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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09. 2023

5.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소설] 루이의 나무 

나무와 은혜는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미키하우스>에 놀러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해 가을학기를 엉망으로 보낸 탓에 졸업 논문의 마무리가 늦어져서 다시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고, 남보다 늦어진 사회진출은 나무를 그만큼 더 간절하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듬해 가을쯤엔, 나무와 은혜는 둘 다 취업에 성공하였고, 형편이 나아진 그들은 자취하던 방을 떠나 옥수동 변두리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해 겨울, 나무는 새로 시작한 직장생활이 몰고 오는 연말회식자리마다 쫓아다니느라, 은혜는 제대한 정현과 밀린 데이트를 하느라, 일본에서 만난 친구들과 했던 약속은 까맣게 잊은 채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정신없이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매일 밥을 차려주었던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있었다. 망각의 힘이 힘들었던 그 시간 전체를 덮어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일본 여행 이후 나무는 더 이상 진욱을 기다리지도 찾지도 않았다. 깨끗이 잊어주려고 노력했고, 그런 나무의 의지를 온 우주가 도왔다.


그렇다고 그 시간의 흔적이 다 깡그리 잊힌 건 아니었다. 그 겨울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같던 도쿄 주택가. 크리스마스 저녁을 밝히던 영롱한 불빛들, 숱 많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부엌에 서서 음식을 하던 그 사람의 뒷모습과 깊은 감칠맛이 나던 그의 음식들, 그리고 한국에 가서도 밥을 잘 먹으라고 말하던 그의 따뜻한 진심만은 잊히지 않고, 나무의 마음을 내내 보살펴 주는 온기가 되어주었다.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한 마음이 함께 북받쳐 올랐고, 뱃속 어딘가가 따뜻해져 오는 포만감을 느꼈다.


생면부지의 남을 돌보기 위해 정성껏 밥을 지어주었던 그 마음. 그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음식들이 자신의 얼어붙은 마음을 마술처럼 녹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무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지만, 꿈속에선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땐 식탁 앞에 앉아 자신을 위해 밥을 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나무는 그 밥에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을 보았다. 그 사랑이 죽어가던 그녀를 살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는 나무를 구하기 위해 잠시 잠깐 다녀갔던 천사는 아니었을까.


그 사람과의 만남은 짧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나무의 삶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 항상 곁에 있어 줄 사람, 자신의 결핍감을 채워 줄 사람을 좇았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꿋꿋이 일구어 가는 사람이 되고, 언젠가 그처럼 남에게 베풀어 주는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능력 있는 어른이 되자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타지에서 스스로를 야무지게 돌보며 열심히 살아가던 그의 모습과 그가 베풀어 주었던 음식이 그녀에게 강하고 단단한 마음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사람이 만들어 주었던 음식 중 하나의 이름이 ‘오코노미야키’라는 것이 나무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레시피를 찾아 집에서 만들어 보기도 하고,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식당을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오코노미야키를 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먹었던 그 맛은 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오코노미야키를 다시 먹어 볼 수 있다면…….'


왜 그 마지막 밤에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나무는 오랫동안 아쉬워했다.


한 2년 전이었던가. 일본에 여행 가서 나무의 조언대로 <미키하우스>에 머물렀다는 대학 후배에게 긴 머리를 이렇게 묶은 젊은 일본 남자를 보았느냐고, 키가 큰 프랑스 남자 만나지 못했냐고 물었지만 후배는 그런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


졸업논문을 지도해 주던 교수는 나무의 근면한 태도와 꼼꼼한 일처리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였다. 지도 교수는 졸업 논문 마무리가 끝난 후에도 나무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주고 알바 일자리까지 추천해 주었다.


“나무 양, 내 친구가 최근에 차린 방송제작회사가 있는데. 지금 일손이 필요한 상황이야. 일주일에 며칠만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도와줄 수 있겠나? 나무 양이 거기서 잘하면 졸업 후 정직원으로 채용할 의사도 있다고 하네만.”


<M 컨설팅>이라 불리는 작은 규모의 회사였다. 애매모호한 이름의 이 회사는 과거 방송국 피디로 일하면서 오랜 경력과 넓은 인맥을 야무지게 챙겨 나온 사장이 새롭게 차린 사업체였다. <M 컨설팅>의 M은 사장 자신의 이름 ‘만수’의 영문 이니셜이었다.


