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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23. 2023

9. 마성의 컨설턴트

[소설] 루이의 나무 

“어땠나요?”


도쿄에 갔던 일을 떠올리려 하는 나무를 기다리는 루이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뭘 이렇게까지 관심을…….'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루이의 눈.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순간, 나무는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머릿속이 다시 하얘졌다. 


'이 눈빛…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


나무는 당황하여, 하려던 말을 급히 얼버무렸다. 


“일주일 밖에 머무르지 않았어요. 오래전이라…….”


그 순간 필립이 레몬 띄운 얼음물 한 잔을 그녀 앞으로 놓으며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나무와 필립이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필립은 나무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리 오래전 잠시 본 얼굴이라지만, 그때와 거의 변함이 없는 사람을 이렇게 못 알아볼 수가 있나 루이는 속으로 기가 막혔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로 가꾼 - 그의 아내, 은경이 관리한 대로 - 필립의 모습 속에서 더벅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던 5년 전의 늑대인간을 발견하지 못하기는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서두를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자 마음먹고 있었다. 루이는 혹시나 기대했던 마음을 추스르고 음식을 주문하는데 집중했다. 


"필립, 오늘 특별히 신선한 것 뭐지?" 

“오늘은 특별히 딸기가 아주 좋지.”


한국어로 두 사람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나무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한국말들을 어쩜 이렇게 잘하세요?”

“필립은 일본에서 오래 알았던 제 절친한 친구예요. 한국에 와서 카페를 연지 3년쯤 됐나?”


루이가 필립을 바라보자, 필립이 말을 이어받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프랑스 사람 필립 모니에입니다. 한국에 온 지 3년 되었어요. 반가워요.”


필립이 나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는 악수를 하자는 뜻인 줄 알고 그의 손을 잡았는데, 필립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이끌어, 손등에 살짝 키스를 했다. 나무는 속으로 무척 당황했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예전에 필립이 루이의 어머니, 에이코를 만났을 때, 손에 키스를 해서 모두를 당황시킨 적이 있었다. 여성에게 존경을 표하는 뜻이라고 필립이 설명했었기에, 루이는 이번에도 잠자코 있었다. 다행히 나무가 크게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았다.


“프랑스 사람들이 여성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이라고 해요”

“루이와 만나줘서 감사해요. 루이를 오래 알았는데 여자 만나는 걸 처음 봐요. 앞으로 우리 불쌍한 루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필립의 오지랖에 루이가 입술을 앙다물고 필립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여자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다느니, 불쌍한 루이라느니 하는 쓸데없는 말은 왜 하는지 루이는 짜증이 밀려왔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주문받고 가. 조용히 이야기 나누게 도와주지 않으면, 나 다른 가게로 자리 옮긴다.”


루이는 필립을 향해 거친 일본어로 으름장을 놓았다. 


“오, 무서워라. 물론 도와줘야지. 얼마 만에 생긴 여자친구인데, 그럼! 주문받고 얼씬도 안 할 테니 잘해 봐.”


필립이 루이의 등을 두드리며 같은 속도의 일본어로 받아쳤다. 필립과 루이가 일본어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나무는 이 두 사람이 정말 스스럼없는 친구 사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루이의 유창한 일본어에 나무는 새삼 이 사람이 일본인이 맞긴 맞구나 동해와 일본해 사이만큼이나 먼 거리감을 느꼈다.


“나무 씨, 아침 먹었어요? 주문 뭘로 할까요?”


루이는 필립과 일본어로 말할 때와는 완전 다른 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무의 의사를 물었다. 나무 씨라고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주는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 방금 느꼈던 거리감과 서로 역방향으로 소용돌이치며 나무를 어지럽게 했다. 


'뭐지, 이 사람?'


마치 언젠가 과거에 똑같은 일이 일어났었던 것처럼. 나무는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기시감 현상인가 생각했다. 전생에 이 사람과 무슨  인연이 있었나 말도 안 되는 상상마저 들었다. 


"나무 씨, 뭐 드실래요?"


필립이 재차 묻고 나서야 나무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네... 저는 아침을 조금 먹고 오긴 했는데, 여기 빵 냄새가 정말 유혹적이네요.”

“와플 굽는 냄새예요.”


