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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20. 2023

8. 세이 아이 캔 두 잇!

[소설] 루이의 나무 

책을 읽느라 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루이는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밖은 아직 검푸른 새벽기운에 푹 젖어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 사람들이 출근하고 업무를 시작할 때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텅 빈 사무실엔 주말 내내 내려앉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루이는 들고 온 쇼핑백 두 개를 책상 아래 내려놓고, 수석 컨설턴트를 모시기 위해 준비된 최고급 사무용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나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그녀를 돕고 싶은 열망과, 그녀의 일을 이해하고 제대로 도울 수 있을까 염려스러운 의구심과,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컨설팅임을 나무가 곧 깨닫게 될지 모른다는 낭패감,… 복잡한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루이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분명 기쁨이었다.


'5일 뒤면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루이는 항상 그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을 떠올렸다.


닥터 데밍, 타이치 오노, 그리고 SGC 내에서 자신의 멘토인 야마나카 상. 


세계적인 컨설팅 기업 SGC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닥터 데밍이라는 미국인 학자가 나온다. 그는 통계학자이자, 품질관리 이론가로서, 최초로 일본에 품질 관리의 중요성을 설파한 인물이다. 


세계 2차 대전 직후, 전 세계 사람들이 ‘미제’라면 껌벅 죽던 시절, 아쉬울 게 없는 미국의 오만한 대기업들은 데밍 박사의 품질 관리 이론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일본의 기업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신의 계시처럼 따르고 실행에 옮겼다. 일본의 기업들 뿐만이 아니었다. 야마나카 상이 이야기 해준 바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는 티브이만 틀면 데밍 박사가 연설하는 장면이 나왔을 정도로, 일본 전체가 그를 정신적 멘토로 여기고 배우고 따랐다고 한다. 기업인의 공장 관리를 넘어, 살림을 하는 주부들까지 체계적인 정리 정돈 효율적인 수납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문화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결과, 패전국은 폐허의 잿더미에서 시작해 40년 안에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도요타, 소니, 혼다와 같은 기업들을 세우고,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여러 일본 회사들 중에서도 닥터 데밍의 이론을 공장 시스템에 적용해서 가장 완벽한 산업체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예는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이었다.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후에 도요타의 CEO까지 지낸 사람이 타이치 오노다. 이 타이치 오노를 몇 십 년간 수행하며 닥터 데밍의 이론과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을 뼈에 새긴 사람들이 루이의 멘토인  야마나카 상과 현 SGC의 중역들이었다. 


경주에서 너무 빨리 뛰어갔던 토끼처럼, 그동안 무적불패 경주에 안일해진 미국은 살이 뒤룩뒤룩 찌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품질관리에 실패하고 경쟁에 뒤쳐지는 침체기에 들어선 미국의 대기업들이 닥터 데밍의 이론과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 앞에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 매달렸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파이브 에스, 식스 시그마, 카이젠, 린 메뉴팩쳐링으로 꽃 피운 이론들을 일본으로부터 역으로 배우고 미국 기업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을 전 세계가 목격하면서, SGC 핵심 컨설턴트들은 전 세계 기업이 열광하며 추종하는 산업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루이는 나무를 만나기에 앞서, 나무의 방송기획과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기에 앞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배운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닥터 데밍이라면 타이치 오노라면, 야마나카 상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접근했을까?


“Say I can do it, and try it! Once you start something, persevere with it. Do not give up until you finish it”(모든 일에 앞서 ‘할 수 있다’고 말하라. 그리고 시작하면 끈질기게 매달려라. 다 끝낼 때까진 포기하지 마라)


닥터 데밍으로부터 내려와, 일본 전역 모든 산업 영역 깊숙이 침투해, 갖가지 상황에서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일본인의 태도가 된 이 생각.


“보쿠와 데키루. 나는 할 수 있다.”


루이는 조용히, 하지만 힘차게 읊조려 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다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헤치며 나아갈 힘이 생겼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를 실행하기 전에,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무가 하는 일을, 그녀가 하는 말을 충분히 낱낱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루이는 쇼핑백에 손을 넣어 책을 하나 꺼내 펼쳤다. 


****


정현이 꽤 이른 시각에 출근을 했는데도, 루이가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사는 읽고 있는 책에 심취해, 부하직원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형, 일찍 출근하셨네요. 주말 잘 보내셨어요?”