‘드라마 제작회사’라고 타이틀을 내세우는 이 회사가 맡고 있는 일은 서커스 어릿광대 역할만큼이나 복잡 다양했다. 공중파 방송편성권을 쥐고 흔드는 방송국이라는 절대자의 눈에 들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물밑 작업을 해야 했고, 광고주와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투자자를 설득해야 했다.


특히 작가와 배우를 섭외하고 촬영작업 내내 그들이 방송국 연출자들과 부드럽게 협력할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를 줄타기하는 일은 거의 외줄 타기 곡예에 가까운 일이었다.


촬영이 끝나도 광대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방송국, 시청자, 광고주, 연기자, 작가가 만족할 만한 요소들이 꽉꽉 들어 찬 방송으로 잘 편집될 수 있도록 방송국 편집자들을 고3 아들인양 돌보며 마지막까지 관리책임을 다해야 했다.


이러한 회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쉴 새 없이 뿜어내는 두뇌와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닐 수 있는 체력은 기본에다, 다양한 사람들과 합을 맞추는 소통 능력과 눈치까지 고루 갖춘 젊은 직원이 필요했다.


<M 컨설팅> 사장 박만수가 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딱히 자신이 찾고 있던 타입의 직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쪽 일을 하기에 그녀는 다소 숫기가 없어 보였다. 안쓰러워 보이는 가녀린 체구도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추천도 있고 해서 나무를 알바생으로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가진 장점들이 드러났다. 나무의 장점 중 가장 박만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면은 그녀가 일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파이터 같은 담대하고 끈질긴 면이 있었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던 나무가, 거기서부터 홀로 꿋꿋이 살아나가기로 결심한 나무가 두려울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성격에 맞든 맞지 않든 해야 하는 것이면 해내었다. 비빌 언덕은커녕 직계 가족 한 사람도 없는 그녀에게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은 기본이었고, 그 자각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 만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으로 피어났다. 그 근성은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돌보고 매달리는 책임감으로 발휘되었다.


회사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위에서 누르는 사람 없고 자유로운 회사같이 보였지만 일단 드라마 제작이 시작되거나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집에 가서 발 뻗고 잘 시간도 충분치 않은 노예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나무는 숨 쉴 틈 없는 일과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도전 속에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 회사의 이러한 생리를 견디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것과 반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의 중심부로 점점 걸어 들어간 나무는 회사에서 사장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직원이 되었다.


말단 보조로 시작했던 나무는 졸업과 동시에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리’를 거쳐 얼마 전 ‘기획 피디’라는 직함을 따냈다.


그 대단한 '피디'라는 이름 밑에 딸려오는 업무의 양은 상상 이상이었다. 각종 방송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을 비롯해서 작가, 배우, 촬영지 섭외 및 촬영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캐스팅하고 준비하는 일, 방송이 끝날 때까지 관리하는 일 등 업무의 양이 늘 산 너머 산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기획 피디’ 나무가 맡은 여러 가지 역할 중에서 그녀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것은 계약이라는 분야였다. 회사의 성격상 배우와, 작가, 방송국, 각종 해외배급사들과 다양한 계약 관계를 맺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나무의 두뇌는 회사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계약서의 법적 근거와 자료를 꼼꼼히 분석 조사하고 빈틈없는 계약 서류를 작성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이젠 회사 계약 자리에 나무가 없는 것을 사장 박만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계약 관련 일이 나무의 장기라면 나무가 가장 힘들어하는 일은 시작된 방송촬영이 제 때 끝날 때까지 작가와 배우들과 촬영감독 사이를 중재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사장 박만수는 나무에게 몹시 부족한, 사람 사이의 일을 유들유들하게 잘 풀어나가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회사는 인력이며 장비며 부족한 구멍이 뻥뻥 뚫려 몹시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적은 자원의 뛰어난 '합'으로 여기까지 용케 잘 굴러왔다 할 수 있었다.


"사람 관계란 게 결정적인 순간에 내 편들어줄 내 사람 만들어 가는 일이거든. 근데 저 사람이 언제 봤다고 내 편이 그냥 되어 줄리가 없겠지. 내가 먼저 상대에게 '난 당신 편이오'하고 적극적으로 치대고 들어가 보여줘야 하는 거야......."