빵 냄새가 좋다는 나무의 말에 필립이 맛있는 빵냄새의 근원을 설명했다.


“와플 맛있겠어요.”

“필립, 우리 와플 좀 줘. 딸기 콤포트는 사이드로 주고.”

“마실 건 뭘로 할래요”

“저는 드립 커피 주세요.”

“네, 오늘 아침에 개봉한 스페셜 **커피로 준비할게요.”

"아, 그 커피 제가 정말 좋아하는 커피예요! 와플과 딸기도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인데, 제가 오늘 운이 정말 좋네요!"


나무가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루이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빛이 스쳤다. 필립이 그런 루이를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루이는 모른 척,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했다.


“난, 카푸치노.”

“루이는 항상 카푸치노!”


루이가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필립이 광고 멘트처럼 응수했다. 


“카푸치노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두 사람이 그렇게 합창을 할 정도로 루이의 카푸치노 사랑이 대단한가 보다 싶었다.


미국에 건너간 후로, 루이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커다란 커피 텀블러를 하루 종일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의아해하다가, 어느 순간 루이도 하루 종일 커피를 홀짝 거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매일 비가 내리는 우중충하고 싸늘한 시애틀의 겨울을 나는데, 한 잔의 뜨거운 커피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커피 한 잔의 온기는 따뜻한 손난로이자 타국 생활하는 쓸쓸한 마음에 위로이기도 했다.


루이는 몇 년 전 일본에 휴가차 들러 필립과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하면서 미국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고소한 우유거품이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와 어우러진 카푸치노의 맛을 가장 좋아한다며, 카푸치노가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맛이라는 뜬금없는 말을 했었다. 아마도 눈 오던 그 크리스마스 저녁의 기억일 것 같았다.


필립은 루이에게 특별한 크리스마스 기억의 의미를 짐작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없는 사람, 찾을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 루이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였다. 필립은 루이의 입에서 "카푸치노"라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부터, 그 눈 오던 크리스마스 저녁을 떠올리면서도, 제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때 그 여학생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기적이 가능할 거라는 기대 자체가 없었다.


“계피 가루 넣지?”

“넣어주면 좋지."

“어쩜 일본어도, 한국어도 이렇게 잘하세요!”


‘계피 가루’라는 용어까지 구사하는 필립의 어휘력에 나무는 감탄했다.


“아내가 한국사람이에요. 한국말 배우는 게 참 재밌어요…….”


필립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아마도 그가 외국어를 빨리 배우는 비결은 수다 근성 때문일 것이라고 루이는 생각했다. 


“필립,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수다가 아니라 와플과 커피라고. 서비스 좀 제대로 해 줘.”


필립의 장난기 어린 표정과 못 말리겠다는 듯 루이가 머리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무는 다시 한번 강한 기시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쁘지 않은 이 친근한 느낌은, 신기하게도 나무의 마음을 금방 구운 와플처럼 포근하게 만들었다. 카푸치노처럼 따뜻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공기가 이 순간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본 아베띠! 맛있게 드세요!”


주문을 받아 갔던 필립은 날쌔게 다시 돌아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와플과 딸기 콤포트, 커피를 테이블 위에 한가득 차려주곤,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루이는 나무의 앞접시에 와플과 딸기를 덜어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권했다.


“여기 와플이 정말 맛있어요. 먹어봐요, 나무 씨.”


루이의 행동, 눈빛에서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흘러넘쳤다. 그 따스한 햇살이 닿는 곳마다 빛과 열로 공간 가득 채워지는 느낌. 마음 깊숙한 데까지 뜨뜻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느낌. 마치 죽음의 기운에 짓눌려 있던 자신을 살려냈던 오래전 그 일본인의 깊고 깊은 음식 맛처럼…….


나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일본인, 자신을 위해 밥을 해 주던 그 사람.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일본인의 얼굴과, 앞에 앉은 오카다 씨의 얼굴이 분리되지 않고 겹쳐 보였다. 미친 착시현상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떠도, 소용없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 사람이 지금 나무의 눈앞에서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하며 굳어지는 것을 보고, 루이가 깜짝 놀라 나무를 불렀다.


“나무 씨, 괜찮아요? 나무 씨……?”


'누구의 목소리일까? 그때 그 일본인의 목소리? 아니, 컨설턴트 오카다 루이 씨의 목소리?'


