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루이의 나무
“맞아, 그 사람이야. 완전 놀랍지?
“진짜야? 나 소개해 달란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의외로, 나무가 루이에 대해 꽤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현은 이때를 놓칠세라,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니까. 나도 이해가 안 가. 외모부터 레벨이 다르잖아, 레벨이! 눈이 삐었다는 말이 언제 쓰는 말인지 확실히 알겠어…….”
“퍽”
나무의 주먹이 정현의 등을 강타했다.
'나이스 샷. 그렇지 나무야. 그렇게 박차고 너의 껍질을 깨고 나와. 세상 기준, 조건, 비교의식 같은 거 이렇게 주먹으로 깨부수라구!'
정현이 만족한 얼굴로 할리우드 액션을 요란하게 취하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마침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은혜가 집안으로 들어서다 혼자 생쇼를 하며 자빠지는 정현을 발견했다.
“얘 왜 이래?”
정현은 순식간에 심파 연기로 돌아서며 은혜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흑흑…, 방금 내가 멋진 왕자님과 소개팅 시켜줄까 그랬더니 신데렐라가 날 이렇게 패고 있어."
나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정현을 향해 눈을 홉떴다.
“소개팅? 야, 아서라. 쟤가 소개팅할 애냐?”
“내가 어떤 대어를 물어왔는데! 이게 그렇고 그런 흔한 소개팅 기회가 아니라고.”
“오! 상대가 누구시길래, 우리 정현이가 이렇게 호들갑일까?”
뭔가 재밌는 일을 직감한 은혜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정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그 임준검! 아악! 말도 안 돼!”
“내 말이. 그런 인물이 나무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 순간 나무의 심장에 ‘반했다’는 단어가 수십 개의 반딧불이 되어 반짝이며 날아들었다. 정현이 아끼고 있던 말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와버렸다. 그걸 놓칠 은혜가 아니었다.
“첫눈에 반했대? 정말? 진짜? 너무 로맨틱하다! 근데 그렇게 반할 여자가 없었나? 취향이 좀…….”
“이것들이! 너희들 진짜 웃긴다! 뭐가 말도 안 되는데? 취향이 뭐?”
나무는 살짝 설렜던 마음이 괜스레 무안해져, 친구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견해에 심사가 뒤틀린 척 두 사람에게 따지고 들었다.
“혹시, 그 남자… 부업으로 다단계 하는 거 아냐? 일본 건강보조제 같은 거 팔려고 접근하는 거 아닐까? 아님, 어디가 부실한가? 그래서 자존감이 확 떨어져서 좀 못한 여자를 찾는 거 아냐?”
은혜 또한 그날 루이가 나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뭔가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두 사람이 연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나무를 자극하는 말들이 되어 나왔다.
“야! 김은혜! 죽을래? 내가 뭣이 못헌디?”
은혜에게 약이 바짝 오른 나무가 결국 은혜의 멱살을 잡았다. 두 여자의 몸싸움을 라이브쇼로 관람하던 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불쌍한 루이형, 와서 이 꼴을 직접 봐야 하는데… 니들은 몰라. 오카다 루이 씨가 우리 산업 시스템 세계에서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지. 와세다 대학, 대학원 수석 졸업에, 전 세계 대기업 고객 리스트가 줄 서서 기다리는, 한 달에 몇 천만 원 버는 수석 컨설턴트야! 실력 뛰어나지, 한국말도 잘하지, 인물 출중하지, 우리 회사 딸 있는 간부들이 눈독 완전 들이고 있고, 심지어 우리 사장님도 완전 사위처럼 챙겨주는 게 확 느껴진다니까.”
티격태격 레슬링을 하면서도, 한 귀로는 정현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던 두 여자가 동시에 멈추었다.
“사장님? 한국의 일론 머스크, <태성자동차> 이창홍 사장? 그 집 딸 대학 입학했을 때 인터뷰 기사 읽은 적 있는데. 그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 어리지 않나? 그런 집안에서 사윗감으로 관심 두는 사람이란 말야? 대단한데!”
어디서 주워 읽은 인터넷 기사가 생각 난 은혜가 흥분해서 떠들었다.
“그렇다니까! 나무한테 주긴 남자가 완전 아깝지, 암 아깝고 말고… 윽!”