 

사장은 종종 자신의 인관관계론을 펼치곤 했다. 사장의 장광설이 시작되면 모두들 '또 시작이야' 지겹다는 얼굴을 했지만, 목마른 나무는 그런 가르침을 듣는 것이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녀는 일을 하면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 일터에서 갈등을 풀어가는 요령에 대해서 사장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을 잃는 느낌, 사람이 떠나가는 느낌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나무에게, 사람을 불러 모으고 인맥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력의 성장과 발전을 넘어서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정서적 충족감을 주었다. 사람들을 쩍쩍 달라붙게 만드는 초강력 본드처럼 붙임성 강한 사장 박만수를 상사로 둔 것 자체가 나무에겐 큰 안정감이었으므로, 때때로 힘든 일이 있었어도 그녀는 이 회사를 떠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무가 드라마 제작회사에서 일하게 된 보람을 일터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 오면 피디 친구의 입만 쳐다보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는 졸업 후 청담동 사모님들 사이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한의사로 자리를 잡았다. 제 일에 있어서는 빈틈없이 똑 부러지는 은혜였지만, 나무가 들려주는 연예인 이야기 앞에서는 입이 헤벌어진 채 실실 웃으며 ‘오빠’를 외치는 덕후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드라마는 무슨 스토리야?”

“주인공은 누구 생각하고 있어?”

“진짜 임준검 봤어? 잘생겼어? 키 커? 성격 어때? 화면에서 볼 때처럼 그렇게 선하고 맑은 느낌이야?”


배우들을 봐도 또 한 사람의 인간관계 숙제라는 느낌 외 별 감흥 없는 나무와 달리,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은혜는 카메라 이면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듣고 싶어 했다. 특히 요즘은 임준검이라는 배우에 꽂혀서 입만 열면 그 배우 이야기였다.


“준검 씨는 진짜 성격이 착한 것 같아. 주변 사람들도 세심하게 잘 챙겨주고.”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드라마 촬영장에서 보는 배우들의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만 전해 주어도 은혜는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워했다. 나무는 친구 은혜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게 된 것이 이 직종을 택한 보람으로 느껴졌다. 연예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은혜만은 아니었다.


“내 생각엔 여자 주인공 역에 설지가 딱인 것 같아. 청순 글래머 느낌 너무 매력적이잖아.”


은혜가 초절정 꽃미남 배우들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는 만큼, 그녀의 오랜 연인인 정현도 걸그룹 아이돌에 대한 관심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끼어들곤 했다.


“맨날 설지, 설지, 걔가 그렇게 이쁘냐? 연기도 성격도 별로더만.”

“설지 연기가 별로면 임준검은 발연기거든! 야, 첨부터 연기 잘하는 사람 어딨냐? 하면서 느는 거지. 만나 보지도 않은 애 성격을 어떻게 안다고? 얼굴 예쁜 애들 중에 성격 나쁜 애 없잖아, 그지, 나무야?”

“흥, 칫, 뿡!”

“우리 은혜 봐. 예쁜 만큼 성격도 한 매력 하잖아.”

“오호호호. 그런 결론이었어?”


대학을 졸업하고도 5년이 넘도록, 은혜와 정현은 변함없는 친구로 나무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들의 닭살 애정 행각이 더 이상 나무의 가슴에 시린 바람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나무와 정현과 은혜는 모든 것을 함께 넘어 온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현과 은혜가 나무에 대해서 염려하는 부분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너무 일 밖에 모르는 일 중독자라는 점. 둘째, 첫사랑 이후 5년째 남자 보기를 돌 같이 하고 있다는 점.


나무의 외로운 처지를 충분히 품어줄 수 있는 남자, 나무가 믿고 사랑해도 괜찮을 남자만 나타나면, 두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텐데, 도대체 그런 괜찮은 남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은혜와 정현의 요즘 최대 관심사였다. 두 사람은 머지않은 시기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전에 나무가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한 연애 하는 걸 꼭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도저히 나무를 두고 맘 편히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미키하우스>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일은 만남과 헤어짐이다. 그런 곳에 오래 살다 보면 서로에게 깊은 정을 주지 않고 적당히 어울려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떠난 사람들 빈자리와 마주하는 일은 루이에게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함께 자취하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에 무뎌졌다.


나무가 떠난 자리도 익숙해질 줄 았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간 후에, 루이는 오래도록 안타까워해야 했다. 처음 만난 타인이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남기고 간 영향력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던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가깝게 느껴지던 그 느낌을 거듭 곱씹으며 고민해야 했다. 나무가 주고 간 초의 향은 곧 사라졌지만, 루이가 받아 들었던 그녀의 깊이 감사해하던 마음과, 생명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절박해 보이던 눈망울은 그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았다.


