기다리며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나무는 진욱의 등을 향해 울부짖었다.
“진욱아! 내가 너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니? 네가 연락을 끊었던 긴 시간 동안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넌 짐작도 못할 거야... 너 나 좋아하잖아. 사랑하잖아, 아니야? 네가 분명히 말했잖아. 언제까지나 날 사랑할 거고, 지켜줄 거라고... 난 네 말 다 믿었단 말이야... 그거 다 거짓말이니?”
마지막 질문을 하는 나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무의 볼을 타고 원망 가득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무의 절규에 대한 연쇄반응처럼 진욱의 진심이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혈관에서 뿜어 나오는 피처럼 거세게 터져 나왔다.
“진심이었어. 널 지켜주고 싶었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던 건 진심이었다고. 널 좋아했고, 사랑했어! 나도 내 마음이 이렇게 변해 버릴 줄 몰랐던 걸 어떡해… 부모님도 안 계시고, 할머니까지 잃은 가여운 너에게 정말 이런 말까진 안 하고 떠나고 싶었는데… 네가 날 보내주지 않으니 이젠 어쩔 수 없어. 내 진짜 속마음 다 말해 줄 테니까 잘 들어.”
무슨 말을 안 하려고 했다는 걸까. 나무는 그 말을 듣기가 무서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나 솔직히 그동안 너무 버거웠어. 네 상황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네가 내게 기대하는 만큼, 네가 날 필요로 하는 만큼, 내가 다 감당을 못해…….”
진욱은 자신이 느꼈던 부담감을 몸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나도 몰랐었어. 내가 그렇게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그런데 군대에서 매일 네 편지 받아보면서 깨달았어. 너한텐 정말 내가 전부라는 걸. 그걸 깨닫는 순간 누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어. 너하고 캠퍼스 커플로 늘 붙어 다녔지. 군대에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그 시간이 그립지가 않았어. 솔직히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무는 여전히 고개를 떨어뜨린 채 진욱의 말을 듣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피곤해하는 표정이 그려졌다.
“내 잘못도 커. 너무 오랫동안,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들을 책임지려고 애쓰고 있었어. 너를 만족시키고 싶은 욕심에, 내 마음이 지쳐가고 있는 것도 몰랐지. 나도 내가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 제대하고도 너에게 연락하기 싫고, 전화도 받기 싫고, 학교에 복학하기도 싫은 내 모습. 이건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아니야, 안 그래? 미안하다, 이것밖에 안 돼서……”
깨진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운 그의 말들이 나무의 여린 가슴에 후드득 떨어져 박혔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죽을 것 같이 가슴이 쓰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진욱을 보낼 수는 없었다. 무언가 해 보아야 했다. 나무는 온 힘을 다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진욱아, 내게 진작 말해줄 수 없었니? 네 마음 담은 편지라도 한 통 해줄 수 있었잖아. 나는 너를 위해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제발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줄 수 없겠니?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나무는 마지막 힘을 짜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한쪽 손을 잡고 그를 타이르듯, 사정하듯 매달렸다. 하지만 나무의 그 간절함이, 진욱의 가슴에 더 큰 불을 지른 듯했다.
“못 알아듣겠어? 그게 정상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그 사람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그런 극단적인 관계가 싫다고! 부담스럽다고! 내가 없어도 넌 잘 살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알겠어? 네가 나 없이 못 산다고 하는 말, 너의 그 말 들을 때마다 목 졸리는 느낌이라고, 알아?”
진욱은 나무의 두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곤, 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말이 안 통해서 미쳐버리겠다는 듯 펄펄 날뛰었다. 진욱의 무자비한 말들과, 11월 밤의 살을 에는 냉기가 보호막 하나 걸치지 못한 나무의 뼛속까지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나무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떠난 내 마음 이제 나도 어떻게 안 돼. 나한테 매달리지 마. 매달려 봤자 너만 더 상처받아. 나 너한테 이러는 거 정말 마음 아파. 우리 제발 그만하자. 날 놓아줘. 나무야, 제발.......”
진욱이 화를 내는 것보다 제발 헤어져 달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모습이 나무의 심장을 더 아프게 찢어발겼다. 더 오랫동안 힘들었고 상처받은 건 진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무는 다리 힘이 탁 풀리며 그 자리에서 휘청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절망감에 가슴을 두드리며 오열하는 나무를 보고 진욱은 정말 진절머리 난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교문을 걷어찼다.