주말 내내 루이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 어떤 심정일지 알 것 같았지만, 정현은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쾌활하게 인사했다.


“어, 왔어? 참 이것 받아.”


루이가 몸을 숙여 책상 밑에서 쇼핑백을 하나 꺼내 정현에게 내밀었다.


“뭘, 이런 걸 다…….”


'나무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에 대한 선물을 벌써 주시나? 역시 일본 사람들이 예의가 참…….'


쇼핑백은 정현이 한 손으로 들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묵직했다. 


'뭐지?'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야근하면서 정현 군이 공부할 책들이야. 내 것도 이만큼 있어.”


루이가 부당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비슷하게 묵직해 보이는 다른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정현이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니, 모두 방송 기획에 관한 책이었다.  <방송 기획과 제작의 이해>, <방송 기획 기초>, <방송 프로그램 기획>, <기획이란 무엇인가>,…….


정현이 평생 한 번도 손댈 일 없었을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정현이 루이의 책상을 슬쩍 보니, 그가 읽고 있는 책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았다. <미디어 심리학>


“이번 새 컨설팅 건, 반은 정현 책임인 거 인정하지?”


루이는 부하직원을 혹사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진짜 웬만하면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더군다나 사적인 일로 직장 동료에게 폐를 끼친다는 건 일본인 뼈에 새겨진 윤리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현의 도움 없이는 이 상황을 헤쳐갈 도리가 없다는 걸 루이는 순식간에 파악해 버렸다. 어제 정현과 연락 후, 당장 서점에 달려가서 관련 서적을 있는 대로 사 모으고 읽기 시작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던 것이다.


 나무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돕는다는 것은 방송과 방송기획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서, 한국 방송 문화 역사 이해, 한국 문화 심리 분석, 시청자 연령별 기호 분석, 시청률 분석까지 방대한 작업을 하고, 그 바탕 위에서 대중이 인정할만한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콘텐츠 창조까지 이끌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앨범 10만 장 정도 팔릴 노래 만들기, 100만 부쯤 거뜬히 팔릴 소설 쓰기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


그것은 한국 사람, 특히 루이가 당면한 사태의 긴박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 한국 땅에서, 루이의 새 비밀 프로젝트를 공개할 수 있는 사람도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정현 밖에 없었다. 이미 한 배를 탔고, 피할 길도 숨을 길도 없다. 참기 힘든 미안함과 수치심을 꾹 누르고 정현을 붙들어야만 했다.


“하…”


정현은 길고 애절한 한숨을 터뜨리는 것 외에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실수로 소개팅이 컨설팅이 되어버렸고, 일을 이지경까지 몰아온 것도 정현 자신이었다.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공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기술 산업이 아니라, 문화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미디어 사업에 관한 것이다. 나무가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만능 컨설턴트의 역량을 믿는다는 게 오히려 믿기 힘들 정도의 믿음인 것이다. 


이건 아무리 루이라도 벅찬 일이라는 것을 정현은 잘 알았다. 그나마 죄책감을 덜기 위해,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정현, 나 따라 해 봐.”

“네?”

“나는 할 수 있다! 자 따라서 외쳐 봐.”

“나는 할 수 있다!”

‘형, 이건 좀…….’

“그렇지. 한 번 더! 힘차게!”

“나는 할 수 있다!”


정현은 진부한 구호를 외치는 일이 민망해서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루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항하는 대신 상사에게 순종하자고, 할 수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자고 동의해 버렸다.


‘나무야, 다 너 위해서다…….’ 


정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토요일에 두 사람이 만날 약속을 잡아 놓았으니, 오늘부터 5일 동안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 내가 설문지를 만들어 봤는데, 좀 봐줄래?”


정현이 보니, 여러 연령대와 성별의 사람들에게 방송 기호에 대해 묻는 질문들로 구성된 설문지였다.

 - 주로 몇 시에 티브이를 보나요?

 - 주로 무엇을 할 때 티브이를 보나요?

 - 어떤 방송을 가장 선호합니까?

.

.

.


“이런 건 언제 만드셨어요?”

“어젯밤에.”


완벽주의자 루이가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맡아,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나무의 일로, 첫 만남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급할지… 이 사태를 벌인 장본인으로서 정현은 심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시간에 나가서 설문지를 사람들한테 돌리자. 여러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 만나려면 명동 같은 데 나가야 하나?”