그녀를 잃어버린 느낌은 ‘루이노 키’가 있었던 옛 추억을 떠올릴 때 느끼는 아스라한 상실감을 닮아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세상이 판이하게 변해버렸다. <미키하우스>가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낯선 외로움이 삶의 온갖 빈 틈을 파고들었다.


앞으로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연락처 교환할까요? 왜 이런 질문 하나 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가게 했을까?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망설이고 있었던 자신이, 그 미련한 원칙주의자 고집이 너무 미웠다. 그 마지막 밤에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만 했었던지 곱씹을수록 입에선 쓴 맛이 났다. 자신의 지나쳤던 신중함, 부족했던 용기가 남기는 뒷맛이었다.


루이는 논문을 마무리하는 일에 집중해 보려 애를 썼다. 다행히 논리적인 학문의 세계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기에 딱 좋았다. 루이는 그렇게 <미키하우스> 작은 방에서 효과적인 공장시스템을 논하는 책과 논문에 둘러싸여 공붓벌레 대학원생 시간을 마무리했다.


3월 졸업식을 위해, 오사카의 식구들이 총 출동했다. 이마이와 에이코, 그리고 작은아버지 내외와 중학교를 막 졸업한 사촌 쥰이 루이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올라왔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아들의 몰골을 본 에이코는, 도쿄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바로 역 근처의 이발소에서 루이를 깨끗이 이발시키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쥰과 루이를 데려갔다.  


토호쿠 백화점 남성 전문 매장의 고급스럽고 중후한 디자인들은 루이가 입고 간 낡은 체크무늬 남방 차림을 경멸하며 어딜 감히 들어왔냐고 꾸짖는 듯했다. 그런 근엄한 매장 인테리어 분위기와 달리, 카네시로 타케시(금성무)의 팬이었다는 매장 점원 아주머니는 굉장히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루이를 대해주었다.


“야, 정말 멋져요, 멋져! 카네시로 타케시의 20대를 다시 보는 것 같아요!"

“이번에 제 아들이 와세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큰 회사에 취직했어요!"

“그 유명한 와세다라니! 인물만 좋은 게 아니라 실력도 대단하네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 취직 정말 축하해요!!”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잘생겼다, 멋지다를 남발하며 자기가 동경하는 스타를 더욱 빛낼 옷을 골라주듯 정성을 다해 루이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주었다. 덕분에 비싼 가격표의 동그라미를 세어가며 주눅 들고 망설이고 할 틈이 없었다. 점원 아주머니가 발 빠른 다람쥐처럼 종종거리는 사이 루이에게 꼭 맞추어 디자인한 듯 잘 어울리는 정장을 몇 벌이나 고를 수 있었다.


“어머니, 한 벌이면 충분해요. 직장에 취직했으니까 또 필요하면 제가 돈 벌어서 살게요.”

“돈을 쓸 때는 써야 하는 거야. 일터에서 입을 옷을 여러 벌 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래도 여긴 너무 비싸요.”

“옷이 이렇게 멋진 것에 비해 하나도 안 비싸구나. 아주머니, 여기 이 아이도 정장 하나 골라 주세요.”

“어머나! 동생인가 봐요. 도련님도 형을 닮아 아주 잘 생겼네! 몇 학년?”

“이번에 중학교 졸업했어요.”


제가 우러러보는 형을 닮았다고 하자 쥰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주머니가 골라 준 정장을 입은 쥰의 모습이 중학교를 갓 졸업한 녀석치곤 날렵하고 멋져 보이긴 했다.


“우리 쥰이 이렇게 입히니까 의젓하네! 연예인 톱스타 저리 가라 잘생겼네!”

“큰어머니, 여기 옷 진짜 비싼데요!”


쥰도 자신이 입고 있는 옷소매 끝에 달린 가격표를 들여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학교 졸업선물이다. 잘 입으렴. 여기 이 옷들 다 주세요. 얼마죠?"


오사카 여장부라는 말을 듣는 당찬 어머니는 루이와 쥰의 걱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계산대에 척척 걸어가 지갑 속에서 돈뭉치를 턱 꺼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탁 내려놓곤, 미련 없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루이의 모습은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필립이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루이가 정장 차림 그대로 부모님과 친척을 이끌고 <미키하우스>로 갔을 때, 필립은 그를 보고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루이의 친척들 중 하나겠거니 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루이에게 전화 좀 해 볼게요.”


전화를 걸던 필립은 멀끔하게 잘생긴 남자에게서 루이 것과 같은 전화소리가 나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나야 나. 못 알아보겠어?”