****
나무는 그날부터 꼬박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죽음의 유혹이 날마다 나무를 불러내기 시작했던 건 그때 심하게 앓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 해 겨울 칼바람은 메두사의 눈처럼 모든 것을 굳혀버릴 기세였다. 나무는 진욱이 군대 가기 전 자취하던 동네를 찾아가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가 자취하던 방은 늘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 그는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사실 그를 다시 만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게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다만, 그를 향한 원망인지 미안함인지 미움인지 집착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뒤얽힌 감정상태를 견딜 수 없었으므로, 잔학한 겨울 칼바람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그 모든 감정을 얼려주기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무는 매일 새벽녘에 몸이 꽁꽁 언 채로 방에 돌아왔다. 방바닥 위에 몸을 널브러뜨린 채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있으면,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차디 찬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며 적셨다. 아침에야 겨우 설풋 잠이 드는 것 같았지만, 그 마저도 푹 잠들지 못하는 눈치였다. 깨어나면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다, 문득 밖으로 뛰쳐나가선 새벽동이 틀 때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은혜가 강제로 떠먹이지 않으면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은혜는 그런 그녀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무에게 부모님이 계셨다면,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이 병나 죽게 생겼으나, 병원 의사에게 데려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모든 상황의 근원 당사자 진욱을 잡아서 끌고 올 수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무를 도와줄 사람이 은혜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는 일본으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구 반대편 어디 뜨뜻한 곳에 가서 나무의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고 싶었지만, 지금 형편으론 일본여행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해외여행 옵션이었다.
“나무야, 나랑 일본 가자."
“뭔 소리야?"
은혜의 뜬금없는 소리에 나무는 제대로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진욱이 그놈, 가겠다는 놈 그냥 보내 버려라. 넌 예쁘고 젊고 능력 있잖아. 얼마든지 진욱이보다 더 멋지고 좋은 사람 충분히 만날 수 있어."
‘더 멋지고 좋은 사람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잃었는데. 진욱이는 세상에 단 한 명인데.’
나무의 무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은혜는 신나게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너 옛날에 크리스마스 때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가 보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도쿄의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예쁘대. 우리 도쿄를 시작으로 그 꿈을 이루자고.”
은혜는 나무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아주 오래전 어떤 부족함이나 상실감을 알지 못했을 때 나무가 천진난만한 꿈을 꾸며 지껄인 소리를 그녀는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딘가로 떠나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든든한 가족이 지겹도록 곁에 있어 줄 때만 감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난 싫어. 갈려면 너 혼자 가. 난 여행 갈 기운도 여유도 없어.”
“모든 걸 이 언니한테 맡겨. 내가 다 예약하고 준비할게. 나 지난여름에 고3 과외만 다섯 개 뛰고 완전 부자됐잖아. 결정적으로, 너랑 같이 가는 거 아니면 정현이가 안된대. ”
“군대 가 있는 사람이 그런 것도 감시하냐?”
“어휴, 말도 마. 군대 가더니 더 쪼잔해졌어. 별 거 아닌 거에도 의심이 그냥, 의처증 환자 수준이라니까.”
정현은 군대 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은혜의 남자친구였다. 나무가 진욱과 가까워졌던 비슷한 시기에 캠퍼스 커플이 된 두 사람은 정현이 군대를 가고 제대를 앞두고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무는 가슴에 부는 찬바람이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동갑내기답게 티격태격 동등하고 조화롭고 편안해 보이는 그들의 관계가 뼈에 사무치게 부러웠다.
“너한테 그런 부담 주기 싫어. 그 돈 모아놨다가, 나중에 정현 제대하면 둘이 같이 가.”
나무는 이제 가까운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은혜가 아니었다.
“안돼. 졸업 전에 너하고 꼭 다녀오고 싶어. 우리 둘만의 졸업여행! 선배언니가 그러는데 일본에 하루 삼만 원이면 잘 수 있는 괜찮은 숙박집이 있대. 내가 저렴하고 맛있는 초밥집, 라멘집도 다 알아 놨어.”
비행기삯을 제하고 나면 거지여행을 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은혜는 큰 소리를 땅땅 쳤다.