정현은 나무가 던진 쿠션베개를 정통으로 맞고서야 남자 아깝다는 타령을 멈추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긴 하네! 네가 대어를 물어온 건 인정.”
나무는 인정한다는 한 마디를 짧게 내뱉고는, 은혜와 격전을 치르고 목이 마른 지 다시 물을 따라와 숨도 안 쉬고 꼴깍꼴깍 들이켰다.
“정말 부럽다, 기집애! 나 대학 1학년 때 만난 얘 땜에 한 번도 소개팅 못 해본 거 알지? 나도 소개팅 하고 싶다!"
“뭐! 야, 김은혜, 일루 와 봐!"
“아... 알았어, 취소 취소! 안 해 안 할게! 이거 좀 놓고 얘기해!”
정현이 은혜 목에 팔을 둘러 조이기 시작하자, 간지럼을 타는 은혜가 몇 초도 참지 못하고 항복했다.
“아 배고파. 아침 내내 물 마실 시간도 없이 환자들을 연속으로 봤더니 허기진다.”
은혜는 토요일,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간혹 토요일밖에 시간이 안된다고 하는 환자가 문의해 올 때는 편의를 봐주는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융통성의 폭이 점점 넓어지다 보니 요즘은 쉬는 때보다 토요일에 새벽같이 나갈 때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점심 먹자.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아까 와서 재료도 다 준비해 놨으니까 10분 볶는 시간만 있으면 준비 돼."
오늘 밥당번 정현이 큰소리를 쳤다.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 점심은 셋이 함께 모이는 시간이었다.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 이 방 2개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온 후 시작된 토요 모임이었다. 혼밥혼술주의자, 웬만한 건 혼자만의 시간을 추구하는 나무가 유일하게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시간이기도 했다.
“또 볶음밥이야? 질려! 메뉴 좀 바꿔라!"
은혜는 볶는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볶는 과정이 들어가긴 하는데, 단순한 볶음밥은 아냐."
“단순한 볶음밥이 아니면, 뭐, 복잡한 볶음밥이냐?”
“우리 색시랑 친구는 일단 그대들이 좋아하는 이 딸기 애피타이저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청과시장 앞을 지나가다가 딸기 향이 진동을 해서 사봤는데, 제철이라 그런지 아주 달아. 이 서방님은 그동안 5성급 호텔 레스토랑 수준의 화려한 점심을 준비할 테니!"
호텔식당 수준의 화려한 점심이라고 큰소리치더니, 야채와 밥을 볶고 있는 정현을 보며 나무는 피식 웃음이 났다. 5년 전 일본여행 이후, 요리 잘하는 남자가 멋있다며 은혜가 당근과 채찍으로 정현에게 꾸준히 압력을 넣은 결과가 오늘날 정현의 요리실력이었다. 요즘 들어 이 8년 차 커플은 곧 살림을 차릴 것 같은 낌새를 부쩍 풍겼다.
“짜잔! 맛있는 오므라이스 대령이오!”
밥을 감싸 안은 노란 계란지단 위에 새빨간 케첩이 요염하게 꼬리치고 있었다.
“뭐야! 이건 그냥 계란 덮은 볶음밥이잖아! 정현, 신개념 메뉴 좀 개발해 봐! 신개념 자동차 개발에만 정력 다 쏟지 말고.”
은혜가 숟가락으로 계란을 깨서 뒤적거리며 툴툴거렸다.
“맞아, 요새 먹방도 많이 하고, 요리 프로도 좀 많냐! 좀 더 신경 써. 요샌 남자 요리 잘해야 장가간다.”
나무도 은혜의 채찍질을 거들었다.
“이 처자들이 예술 작품을 감상할 줄 모르네. 이 계란 좀 잘 봐. 이렇게 얇게 구워 찢어지지 않게 덮기가 얼마나 힘든 건데. 이 케첩도 좀 봐. 한 큐에 이런 멋진 그림이 나오기 쉬운 줄 아냐? 얼굴 이만하면 훈남이지, 공대생들의 로망 ‘태성맨’이지, 성격 좋지, 요리실력도. 이만하면 은혜야, 나 같은 남자 없다. 너 복 받은 거야! 루이 형은 아마 요리는 나만 못 할 거다. 그 외모에 그 능력인데 다른 것들은 부실해야 말이 되지, 안 그래?”