“설문 조사는 제가 SNS 이용해서 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적어도 100명 정도는 샘플 집단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100명쯤은 거뜬하죠. 제 인스타 페북친구 합하면 2000명이 넘어요. 제가 예전에 이런저런 동호회 활동을 좀 해서 인맥이 다양해요.”

“좋아! 다행히, 이번 주는 미팅도 없고, 특별한 스케줄이 없어. 책 하루에 두 권씩 읽고 나한테 브리핑해 주고, 설문 조사는 되는 대로 정리해 줘. 자, 시작!”


루이는 할 말을 마치고, 바로 제 자리로 가서 읽던 책을 계속 읽기 시작했다. 진짜 관심이 조금도 안 가는 분야의 책을 하루에 두 권씩이나 읽어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정현은 루이와 나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방송 기획과 제작의 기초> 첫 페이지를 펼쳤다.


***


# 5일 후, <카페 몽펠리에>


"루이상, 오하요!"


루이가 <카페 몽펠리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필립이 반갑게 맞았다. 프랑스인 필립의 입에서 유창한 일본어가 쏟아져 나오자, 커피 주문을 기다리던 손님들이 일제히 필립과 루이를 번갈아 보았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그린 듯 짙은 눈썹 아래 조각 같은 콧날이 균형 있게 자리 잡은 루이의 얼굴에 다시 한번 머무르며 감탄 어린 동경으로 변해갔다. 


"여자친구 생겼어?"


필립이 카운터 뒤에서 나와 루이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위에 얹힌  싱싱한 프리지어 다발을 향해 턱짓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는 이 질문을 5년 전에도 했었다. 


'필립이 나무를 기억할까?'


루이는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그리며, 한 손으로 꽃다발을 집어 들고, 남은 한 손으로 커다란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상자들을 필립 앞에 꺼내 놓으며 말문을 돌렸다.  


“일단 이 커피하고 딸기, 딸기 콤포트 받아.”


상자 안의 내용물들을 본 필립은 글썽한 눈을 하고 루이의 어깨를 힘주어 안았다. 루이가 가져온 싱싱한 딸기와 루이가 만든 딸기 콤포트는 필립에게 감동 그 자체였다.


미리 자리를 예약하고 음식 메뉴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루이가 카페에 전화했을 때, 전화기 너머로 은경과 필립이 걱정스럽게 나누는 대화를 들었었다.


- 딸기 콤포트가 이것밖에 안 남았어. 이번 주말을 못 넘기겠는데 어떡하지?  

- 주말까지 케이크 주문이 많아서, 장보고 콤포트 만들 시간이 없겠는데? 지금 루이와 통화 중이니까 전화 끊고 나서 다른 옵션을 생각해 보자.


상황을 알게 된 루이가 딸기 콤포트를 만들어 갖다 주겠다고 하였다. 루이는 필립이 부탁한 대로 새벽 청과시장에서 딸기를 대용량으로 사서 반은 콤포트를 만들고, 반은 싱싱한 딸기 그대로 가져왔다.


“루이, 정말, 고마워! 너 같은 친구를 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콤포트 제대로 됐는지 확인해 봐.”

“너 같은 완벽주의자가 만든 건 확인할 필요 없어. 색깔부터 딱 제대론 걸. 오늘 내가 브런치 멋지게 만들어 줄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오늘 여자손님 만나는 거 맞지?”

“오늘 만나는 사람… 아냐, 긴 이야기는 다음에 해줄게. 나중에 커피 주문할 때, 꼭 그 커피로 해줘.”


루이가 다시 한번 자신이 가져온 커피를 가리키며 강조했다. 


“커피는 지금 가게에 충분히 있는데. 며칠 전에 아주 좋은 프렌치 로스트 커피가 들어왔거든…….”

“근데 오늘은 내가 가져온 커피로 해 줄래?  만날 사람이 이 커피를 좋아해서… 암튼, 오늘 우리 테이블은 꼭 이 커피로 해줘. 부탁할게.”

“흠, 커피 취향까지 신경 써 주는 사람이라… 오늘 누구 만나는지 정말 기대되네.”


정확히 말하면, 커피뿐 아니라, 딸기와 딸기 콤포트까지 나무를 생각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필립을 돕는 의도도 있었지만, 정현이 귀띔해 준 대로 나무가 좋아하는 커피와 딸기를 준비하려고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던 것이었다.