“은혜야, 넌 나같이 심하게 가진 거 없어서 볼 때마다 안쓰럽고 도와줘야 할 것 같은 친구 부담스럽지 않니?… 진욱이가 나 챙겨주는 일이 부담스러웠대… 너도 이렇게 날 위해 애쓰다가 지쳐버릴까 봐 겁이 나.”
“난 너 없었으면 울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벌써 따라 죽었어.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1초도 생각 안 하고, 즉석에서 바로 터져 나오는 은혜의 극단적인 대답에 나무는 실소를 터뜨렸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적이 있었다는 말에서 나무는 따끈한 우유 한 잔 같은 위안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만 웃어라, 친구야. 행복할 자격이 있는 내 소중한 친구야.’
정말 오랜만에 나무가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은혜는 그 웃음이 나무에게 더 머물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는 은혜가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그녀를 다시 세상에 정 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영혼의 단짝, 태초부터 같이 있었고 영원히 함께 같이 갈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친구였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절망하고 힘들어하는 나무를 다시 세상에 정 붙이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꼭 도와주고 싶었다.
예전에 정현이 컴퓨터를 조립해서 은혜에게 선물해 주면서 그랬다.
- 뭐가 잘 안 될 땐, 일단 ‘리부팅’부터 해봐. 리부팅이 뭐냐고? 그것도 몰라? 너 진짜 컴퓨터 고자구나. 괜찮아, 내가 컴퓨터 도사니까, 내가 네 평생 컴퓨터 문제를 다 해결해 줄게. 이렇게 껐다가 다시 켜는 걸 컴퓨터 용어로 ‘리부팅’이라고 해. 컴퓨터가 느려지고 문제가 있다 싶으면 뭐부터 하라고? 그렇지, 리부팅!
말도 안 통하는 정말 새로운 세상에 다녀오면 나무의 머릿 속도 ‘리부팅’ 되지 않을까? 새로 전원이 들어온 컴퓨터처럼 다시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까? 은혜는 진심으로 친구의 회복을 바랐다.
***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일본어의 물결이 처음 해외 여행길에 나선 무방비한 나무와 은혜를 정면으로 덮쳐왔다. 한국이라는 익숙한 테두리를 벗어난 그 느낌은 조각배를 타고 너른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선 듯 망연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무야, 정신 차려! 최고의 지성인이 둘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먼저 정신을 차린 은혜가 나무를 이끌고 귀가 웅웅 울리도록 혼을 빼며 북적거리는 공항을 빠져나왔다. 도쿄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을 탄 후에야 나무는 정신이 들었다.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한문이 가득한 신문을 책 만하게 접어서 읽고 있었다. 지하철 칸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팔을 겨드랑이에 딱 붙인 조신한 자세로 책을 읽거나 게임기나 전화기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말을 해 줄 때까지 자각하지 못한다. 나무도 진욱이 말을 해 줄 때까지 몰랐다.
- 나는 오랫동안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들을 책임지려고 애쓰고 있었어.
진욱의 말을 듣고 서야, 나무는 자신이 진욱에게 지운 책임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 내 책임이 무엇이고 타인의 책임이 무엇인지.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입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들은 이렇게 지하철 안에서 보이는 태도처럼, 가족 관계, 연인관계 안에서도 서로 피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책임과 상대의 책임을 잘 구분하고 살아가는 걸까? 상념에 빠져있던 나무는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으로 한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본의 하늘과 나무가 휙휙 지나갔다.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전광판의 역이름과 자신이 수첩에 적어 온 이름을 비교하느라 고개를 아래위로 바쁘게 움직이더니, 은혜는 마침내 찾아야 할 것을 찾은 모양이었다.
“야 , 우리 여기서 내려야 돼.”
긴 이름의 지하철역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뿌연 청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떡가루 같은 눈송이들이 아담하고 고즈넉한 마을 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나무와 은혜는 넋을 잃고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화가 샤갈은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은 어느 시인의 상상 속에 존재했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그런 곳이 진짜 있다면, 이런 풍경일 것 같았다.
여기서 죽어도 좋겠다는 익숙한 죽음의 유혹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무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풍경 속으로 하염없이 홀린 듯 빠져들고 있는 나무를 은혜가 불러 멈췄다.
“나무야, 예쁜 풍경 아쉽지만 그만 보고 가자.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해. 빨리 움직이자."
