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루이의 나무
“정현아, 너의 소원은 무엇이냐?”
“저의 소원은 제 친구 나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요.”
“너도 결혼도 해야 하고, 집도 사야 하고, 미래를 위해 돈도 모아야 하는데 너 갖고 싶은 게 우선이 아니냐? 네 행복이 우선이 아니냐?”
“상처 입은 친구를 두고 저희만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제발 나무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렇다면, 착하고 정직한 마음씨를 가진 너를 위해, 네 친구 나무에게도 행복을 주고, 네게도 행복을 넘치도록 주겠다.”
이런 스토리면 더 바랄 게 없었겠으나. 묻는 이는 산신령이 아닌 루이였다.
“지금까지 야근하느라 수고했어. 소원이 있으면 말해 봐. 하나 들어줄게.”
“제 소원은 나무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나무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건 당연한 거고, 정현이 갖고 싶은 거나 부탁이 있으면 말해봐.”
“나무를 끝까지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행복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게 진짜 제 소원이에요."
“그래? 그게 진짜 소원이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나, 좋은 생각이 있어?”
“네, 있어요…….”
진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정현은 나무의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위해 루이가 알면 도움이 될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의 식성이나 기호부터, 어떤 순간에 어떤 제안을 하며 어떤 속도로 친해져 가야 할지 구체적인 전략을 일러 주었다.
정현은 나무가 미안해하고 감사해하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순간 외에는 들어갈 틈이 절대 없다면서. 지금 나무는, 루이가 도와준 일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바로 이때를 놓치지 말고, 진격!
“실은, 나무 씨가 저를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아…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게요.”
나무의 태도는 확실히 아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으므로, 나무는 루이가 요구하는 사항을 최대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형 일단 우리 밥 먹는 모임에 들어오는 걸로 시작하세요. 친구가 되자고 해요. 기회 보며 서서히 말도 놓으세요.
“정현이 그러는데, 토요일에 친구들끼리 모여 밥 먹는 모임을 한다고 들었어요.”
“네… 매주 모이는 건 아니고, 마지막주 토요일만요. 정현, 은혜, 저 돌아가면서 밥 당번을 해요.”
“저도 그 모임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친구로서…….”
나무는 이미 정현에게 다 같이 친구가 되는 일은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같이 정기적으로 만나 밥 먹는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다. 토요일 아침 늦잠 자고 눈곱 낀 얼굴로도 만날 수 있는 아주 편한 친구들끼리의 모임이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다.
나무는 루이가 건네준 자료들을 들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엄청난 분량의 일을 돈도 받지 않고 정성 들여 해 준 사람에게, 한 달에 한 번 같이 밥 한 끼 먹자는 거 가지고 까다롭게 굴 순 없다. 엄청난 요구도 아니고, 조금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거절한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다. 사실, 이렇게라도 도울 일이 없다면, 나무의 입장에선 신세만 잔뜩 지고 입을 닦는 상황이라 내내 마음이 불편할 것이었다.
“그러세요. 저희 밥 모임에 오세요. 정현과 은혜도 아마 좋다고 할 거예요.”
정현과 은혜의 반응은 안 봐도 뻔했다. 루이를 이미 온마음으로 환영하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정말 잘됐어요. 아직 한국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친구들끼리 만나서 밥 먹고 그런 게 정말 그리웠거든요.”
“그러셨군요. 혼자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건, 전 꿈도 꿀 수 없을 것 같아요.”
오카다 씨는 정말 힘든 상황을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구나 나무는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훌륭한 분과 친구가 되면, 배울 점이 참 많을 거야. 잘 된 일이야.'
“우리 지금부턴 친구의 대화를 할까요?”
친구의 대화, 무슨 뜻일까? 설마 말을 놓자는 건 아니겠지?
“무슨 뜻이신지……?”
“우선 서로 말을 놓고 싶긴 한데, 그건 지금 당장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으니 서서히 하고요… 지금은 우리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면 어때요? 친구가 된다는 건, 서로를 알고 이해해 간다는 뜻이니까. 친구, 오후에 스케줄 있어요?”
'헉, 벌써 친구라고 부르다니……!'
“특별한 스케줄은 없는데, 내일 출근하기 전까지 이 자료들을 좀 꼼꼼히 보고 공부를 하고 싶어서요. 회사 상황이 좀 급박해서. 뭐,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좋아요. 한 시간 동안 우리 서로에 대해 알려주기 해요. 친구로서.”