필립은 눈을 찡긋 윙크하곤, 루이를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


"이 피디, 아무래도 우리도 요리 예능 가야 되겠다."

“사장님, 요새 요리 예능 너무 많아요. 백주부님 같은 영향력 있는 사람도 더 이상 없고요. 곧 시들해지지 않을까요?”

"요새 방송국에서 요즘 유행하는 기획 아니면 쳐다도 안 본단다야. 어쩌냐, 대세를 따라야지."


전화기 넘어 들리는 박만수 사장의 목소리엔 확신이 빠져 있었다. 실컷 기획해도 방송 시간 편성을 받지 못하면 말짱 헛수고였다. 자신의 인맥 능력이 더 이상 편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으니 사장 자신감이 무너질 만도 했다. 야망 때문에 여자를 버리고 죽게 만든 남자가 죗값을 치르기까지 쫓고 쫓기던 복수극 아침드라마를 마지막으로, 나무는 반복해서 헛수고로 끝나버리는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실컷 기획하느라 고생하고, 헛물만 켠 지 6개월째. 사장도 나무도 힘이 빠졌다. 뭔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월급이 끊기는 끔찍한 상황을 다시 겪어야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지금까지 이 작은 회사가 진작에 문 닫지 않고 지금까지 이 전쟁통에서 명줄을 이어온 게 더 신기한 일일지도 몰랐다. 사장 처가 집안의 선산까지 팔아 투자한 회사라는데 망하면 사장도 이 회사에 고스란히 바쳐진 나무의 젊음도 다 망하는 거다. 


전통 막장 드라마를 고수하자던 사장이 말을 바꾸는 것을 보니 결국 방향키를 요리 먹방 예능이든 뭐든 트렌드를 따라 새로운 쪽으로 잡아야 할 모양이었다. 요즘은 전 세계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새로운 콘텐츠로 치고 나오는 유튜브 방송 채널과도 경쟁해야 하는 판국이라 뭘 시도하든 제대로 빛을 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사장과 통화하고 나무는 더 암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아직은 월급이 나오고 있으니까. 그리고 희망이 있다. 지금 나무에게 가장 큰 희망은 정현의 소개로 받게 된 컨설팅이었다. 바로 오늘 나무는 세계적인 컨설턴트 오카다 루이 씨를 만나기로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컨설팅 기회가 암울한 이 상황에 한 줄기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다. 집에서 늦잠 자고 쉬고 싶은 토요일 아침이지만, 나무는 부푼 희망을 안고 그를 만나러 달려 나왔다.


나무는 문을 열어놓은 프렌치 카페 안으로 쏙 들어와 그 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루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남자 혼자 앉아있는 테이블은 딱 하나였고,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 컨설턴트가 확실해 보였다. 그날 밤에 보았던 느낌 그대로, 그는 확실히 눈에 띄는 조각 미남이었다. 


‘그쪽 맞죠?' 하고 나무가 루이를 향해 눈으로 말을 건넸다.


“여기입니다.”


루이가 일어나 다가가 나무에게 프리지어 꽃다발을 안겨주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나무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남자로부터 이런 환대와 매너에 익숙하지 않은 나무는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당황한 나무의 볼이 선홍빛으로 살짝 물들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그때 프레젠테이션은 잘하셨어요?”


나무는 붉어진 마음을 비즈니스맨 마스크 뒤에 숨기곤, 틀에 박힌 인사 몇 마디를 건넸다.


“네.”


'나무, 당신을 또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루이는 목이 메어와 겨우 대답 소리를 냈다. 루이의 짧은 대답 뒤 따라온 따뜻한 미소에, 비즈니스맨 마스크 뒤의 나무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지? 이 따뜻한 캐릭터는?'

 

정현의 말을 듣고 나무가 짐작했던 냉철한 분석가의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나무는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날, 한국말을 잘하셔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당신 때문이에요. 내게 진짜 한국을 가르쳐 준 건 당신이었죠.'

 

루이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의 미소가 따뜻한 봄볕처럼 너무나 따사롭고 정답게 느껴져서 나무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그 순간 나무의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따뜻했던 기억 한 조각이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그 기억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예전에 도쿄에 간 적 있어요.” 



대문 사진 출처: https://bucketlisters.com/inspiration/188-best-brunch-spots-in-ph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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