두 사람은 목소리마저 엉켜 들어, 나무의 의식에 혼란을 일으켰다. 너무나 따뜻하고 익숙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도, 나무는 도무지 이 기이한 착각현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같은 일본 사람이라고 이럴 수가 있는 걸까?'


그때의 그 일본인과 닮은 오카다 루이 씨가 자아내는 따뜻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외투를 벗어던지는 나그네처럼 될까 봐, 속에 입은 누더기 옷을 보이게 될까 봐, 순간 나무는 두려워졌다. 기대지도 말고, 마음을 많이 주지도 말고 연습처럼 만나보라던 정현의 말이 생각났다. 


'아니!'


나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마음조차 전혀 없었다. 이 사람과 엮일 마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 저 눈빛, 가슴이 아프도록 슬퍼 보이는 저 눈빛 때문에, 

저 목소리, 너무나 익숙하고 다정한 저 목소리 때문에, 

저 미소,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스며드는 저 미소 때문에,...


나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무 씨, 어디 몸이 안 좋아요? 힘들면 집에 데려다줄까요?”


루이의 표정에 걱정하는 빛이 어린 걸 느끼며, 나무는 어떡해야 하나 망설였다. 이대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 컨설팅, 컨설팅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이 사람은 우리 회사가 처한 어려움을 도와줄 컨설턴트야.'


나무는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잠시 머리가 아팠어요. 이제 괜찮으니까 본론 시작하죠.”


루이의 친절을 밀어내고 벽을 두르는 나무의 모습에서, 루이는 언제나 주변사람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했던 정현의 말이 생각났다.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이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 사람. 그건 루이 자신의 모습이었다. 혼자만의 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던. 


'나무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보여주는 것이 힘든 걸까? 잃어버리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어떻게 나무를 향해서는 이렇게 용기가 생기는 건지, 루이는 어느새 자신이 오래 머물렀던 익숙한 안전지대를 빠져나와 나무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 변한 모습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지난 5년 동안,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던 마음들이 더 이상 가두어질 수 없어 터져 나오는 것인지 몰랐다.


'나무도 거기서 벗어나게 할 길이 있을까? 그녀의 마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루이는 용기 내어 다가가리라 마음먹었다. 서두르지 않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리라. 나무가 어떤 이유로든 이 자리에 나와 주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힘을 얻으며, 루이는 지금 나무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컨설팅을 원하신다고요?”


루이가 컨설턴트답게 침착한 업무적인 태도로 질문을 하자, 나무는 자신을 괴롭히던 착시와 환청이 일시에 걷히며,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

“컨설팅을 시작하기 전에 저에 대해서나 뭐든 궁금한 거 있어요?”


나무는 루이의 질문이 ‘넌 조금이라도 나에게 관심이 있니’라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루이에 대해 궁금한 건 분명히 있었다. 소개팅 제안을 받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 하나. 


'왜 나를 소개받고 싶었나요?'


하지만, 도저히 지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다. 나무는 루이의 대답이 두려웠다. 이 사람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나무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지만, 스스로를 토닥이며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 너는 컨설팅을 받으려고 이 사람을 만난 거야. 정신을 차리고 이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배워.'

 

“정현에게 충분히 전해 들어서, 지금 특별히 궁금한 건 없는데… 바로 제 일에 대해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나무는 정신을 차리고, 루이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기획들이 계속 편성에서 밀린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다행히 정현과 함께 방송 기획과 한국의 방송 문화에 관한 책만 수십 권을 섭렵한 루이는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미리 계획하고 나온 대로, 루이는 이 상황의 근원적 문제를 파악하는데, The 5 Whys (다섯 번 ‘왜’냐고 묻는 타이치 오노식 질문법으로 문제의 근원에 도달하게 하는 문제 해결 기술) 기술을 적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왜 지금까지‘막장 드라마’와 '사극'만 줄곧 기획을 했나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지시하셔서요.”

“사장님은 왜 그런 지시를 하셨는데요?”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와 인기 아이돌들을 끼워 넣은 역사 드라마가 꾸준한 인기가 있다고 하셨어요.”