'오카다 루이 씨는 어떤 사람일까?'
나무는 정현의 사무실에 야식을 들고 은혜와 찾아갔을 때 그 사람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순간이었지만, 불쾌하거나 민망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냥 잔잔한 푸른 강을 바라보고 있는 듯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나를 소개받기 원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 사람과 소개팅을 하면 그다음은? 그다음이란 건 있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월급이 또 끊겨버릴지 모르는 이 상황에, 내 처지에…….'
나무의 마음은 제대로 부풀어 오르기도 전에 의구심의 구멍이 뻥 뚫리면서 바람이 휘잉 빠져나갔다. 나무는 아무리 잘난 남자니 어쩌니 해도, 낯선 남자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욕구가 충분하지 않다는 자각,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인생의 위험요소들을 생각할 때, 역시 혼자인 게 마음 편하다는 자기 합리화가,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느낌으로 익숙하게 마음에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무는 ‘소개팅은 개뿔’ 속으로 생각하며 전기 포터에 물을 채우고, 끓임 단추를 눌렀다. 원두커피 한 컵을 수동 그라인더에 넣고 손잡이를 돌려 북북 갈았다. 금세 향긋한 커피 내음이 진동했다.
'이렇게 맛있는 밥 먹고 향긋한 커피나 마시면, 그게 행복이지. 적어도 이 맛은, 이 맛이 주는 기쁨은 변함이 없잖아. 결국 조그만 갈등이나 불편함 때문에 남남으로 갈라져버릴 유리병 같은 관계에 공을 들이는 건, 역시나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지. 그 에너지와 시간을 밥값 커피값을 버는데 쓰는 편이 낫잖아.'
나무는 변치 않고 언제나 곁에 있을 것들로부터 소소한 행복 찾는 법을 배웠고, 그런 요소들이 그녀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안정감을 보장하는 두터운 틀이 되어가고 있었다. 굳이 이 평화로운 틀을 깨 가며 뜬금없는 새로운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스무 살 첫사랑도 아니고, 적어도 서른은 넘어 보이던 사람이 '반했다'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나무는 일축하고, 제 마음속에 날아들었던 빛나는 반딧불들도 휘휘 흩어 버렸다.
나무는 적당한 굵기의 입자로 갈아진 커피를 유리병 위에 얹은 필터에 와르르 쏟아 넣고, 그 위에 끓어 올라 한 김 식은 물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커피를 우린 액이 필터의 접힌 모서리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졌다. 유리병에 모인 커피를 세 개의 컵에 나누어 담았다. 나무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쟁반에 받친 머그잔 셋을 거실로 날랐다.
“커피 마셔."
“향 좋다. 무슨 커피야?”
“우리 회사 건물 1층 카페 커피가 넘 맛있길래, 여쭤 보니까 이 커피를 쓴다더라고.”
나무가 부엌에서 빨간 이탤릭체 로고가 그려진 은빛 캔을 가져와, 그 안에 담긴 커피 원두를 은혜 코 앞에 내밀어 보였다.
“와, 커피 향 진짜 좋다. 이런 향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크리스마스에 나무 장작 타는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핫초콜릿 마시는 느낌 같은......."
"어디서 샀어?”
은혜가 좋아하는 건 무조건 입력해 두어야 하는 정현이 출처부터 확인했다.
“인터넷에서 주문했어. 향이 괜찮지?”
“나무는 먹어보고 맛있는 거 확인하고 사는 타입이구나!”
“난 좀 그래. 의심이 많아서 리뷰만 보곤 못 사.”
“그래. 나무 넌 원래 그런 사람이야. 부딪쳐 보고 경험하고 나야 확신을 얻는 사람. 사람도 그렇게 알아가야지, 안 그래? 당연히 할 거지, 소개팅?”
정현은 간절한 마음을 숨기고 느긋함을 가장하며, 다시 한번 소개팅건을 쑥 들이밀었다.
“아, 됐어. 당장 다음 달 월급이 끊길까 말까 한 처지에, 소개팅은 무슨.......”