나무는 은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내내 자기감정에만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비용부터 여행계획까지 다 준비하고, 하루종일 이렇게 자신을 신경 쓰고 애쓰는 은혜 옆에서, 자신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돌봐주기만 해야 할 아이 같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자, 제발......'
나무와 은혜는 역 앞에 정면으로 보이는 동네 슈퍼 같은 큰 잡화 가게로 들어갔다. 은혜가 잡화 가게 주인에게 수첩의 주소를 보여주자 그는 손가락으로 가게 뒤로 난 골목길을 가리켰다.
골목길엔 일반 가정집들이 늘어서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당도 없는 좁은 집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깔끔했고 가로등이 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작은 공간을 활용해서 예쁘게 꾸며 놓은 화단마다 하얗게 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미키하우스>라는 숙박집은 그 골목길 끝에 있었다. 아기자기한 가정집들과 어울리지 않는 공장 같은 분위기의 회색건물이었다. 그 뒤로는 하천이 흘렀다. 방금 지나왔던 동네 분위기와 다르게, 여기 사람이 살까 싶은 삭막한 느낌이 으스스했다.
계단을 올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이지 않는 가려진 곳에, 거짓말처럼 안으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마치 잠겨있을 것만 같은 불안한 쇠 문고리를 은혜가 잡아당겨 보았다. 알리바바의 주문이 통한 듯 문이 활짝 열리며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방들이 늘어선 구조가 이어졌다. 텅 빈 느낌의 공간 어딘가에서, 음식냄새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 소리를 따라 복도를 조금 걸어가자 왼쪽으로 제법 큰 부엌공간이 펼쳐졌다. 서양남자 둘과 동양남자 하나. 그 세 사람의 조화롭고 분주한 움직임이 풍성한 저녁식탁을 차려내고 있었다.
은혜가 나서서 그들에게 영어로 인사를 하고, 자신들의 예약 상황을 설명하였다. 나무는 미동도 없이 은혜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긴 머리의 동양남자가 뭔가 기억났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 입을 여는 것 같다가, 무심코 그의 시선이 나무를 향하더니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무도 인사를 하고 소개를 해야 하는데,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 낯설고 시린 겨울바람에 덜덜 떨다가, 오븐과 뜨거운 음식들이 열기를 뿜어내는 따뜻한 공간으로 들어오자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무의 몸이 갑작스러운 온도차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 눈앞이 빙글거리기 시작하더니, 저도 모르게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무야, 얘 왜 이래? 정신 좀 차려봐!”
멍하게 나무를 바라보고만 있던 루이는, 주저앉는 친구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터져 나온 은혜의 반비명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괜찮으세요?”
루이가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나무의 머리부터 받쳤다. 그녀의 머리가 뒤로 살짝 젖혀지면서 긴 머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생명줄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낯빛이 파리하다 못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구급차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일본은 구급대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저녁상을 차리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필립과 마크가 놀라 소리치며, 허겁지겁 구급대 번호를 찾았다.
은혜와 외국인 남자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무는 목구멍에 맴도는 ‘괜찮다’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었다.
몇 초쯤 지났을까? 시야를 가리던 뿌연 막이 사라졌다. 타지에서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은혜를 더 이상 걱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해서였을까?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나무가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 괜찮아요. 구급차 부르지 말아요…….”
크게 외쳤다고 생각한 말이 겨우 모기소리처럼 가늘게 새어 나왔을 뿐이었지만, 말문이 트이자 나무는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 듯 안도했다. 나무가 의식을 잃을까 봐 초조하게 타들어가던 은혜의 심정이 한숨이 되어 터져 나왔다.
“어휴, 너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을 때 알아봤다. 내가 뭐라도 좀 제대로 된 음식을 사 올 게.”
“난 괜찮아. 그냥, 가져온 컵라면 먹자.”
“너 몸이 이런데 라면 같은 거 먹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걱정하지 마. 따끈한 라면 먹고, 오늘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주저앉아 있던 나무는 입술을 깨물며 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곤 루이를 향해 물었다.
“저희 방이 어디예요?”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네, 정말 괜찮아요. 추운데 있다 따뜻한 데 들어와서 그냥 조금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아, 네... 일단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루이는 기다리라는 말을 뒤로하고 잽싸게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세가와 씨가 떠나던 날, 미리 열쇠를 찾아서 방 호수 메모와 함께 책상 서랍에 잘 넣어 둔 게 기억이 났다.