“사장님은 왜 그런 막장 드라마나 사극이 꾸준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그것은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사실일까요? ”

“한때 방송국에서 일하셨는데… 글쎄요… 막장드라마와 사극이 꾸준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신 게 분명 꾸준히 높은 시청률에 근거하셨을 텐데, 정확한 답을 못 드리겠네요. 방송계에 인맥이 넓으셔서, 방송국 쪽에서 제안하는 대로 믿고 받아들이시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짐작이지만요.”


사장 박만수가 방송계 트렌드 흐름에 대해서 만큼은 전문가라고 나무는 믿었다. 그가 무슨 근거로 특정 장르 드라마를 고수하자고 했는지 그 근거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판단할 사람이라고 나무는 그냥 믿었다.


루이의 질문이 다섯 번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나무는 회사의 기획 체계, 사전 조사 퀄리티에 허점이 있음을, 자신이 충분한 분석과정을 거치지 않고, 늘 사장의 의견과 지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루이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나무 씨가 기획하고 싶은 방송이 ‘막장 드라마’나 '사극'인가요?”

“아니요. 그냥 이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맡은 일이 그쪽이었고, 그것이 저에게 가장 익숙한 종류의 기획이긴 하지만… 그 장르들이 특별히 제가 만들고 싶은 방송은 아니에요. 하지만 회사가 늘 자금난에 허덕이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볼 여유 같은 게 없었어요. 당장 돈이 되는 일을 기획하느라 급급해서… 사장님이 하자는 대로…….”


나무는 자신이 생각보다 관성적이고 게으른 태도로 일에 임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몸은 혹사당하는 수준으로 힘들었고, 늘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제대로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지 않았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저 자신은 사장을 믿고 충성하는데만 급급했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나무는 왠지 부끄러웠다.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질문 몇 번 하셨는데, 문제가 보이게 하시네요. 많이 부끄럽네요.”

“어떤 문제를 발견하셨나요?”

“제가 철저하게 시청자 기호 및 시장분석을 하지 않고 상사 및 전문가로 여기는 사람들의 말에만 의존했던 게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루이는 나무가 참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 상황에서 남 탓이 아닌, 자신의 문제에 포커스 해서 생각하는 겸손한 태도가, 가장 빨리 근본 원인을 찾아내는 지름길이다. 


루이는 문득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잘했다고, 문제를 잘 짚어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들을 꾹 누르고, 루이는 창가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열어 서류를 꺼냈다.


“나무 씨가 더 잘 알겠지만, 정현과 제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료 몇 가지를 만들어 봤는데요,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루이가 보여주는 자료들을 보며 나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 이런 자료들을 다……!'


시청자 대상 설문 자료, 시청률 분석 자료, 최근 몇 년간 방송 동향 자료에,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의 관심사, 가장 트렌디한 탑 10 인플루언서 명단 및 검색어 모음과, 베스트셀러 책/영화/드라마/음악/웹소설/웹툰 주제들까지…, 나무가 내일부터 달라지겠다고, 제대로 조사 분석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하려 했던 방대한 양의 분석 및 자료 수집활동을 루이가 정현의 도움을 받아 이미 다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딱 봐도, 이 자료들이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한 계산과 계획하에 꼼꼼하게 만들어진 것인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든 것인지 나무는 느낄 수 있었다. 언제 이 방대한 작업을 다 했는지 나무는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카다 루이 씨는 존경받아 마땅한 세계적인 컨설턴트가 분명하다는 믿음이 나무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렸다.

나무는 마음먹었다. 오카다 루이 씨의 제자가 되겠다고. 그의 말이라면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배우겠다고. 이 사람에게 배워, 이렇게 지혜롭게 문제를 파악하고 멋지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나무는 루이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 무척 미안하기도 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다 하셔서… 시간 너무 많이 쓰시게 한 건 아닌지… 지금 당장 보상을 충분히 해 드리지 못하는 게 너무 죄송해요…….”


나무의 짐작이 맞았다. 이 결과물들은 지난 5일간 루이와 정현이 하루에 최소한의 수면만 취하며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서 이루어낸 일이었다. 


덕분에 컨설팅의 첫 단계 작업, 문제 발견하기와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신뢰 얻기는 성공한 듯했다. 루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다음 단계 구상에 돌입했다. 


'나무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 있을까? 아, 이러면 어떨까!'


루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나무 씨가 저를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ger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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