어느새, 나무는 아까까지 보이던 관심마저도 거두고, 소개팅에 대해 더욱 회의적인 태도로 철벽을 치고 있다.
“뭐? 월급이 또 끊긴다고? 야, 무슨 회사가 그래? 그런 회사 희망 없어. 빨리 다른 데 알아봐.”
은혜는 나무 월급이 또 끊길지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열이 확 받는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편성만 나면, 특별 보너스까지 돈이 또 한꺼번에 들어와서 괜찮아.”
“그니까. 편성이 언제나 난다는 보장이 있냐고! 그거 바라보고 달려드는 드라마 제작사가 한 둘이냐고! 요즘은 외국계 기업들까지 덤벼든다며. 대기업 홍보 마케팅팀 같은 데로 빠져. 아님 대형 광고사에 들어가든지. 도저히 그 회사 못 나오겠으면, 차라리 인기 연예인하고 협업으로 유튜브 채널을 만들자고 하든지.......”
“자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들은 잠시 내려놓고…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하자고. 소개팅…….”
가끔 '나무 애미 모드'에 돌입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은혜의 일장 잔소리 낌새를 감지하고, 정현이 막았다. 다시 소개팅 건을 들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참참… 소개팅 이야기 하던 중이었지… 이럴 때일수록 소개팅은 하고 봐야 되는 거야. 결혼이라는 옵션도 나쁘지 않다 너? 내가 청담동 사모님들을 좀 만나 보니까, 좋은 남편 만나서 아기 낳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전업하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더라고. 뜬구름 잡는 방송 기획에 네 청춘을 바치는 것보다, 능력 있는 남자랑 열심히 사랑을 해서 결실을 보는 게…….”
“소개팅은 됐다니까.”
“나무야아아아.......”
은혜의 말투가 바뀌고 있었다. 말투뿐 아니라 점점 몸짓도 바뀌더니, 어느새 나무 곁에 찰싹 붙어 앉아 그녀의 팔짱을 꼈다. 이건 은혜가 누군가를 자기 뜻대로 설득해야 할 때 쓰는 필살기인걸, 당해본 경험이 풍부한 정현이 금방 눈치챘다.
나무를 부르는 은혜의 목소리는, 간드러진 버전으로 변조되었고, 얼굴에 생글생글 눈웃음까지 장착했다. 은혜는 차근차근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오카다 씨, 그분 모든 게 훌륭하지만 특히 외모가 너무 훌륭하잖아. 그런 초절정 꽃미남과 소개팅 기회를 저버린다는 건, 그건 정말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는, 뭐랄까 집안 대대로 유전자를 업그레이드 못한 후회가 남을 수도 있는, 일종의 인생과 후손 앞에 대역죄가 아닐까?”
은혜는 외모지상주의 대하드라마 같은 소리를, 정성스럽게도 늘어놓았다.
“얘네들이 진짜. 오늘 왜 이렇게 사람 부담 줘? 초절정 꽃미남, 스펙 끝내주는 다 갖춘 능력남, 언제 떠날지 모르는 외국인,… 이 사람과 내가 소개팅했다 치자. 너희 눈엔 그 담에 미래가 보이냐?”
정현과 은혜는 나무의 예리한 지적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간 낭비라니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일에 아까운 시간, 에너지를 왜 써. 나 아니라도 그 사람 탐내는 사람들 줄 섰다며.”
정현이 다시 나섰다. 마지막 시도이기라도 한 듯, 이번엔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무야, 난 네가 조금은 더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그냥 소개팅 자리에 잠시 앉았다가라도 왔으면 좋겠어. 소개팅이 잘되거나 안되거나 아무 상관없어. 난 네가 조금씩이라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시도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야.”
정현도 이도저도 안될 때 막판에 꺼내는 필살기인 진지모드를 가동했다. 나무와 자리만 만들어 주면, 루이가 알아서 한다고 했다.
- 부탁할게. 딱 한 번만 자리를 마련해 줘. 그 담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결코 내가 나무 씨에 대해 실망하는 일도, 나무 씨를 아프게 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약속해. 어떤 형태로든 나무 씨에게 곁에 있어 좋은 사람이 될게.
결코 나무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루이가 약속했고, 정현은 그의 약속을 믿을 것이었다.