루이가 나무와 은혜를 예약한 방으로 안내하고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방으로 걸어가면서 은혜가 루이에게 이것저것을 묻는 동안, 나무는 아무 말 없이 타박타박 따라 걷기만 했다.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빛은 여전히 지나치게 창백해 보였다.
여행이 많이 힘들었던 걸까?
“한국분들이신가 봐요. 지금 공항에서 오는 길인가요? ”
“네. 한국에서 점심 먹고 비행기 탔는데, 나리타 공항에 내려서 수속 밟고, 지하철 타고, 내려서 걸어 걸어 지금 막 도착하는 길이에요. 걸어오면서 봤는데, 동네가 참 예쁘더라고요……”
루이는 은혜가 참 붙임성이 좋은 사람 같다고 느꼈다. 처음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라고 대답하고 어색해할 상황을 재미있고 친근한 대화로 이끌었다.
“저는 오카다 루이입니다. 머무시는 동안 궁금한 점이 있거나, 필요하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저쪽 부엌 건너편 205호실이 제 방입니다”
루이는 아까 그들이 컵라면을 먹자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던 내용을 대충 알아들은 참이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저기요, 저희가 가져온 컵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네, 부엌에 뜨거운 물을 끓일 수 있는 전기 포트도 있고, 정수기에서도 뜨거운 물이 나옵니다."
“아, 그렇군요! 여기 시설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들을 방으로 데려다주고 돌아서면서, 루이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음이 쉽게 되돌려지지도 않았다. 낯을 가리는 편인 루이가 하루 이틀 머물다 갈 낯선 여행객들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초대를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 무언가가 강하게 루이의 걸음을 돌이켰다. 루이는 데려다준 방으로 다시 가서 노크를 했다. 은혜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루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제안을 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가 지금 크리스마스 저녁을 먹으려는 참인데, 함께 하시겠어요?”
루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은혜의 얼굴에 오늘 밤 궁전에서 열리는 무도 파티에 깜짝 초대받은 아가씨가 지었을 법한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들어오면서 맡았던 구수한 음식 냄새에 위장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던 참이었다. 은혜는 루이의 초대가 너무나 반가웠지만 일단 나무의 상태부터 살펴야 했다. 방 안에 먼저 들어간 나무는 멍하니 초점을 흐린 채 짐가방을 의지하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실은 이 친구가 하루 종일 거의 먹은 것이 없어서, 라면을 먹이기가 좀 그래요.”
“죽을 드시는 게 좋겠는데요.”
“그죠, 그런데, 죽을 끓일 재료를 사 와야 하는데…….”
“쌀은 있는데…….”
쌀이 있다는 소리에 은혜의 귀가 번쩍 뜨였다.
“쌀만 있으면 충분해요.”
“따라오세요.”
은혜는 자리를 펴서 나무를 눕히곤, 루이를 따라나섰다. 루이는 은혜에게 작은 냄비와, 쌀, 그릇을 꺼내주고, 필요한 대로 야채와, 조미료를 쓸 수 있도록 세세히 알려 주었다. 은혜는 야채를 잘게 다져 야채죽을 끓였다. 넉살이 좋은 은혜는 죽이 끓는 동안, 아까 본 유럽 청년들과 통성명을 끝내고,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 사람은 아플 때 이렇게 쌀을 푹 끓여 죽을 만들어 먹어요. 여기에 추가하는 재료에 따라 죽의 이름이 정해져요. 이렇게 야채를 다져 넣으면 야채죽, 여기다 우유와 잣을 넣으면 잣죽이라고 하고, 달걀을 넣으면 달걀죽이라고 해요…….”
은혜는 죽을 끓이면서, 마치 한국을 대표하는 죽 홍보대사인양, 한국의 죽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저도 어릴 때 배탈이 나면, 엄마가 이렇게 쌀죽을 끓여 주는 걸 먹어 봤어요."
루이는 은혜가 쌀죽 끓이는 걸 유심히 지켜보면서 어릴 때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제 거의 다 됐어요. 쟁반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친구 분도 괜찮으시면 함께 나와서 저희와 저녁 함께 하면 어때요?”