모두 깔깔 웃었다.


“네가 얼마나 형편없는 몰골로 살았으면, 대체 이발하고 새 옷 한 벌 입었다고, 너랑 같이 사는 친구조차 널 못 알아보니?”


에이코가 눈을 흘기며 루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진짜, 너야, 루이? 네가 원래 이렇게 잘생긴 남자였다니! 나 지금 여자라면 너한테 반할 것 같아. 루이쨩!”


필립은 루이의 코앞으로 다가와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장난스럽게 그의 품에 안기는 흉내를 냈다.


“장난 그만 치고, 오사카 가족들 소개해 줄게. 여긴 우리 부모님,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동생 쥰.”

“처음 뵙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우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본사람처럼 일본어를 아주 잘하시네.”

“우리 아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동안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반 일본인이 다 된 필립이 공손한 일본어로 격식을 갖추어 인사하자, 루이의 부모와 작은 아버지 내외도 그의 일본어를 칭찬하며 따뜻하게 인사했다.


“네가 쥰이구나. 루이한테 편지 보내는 애가 너 맞지?”

“네. 맞아요. 지난 크리스마스 때 초콜릿 보내주신 형님이 맞지요?”

“맞아.”


절친 루이의 가족이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몇 년째 일본인 고객을 상대하며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필립은 루이의 가족들이 졸업식에 잘 참석하고 내려갈 때까지, 오랜만에 상봉한 제가족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졸업식이 끝나고 루이는 <미키하우스>를 정리했다. 몇 년 동안 동거동락하던 필립과 헤어지는 것이 많이 섭섭했지만, 크리스마스엔 꼭 <미키하우스>에서 만나자는 약속으로 서로가 위로를 삼았다.


루이는 예정대로 4월 중순, 미국 워싱턴주로 떠났다. 에버그린 스테이트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 워싱턴주는 미대륙 서북부에 위치한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첫 임무는 에버렛이라는 도시에 소재하는 보잉사 공장에서 멘토인 야마나카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겜바 카이젠, 린 메뉴펙쳐링 6 시그마, 같은 닥터 헤밍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프로덕션 시스템 이론을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야마나카상은 컨설턴트로서의 드레스 코드와 분위기 말투까지 미국 대기업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상품으로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 코드와 자신만만하고 냉철한 분석가의 분위기를 고수하는 사이, 루이는 외모도, 분위기도 확연히 변해갔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것이 변했어도, 크리스마스 시즌은 어김없이 왔다. 더군다나 미국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11월 추수감사절이 끝나고부터 새해가 밝아올 때까지 한 달여 내내 길게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시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고, 늘 바쁘게 돌아가던 공장들도 움직임이 느려지는 때였다.


번화가뿐 아니라, 주택가에도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그 이국의 불빛들이 그날의 기억들을 환히 되살아나게 했다. 크리스마스에 새겨진 나무의 기억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루이는 휴가를 내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필립과의 크리스마스 저녁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루이는 그 이듬해 크리스마스도 <미키하우스>에서 필립과 함께 보냈다. <미키하우스>에 머무는 마음 한 편에는,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또다시 찾아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미키하우스>에서 필립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루이가 두 번째 <미키하우스>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모두가 숙소를 떠나 유난히 조용하던 어느 저녁에, 필립은 곧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통보하였다.


 "루이, 나 곧 한국으로 가. 나 한국에서 은경과 함께 베이커리 카페를 열거야.”


필립이 직장에서 만난 한국인 인턴 제빵사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는 어디론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이 일본을 떠난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은 갑자기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 것처럼 루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정말? 언제 그런 계획을 다 세운 거야? 은경 씨와는 그럼…….”

“은경에게 지난 주말에 프러포즈했어! "


필립이 얼굴을 붉히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랬구나. 축하해 필립! 엄청난 소식이네. 언제 떠나? 언제 어디서 결혼식을 할 건데? 설마 나 없이 몰래 할 건 아니지?”


루이는 자꾸만 가라앉으려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진심을 다해 필립을 축하해 주었다.


“일단 은경의 인턴쉽이 끝나는 다음 달 말에 여기 짐들 정리하고 한국에 며칠 들렀다가 몽펠리에로 갈 거야. 거기서 3개월 정도 은경과 함께 남프랑스와 스페인 북부 일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각종 커피, 베이커리, 음식들을 맛보고 오려고. 결혼식은 차차로 생각해 봐야지. 만약에 결혼식을 한국이나 프랑스에서 하게 되어도 와 줄래?”