“정현아, 그 사람은 너와 회사에서 매일 얼굴 보는 네 상사인데 왜 상관이 없어? 잘 안되면, 너 진짜 불편해져.”
정현이 진지한 만큼 나무도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그녀의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제발 한 번만 루이 형 만나 줘. 꼭 너여야만 한다는, 너를 결코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진짜 진심을 가진 좋은 남자가 나타났다고!'
“난 괜찮다니까 진짜!”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정현은 꽥 억지를 부려보았다.
“제발, 이 기회 놓치지 말라고! 네 인생에 꽃미남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은혜까지 거들었다. 아직도 꽃미남 패로 협박하면서.
“꽃미남 만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야, 촬영장에 가면, 티브이만 켜면 널린 게 꽃미남이야… 난 꽃미남도 노땡큐 소개팅도 노땡큐니까, 커피나 마셔들.”
“진짜 아깝다…….”
은혜가 명품 세일기간, 굳딜을 놓쳤을 때나 짓는 울상을 지었다. 정현이 인생 다 산 것 같은 나무의 논리를 어떻게 깰까 망설이는 사이, 나무가 진지하게 쐐기를 박아버렸다.
“신경 쓰일 일은 시작도 하고 싶지 않아. 떠날 사람이랑 뭐 하러 엮여? 다 부질없는 짓이다.”
도무지 뚫고 들어 갈 틈이 없다.
'루이 형한테 나무가 거절했다는 걸 어떻게 말해… 루이 형의 실망하는 표정을 어떻게 보냐고…….'
그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절박하고 다급한 정현의 뇌리를 스쳤다.
'이러면 어떨까?'
“네 말이 맞아. 나도 너에게 아픈 일이 생기는 거 정말 싫어. 그래서 이게 나은 상황인 건지도 몰라.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이 외국인이고 인기도 많고 언젠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있잖아. 루이 형이 어떤 미래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몰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기대지도 말고 마음도 많이 주지 말고, 친구처럼 가볍게 만나보면서 만남을 연습하는 거지. 연습용 만남 도우미, 어때?”
어떻게든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나무의 입장만 생각하고 무리수를 두는 정현을 나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연습용으로 쓰다 버려라 이 말이지? 그럼 그 사람이 상처받을 텐데?”
“첨부터 말하면 되잖아. 언젠가 떠나실 거니까 그냥 친구로만 지내자고.”
“친구… 뭐, 좋아.”
“그럼 소개팅 약속 잡는다.”
“야, 무슨 친구랑 소개팅을 해?”
'일단 루이 형 한 번만 만나 줘, 제발 나무야.'
“그래도 만나서 인사는 해야지.”
“그때 했잖아 인사. 내가 지금은 무지 바쁘니까, 시간 날 때 다 같이 밥이나 한 번 먹자. 분명 친구라고 했다. 우리 다 똑같이 친구, 오케이? 더 이상 나랑 그 사람이랑 따로 엮기 없다!”
나무는 모두를 위해 희망고문의 끈을 싹둑 잘라 버렸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너무 이상해서, 너무 말이 되지 않아서, 아무 기대할 게 없어서,… 그래서 한 번 가볍게 만나보며 사람 만나는 연습을 해보아도 부담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순간, 흔들릴 뻔했지만, 나무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시간 낭비 말고, 밥값 벌기에나 충실하자고.
“야…, 야, 그럼 너 소개팅 말고 컨설팅 받아라.”
다급해진 정현이 말까지 더듬으며 아무 말 대단치 같은 소리를 했다. 뭔 소린가 싶은지 은혜도 정현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아 똥마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서 말할게.”
정현은 일단 저지른 말을 해결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가자마자, 루이에게 문자를 했다.
[형, 지금 바빠요?]
[괜찮아. 말해]
정현의 연락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루이는 바로 답했다.
[예상했던 대로, 나무가 소개팅은 절대 안 하겠대요. 형이 싫은 게 아니라, 소개팅 자체, 낯선 외국인을 만나는 일 자체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현은 최대한 루이가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라며, 급해 죽는 상황에도 불구, 소리 나는 통화를 할 수 없으니, 단어 하나하나를 살펴 가며 길게 문자를 찍었다.
[다시… 만날 길이 없을까?]