루이는 캐비닛을 열어 쟁반을 찾아 꺼내주며, 다시 한번 그들을 초대했다.
“은혜, 사양하지 말고 와서 저녁 같이 먹어요. 음식은 충분해요.”
필립도 초대를 거들었다.
“안 그래도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나서 미칠 것 같아요. 저녁 초대 저에겐 너무나 반갑고 감사한 일인데, 일단 제 친구 상태를 좀 보고 올게요.”
은혜는 죽그릇을 쟁반에 담아 가는 대신 테이블에 놓고, 나무에게로 갔다. 루이는 산타 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 같은 기대감을 느끼며, 냉장고에서 매실 장아찌와 마를 꺼내 손 빠르게 채를 썰었다. 순식간에, 윤기 도는 먹음직스러운 밑반찬 두 개가 만들어졌다.
다행히 나무는 쉬면서 기력을 조금 회복했는지, 은혜를 따라 방을 나왔다. 발목까지 내려오던 긴 에이라인 코트를 벗어낸 그녀의 몸은 몹시 가냘파 보였다. 지지대를 엮어 받쳐 주어야 할 아주 어린 묘목 같은 느낌이었다.
“아깐 실례가 많았어요. 많이 놀라셨죠?”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제.”
“우리 이름 소개 다시 할까요? 저는 마크예요. 영국, 루트랜드에서 왔고, 게이오 대학에서 어학연수 중이에요."
“저는 필립.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왔어요. 저도 게이오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했었고, 지난 5월에 몽펠리에 제1 대학을 졸업하고, <라 프랑세즈>라는 베이커리 카페에 매니저로 취직해서 다시 일본으로 왔어요. 지금 일한 지 한 6개월쯤 됐어요.”
“저는 아까 인사했죠. 루이입니다. 오사카에서 왔고, 와세다 대학 대학원생이에요.”
이국적인 사람 이름, 도시 이름, 대학이름들은 은혜와 나무에게 몹시 생소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저는 은혜예요. 영어로 그레이스라는 뜻이에요. 한국 대학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레이스! 영국에 그레이스라는 이름 가진 사람 아주 많아요.”
“ 정말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진 이름이에요!”
필립과 마크는 은혜가 그레이스라고 하자, 한층 더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저는 나무입니다. 은혜와 같은 대학이고, 신문방송학 전공이에요.”
“나무는 무슨 뜻이에요?”
“영어로 트리요. 태명이었는데, 그대로 이름으로 지으셨대요.”
“이름이 특이하고 예쁘네요.”
“나무, 어감도 좋고 부르기도 쉽네요.”
나무의 이름과 그 뜻을 듣는 순간, 루이는 또다시 그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 마음에 떠오르는 말, 루이노 키. 루이의 나무. 절대 잊힐 것 같지 않은 이름, 나무. 이름이 ‘나무’인 게 ‘루이노 키’와 무슨 상관이냐고 이성적인 생각이 끼어들기도 전에, 그녀의 이름 두 글자가 루이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루이는 나무와 은혜를 만찬이 차려진 식탁의 빈자리로 안내한 후, 나무 앞엔 죽과 반찬을, 은혜 앞엔 원하는 만큼 음식을 덜어 먹을 수 있도록 빈 접시와 수프 보울을 놓아주었다. 필립이 일어나, 두 사람에게 샴페인잔을 건네고,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소리가 경쾌한 핑크빛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마크는 은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인 음식을 집을 수 있도록 그릇을 들어 도와주었다. 은혜의 얼굴에 큰 액수의 용돈을 받을 때나 떠오르는 대만족의 웃음이 번졌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저녁, 이렇게 자상한 매너남들 - 외모는 내 타입이 아닐지라도 -의 서비스를 받으며, 맛있는 요리를 먹게 되다니! 이게 꿈이니 생시니? 나무야, 암만 생각해도 일본에 넘 잘 왔지!’
표정만 보아도 은혜가 나무의 귀에 대고 외치고 싶은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 사이 샴페인까지 한 모금 쭉 들이킨 은혜는 그야말로 싱글벙글이었다. 60년대 히피처럼 머리와 수염이 산발인 남자 자취생 셋 또한 우두커니 앉아 서로를 마주 볼 때와는 사뭇 다르게, 여자 손님 둘이 더해지니, 갓 따른 맥주잔에 거품이 차오르는 듯 고조된 흥분감으로 상당히 들떠있었다.