“당연하지! 네가 지구 어디에서 결혼식을 해도 난 가서 축하해 줄 거야! 소중한 ‘모나미’잖아!”

“고마워, 정말! 너에게 꼭 연락할게. 그리고 한국에 카페를 열고 자리 잡히면, 꼭 놀러 와. 재워주고 먹여주고 한국 구경도 시켜 줄 테니까. 혹시 알아, 너도 한국 여자 만나서 한국에서 살게 될지?”

“그럴게. 꼭 찾아갈게.”


필립과 그 아내는 꿈꾸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몽펠리에>라는 결실을 이루었다. 일본의 성공적인 카페에서 제빵 기술과 상술을 익히고, 오랜 시간 고객서비스를 경험했던 것은 이들에게 큰 장사 밑천이 되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루이는 어느새 회사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핵심 컨설턴트로 성장하였다. 명석한 두뇌와 실무 능력, 근면 성실한 태도, 의도치 않게 훈련된 한국어 실력에, 몇 년간의 미국생활이 세련시킨 영어 실력까지 갖춘 수석 컨설턴트였다.


우연찮게 루이의 요리실력도 한몫을 발휘했다. 야마나카상을 비롯한 회사 중역들은 부와 명예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었다. 미국에서 먹는 음식들이 도무지 입맛에 맞지 않았다. 바쁜 스케줄에 쫓겨 다니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음식은 기껏해야 햄버거나 샌드위치가 다였다. 야마나카상을 수행하는 동안 루이가 매일 다양하게 싸 온 도시락이 각광을 받으면서, 루이의 요리실력이 유명해졌다. 덕분에 회사 중역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며, 자유롭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신임을 쌓고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성장하고 있던 것은 루이뿐만이 아니었다. 루이가 소속된 SGC 회사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 불경기 속에 침체 위기를 맞고 있던 미국 대기업들을 살려 낸 SGC의 명성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 산업시스템 개혁의 필요를 느끼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새로운 고객 명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기회가 왔다. 미래형 자동차 산업의 선두주자 테슬라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의 신개념 자동차 기업 <태성자동차>가 SGC에 컨설팅을 요청했다. 루이는 웬만하면 미국에 자리 잡고 싶어 하는 컨설턴트들의 기호를 거슬러,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기업이기도 했고, 한국이 루이를 끌어당기는 힘을 거부할 수 없기도 했다.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무언가가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다. 


루이가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연락했을 때 필립은 프랑스 축구팀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역전 골을 넣기라도 한 것처럼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후라! 루이 대환영이야!”


한국에서 <카페 몽펠리에>도 자리를 잡고 한국어와 한국문화에도 제법 익숙해져 여유가 좀 생기던 차에 필립은 옛 친구가 그곳으로 온다는 소식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한국에 오면 보여줄 데도 많고 할 이야기도 정말 많아.”

“한국에서 여행 많이 했어?”

“많이는 못 갔어. 여행은 일본에서 정말 많이 했었지. 한국에선 내 가게를 돌봐야 하니까 훌쩍 버리고 떠날 수가 없어.”


필립은 일본에서 <라 프랑세즈>가 쉬는 공휴일이나 명절이 되면 도쿄를 벗어나 홋카이도, 오사카, 오키나와, 삿포로 등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경험을 기록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타고난 탐험가이기도 했다.


루이는 필립을 보면서 온 세상을 기세 좋게 말달리며 정복하고 싶어 했던 그의 조상 나폴레옹의 정신이랄까, 그 용맹하고 주도적인 피가 대대손손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동경심마저 들었다. 아마도 필립은 그 타고난 개척 정신으로  한국에서의 삶도 잘 헤쳐가고 있으리라 루이는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었다. 루이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가 무척 그리웠다.


“그리웠어, 필립! 한국에서 자주 보자.”

“당연하지. 내가 인천공항으로 마중 나갈게. 정확한 도착시간이 언제야?”

“아니야, 난 파견 회사에서 마중 나오기로 했고, 회사로 바로 들어가서 회의하고 저녁엔 사장단과 회식 스케줄까지 짜여 있어.”

“말만 들어도 피곤한데. 네가 한국에 와도 얼굴 보기는 쉽지 않을 거란 소리로 들린다.”

“너무 자주 찾아온다고 귀찮아 하지나 마.”

“그럴 리가, 모나미!”

“역시, 모나미!”




대문 이미지 출처: https://www.bokksu.com/blogs/news/what-is-okonomiy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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