[그래서, 제가 소개팅 대신 형한테 컨설팅 받으라고 했어요.]
[뭐?]
[일단 너무 급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이젠 뭐라고 하죠?]
루이는 뒷목을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컨설팅을 받으라고 했다니… 뭘 컨설팅 할 수 있지? 인생 컨설팅? 고민 컨설팅?
[혹시, 나무 씨에게 힘든 상황 같은 거 있어? 나무 씨가 하는 일이 뭐지?]
[아, 있어요, 있어! 지금 나무네 회사가 어려운데…….]
***
미친 타이핑 실력과 분석력을 발휘하며, 그 짧은 몇 분의 시간 동안 루이와 정현은 회사에서 쌓아온 팀워크를 십분 활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화장실 문을 닫아 붙이고 나오는 정현의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정현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감지한 은혜는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잠자코 희소식을 기다렸다.
“시원하냐?”
“시원하다! 지금부터 10분 동안 화장실 쓰지 마.”
“남의 집에서 참…….”
“여기가 왜 남의 집이야? 울 색시도 있고 절친도 있는데, 그지 은혜야.”
정현이 은혜를 끌어안으려고 하자, 은혜는 할 말이나 빨리 꺼내라는 듯, 그를 밀치며 재촉하듯 물었다.
“나무가 무슨 컨설팅을 받는데?”
“그러게. 내가 무슨 컨설팅을 받아?”
“내가 아까 말했지. 루이 형은 보통 컨설턴트가 아니라, 세계적인 수석 컨설턴트라고. 이 형이 하는 산업 컨설팅이라는 게, 자동차 산업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거든. 드라마 기획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거거덩…….”
정현은 루이와 입을 맞춘 각본 그대로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와 좋다! 나무야, 그거 받아 봐. 너 요새 기획한 거 자꾸 씹히고, 회사 상황도 월급까지 끊길 지경이라며.”
은혜는 정현이 하는 수작을 꿰뚫어 보며, 솔솔 부채질을 담당했다.
“진짜 효과 있을 거야! 그럼 네 회사에도 도움 되고, 너 월급도 안 끊기고.”
정현의 진짜 의도가 좀 의심스럽긴 했지만, 지금 회사 상황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나무 입장에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나무는 위기에 봉착한 회사의 방향을 틀어 물꼬를 터 줄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 당장 달려가서 도와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의 대기업, 그것도 대한민국 최첨단 기술의 상징 <태성 자동차>에서 초빙한 사람이라면,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직시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통찰력과 분석능력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배울 점이 분명 많을 것이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다. 회사는 직원들 월급주기도 벅찬데, 컨설턴트를 고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컨설팅 받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울 회사 상황이 컨설턴트 비용을 감당 못해.”
“아니… 회사 차원의 컨설팅이 아니라, 네 개인으로, 기획 컨설팅 받으라고.”
“그건 더 말이 안 되지. 생활비 내고 적금 붓는 것도 빠듯한데, 내가 재벌 3세도 아니고, 무슨 수로 컨설턴트를 고용해?”
“아 그건…, 후, 후불로 내면 되지. 편성 따면 특별 보너스 나온다며.”
정현은 지뢰밭을 걷는 듯한 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후불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자신의 재치가 미치도록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해 주실까? 보너스가 나와도 그분 수준에 맞는 사례금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잖아. 그리고 우리 다 친구 하기로 했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분명 해 줄 거야, 루이 형. 중간에서 내가 말 아주 잘할 거고. 그런 능력자 하고 한 시간만 말해봐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팍팍 떠오를걸.”
“그래… 고마워. 잘 부탁한다. 민폐 끼치긴 싫은데, 지금 우리 회사 상황이 말이 아니라, 신세 좀 질게. 컨설팅 그거 함 받아 보자.”
휴… 드디어 성공! 정현은 속으로 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쾌재를 불렀다.
“아흑... 부럽다 기집애… 나도 소개팅, 아니 컨설팅 한 번만 받고 싶다!”
“은혜, 네 컨설팅은 내 담당이지. 따라 들어와!”
둘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나무는 이어폰을 꽂고 혼자 산책을 나섰다.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02kim)
오므라이스 사진 출처: https://cooking.nytimes.com/recipes/1019430-omurice-japanese-rice-ome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