벌써 제법 샴페인을 주거니 받거니 한 필립과 마크는 기분이 최상인 듯, 끊임없이 킬킬대며 떠들었다. 은혜는 한참을 그들과 같이 떠들다가, 문득 나무가 먹는 죽 옆에 놓인 정갈한 반찬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장 밖에 곁들일 것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었다.
“와, 이 반찬들 정말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루이… 상이 만들었어요?”
은혜는 수염도 덥수룩하고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루이의 이름을 바로 부르지 못하고. 일본식 존경어인 ‘상’을 이름에 붙였다.
“네. 빨간 건 ‘우메보시’고 하얀 건 ‘나가이모’예요. 죽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같이 드렸어요.”
루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혜의 포크 쥔 손이 반찬그릇 위로 서슴없이 진격했다.
“나무야, 나 맛만 좀 볼게.”
은혜는 반찬을 조금씩 제 접시에 덜어 맛을 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아, 깔끔하고 고소한 이 맛, 완전 맛나요! 나무야, 이건 매실 장아찌고, 이건 마를 채 썰어 김가루와 고추냉이로 간을 한 것 같아. 네 혈액순환과 소화를 돕는 음식들이니까 먹을 수 있으면 다 먹어.”
한의학과 졸업반인 은혜는 때때로 걸어 다니는 동의보감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 루이는 은혜의 한국말 설명이 정확하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무는 천천히 죽과 반찬을 먹기 시작했다.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도, 딱 필요한 타이밍에 톡톡 튀어 오르며 입맛을 돋우는 깔끔한 반찬 맛이 은혜가 만든 슴슴한 야채죽과 무척 잘 어울렸다. 입맛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전혀 시장기를 못 느꼈는데도 죽과 반찬이 술술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무는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집밥을 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뜬금없이 어린 시절 엄마라고 불렀던 그 여자가 떠올라 나무는 마음이 미어졌다. 무척이나 다정해서 진짜 엄마 같았던 만큼, 그렇게 철석같이 믿게 만들었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마음을 아프게 찢는 더 원망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처음 보는 자신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이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아픈 상처들을 떠올리긴 싫었으므로, 나무는 죽이 불러오는 기억들을 애써 외면하고 이 자리 이 분위기에 집중하려 했다.
모두가 저녁식사를 마친 후, 고향 명절 분위기를 제대로 내고 싶은 필립이 제안한 대로, 형광등을 끄고 크고 작은 양초들을 모아 촛불을 밝혔다. 은은한 촛불빛이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빛은 모두의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했으며, 테이블 위의 후식과 와인,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그 아래 프랑스와 영국에서 부쳐온 초콜릿과 선물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더욱 풍성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촛불빛 아래서 나무도 혈색이 좀 더 나아 보였다. 처음에 무척이나 지쳐 보였던 나무는 음식을 먹고 이제 조금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비록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간혹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미소 짓기도 했다.
"일본에 관광 왔어요?"
"대학생이에요?"
"얼마나 오래 있을 거예요?"
필립과 마크는 앞을 다투어 은혜와 나무에게 질문을 해댔다.
“저희들은 대학 졸업반이에요. 사회생활 시작하기 전에 좀 휴식도 할 겸, 전부터 도쿄의 크리스마스가 아주 예쁘다는 말을 듣고 와 보고 싶기도 해서 저희들만의 졸업여행을 하려고 왔어요. 일주일 머물 거예요.”
“일본에 와 보니까 어때요?"
일본에 방금 도착한 사람들에게 너무 성급한 질문임을 루이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깨달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다행히 은혜는 공항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그 짧은 순간의 경험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은혜가 루이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나무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려 깜박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을 바라보았다. 창 밖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곳이 일본이라는 것도, 이들이 처음 만나는 타인이라는 것도 의식되지 않았다. 나무에게 이곳은 삶이 바닥을 치는 풍랑가운데 우연히 찾은 도피처였다. 그녀는 이곳이 시인이 꾸는 꿈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이게 깨어나지 않을 꿈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현실을 잊고 누군가의 완벽하게 행복한 꿈에 함께 젖어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문 이미지 설명: <Over the Town, 1918> by Marc Chagall,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Dimensions: 45 x 56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