자꾸 말끝마다 친구라는 말을 붙이니 나무는 민망해서 오그라들 것 같았다.
“이제 친구 되기로 한 거 확실히 알았으니까, 친구라는 말 그만하셔도 될 것 같은데…….”
“알았어요.”
루이가 큭큭거리며 웃는 모습이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다.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요?”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남에게 개인적인 이야기 하는 걸 무엇보다 질색하는 나무였다.
'가볍게 친구로 만나는 거잖아. 그냥 무난한 질문을 하고, 무난한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기차 여행길에 만난 사람과 나누는 날씨 이야기 같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반적인 이야기.'
“한국엔 혼자 와 계신가요? 일본에 가족이 계세요?”
“부모님은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하고 계세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어요. 전 외동아들이라 다른 형제는 없고, 대신 형제처럼 가까운 사촌동생이 하나 있죠. 그 녀석은 지금 대학생이에요.”
호구조사의 의도는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직업, 형제 관계까지 호구조사를 한 셈이 되었다. 부모의 그늘을 일찍 벗어난 사람이구나 생각하니 루이에게서 약간의 동질감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부모도 있고, 가까운 친척도 있는 무리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질감이 겨우 자리 잡으려는 동질감을 단숨에 밀어냈다. 타인이라는 기준이 주는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익숙한 자각이 나무의 심장을 익숙한 강도로 짓이겼다. 이래서 소개팅이란 걸 싫어한다.
다행히 이 만남은 소개팅이 아니다. 친구를 만나는 자리임을 나무는 스스로에게 재차 상기시켰다. 나무는 상념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다른 무난한 질문을 찾았다.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해 배워보는 건 어떨까? 일본사람들의 부모 자식 관계는 어떨까? 루이는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일본인들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가업을 잇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요? 루이 씨도 언젠가 부모님의 음식점을 이어가실 생각인가요?”
“글쎄요…….”
그런 것에 대해 미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루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낙담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학업보다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루이가 잠시 옛 생각의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나무가 다시 말을 번복했다.
“아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려고 한건 아닌데. 미안해요. 저는 다만 루이 씨가 가업을 잇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루이가 답하기를 곤란해한다고 여긴 나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나 타인을 알아가는 것을 어색해하는 나무가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마음을 거두어 버릴까 루이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성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나무에게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들부터 차분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을, 살아온 삶을 차츰 열어 보일 수 있기를 바라며.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부모님이 음식을 만드시는 모습을 보고 커서 그런지 음식 만들기에 무척 흥미가 있었어요. 집과 식당이 한 건물 안에 일, 이층으로 붙어 있어서 틈만 나면 식당에 내려갔죠. 할아버지가 손주 녀석이 요리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 기특하셨는지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시고 만들어 보게 하셨어요. 할아버지한테서 배운 게 정말 많아요…….”
루이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나무는 점점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루이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나무를 보니, 두 손을 꼭 모은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인형극에 정신이 팔린 어린 소녀처럼 너무 귀여워 그는 저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나무의 진지한 관심을 느끼며 루이는 더 힘이 났다. 꾸밈없이 자신의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오사카에서 오코노미야키집 아들로 커 온 이야기. 할아버지와의 추억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슬퍼했던 것. 작은 아버지 가족과 살며 고등학교까지 마쳤던 사연. 쥰이라는 사촌동생 이야기. 도쿄에 상경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필립을 만났던 이야기까지.
긴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나무는 루이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대로 이어받은 요리실력, 반듯한 외모, 완벽한 한국어 능력, 뛰어난 말솜씨, 사람을 끄는 따뜻한 느낌의 눈빛과 목소리,…….
나무는 원래 자신이 던졌던 질문이 뭐였는지도 잊어버렸다. 현장 인터뷰를 통해 얻어 건진 생생한 정보들이, 나무의 머릿속에서 종합 정리되면서 새로운 방송 기획 아이디어가 힘차게 알을 까고 태어나는 중이었다.
“이런, 제 이야기만 너무 오래 했나요? 나무 씨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아, 제 이야기요…….”
자기 혼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에 갑자기 머쓱해진 루이가 나무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나무는 자신에게 돌려진 화살촉에 따끔함을 느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구 앞에서 나무의 마음은 순식간에 대책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나무는 한 번도 절친 이외의 주위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지지리 복 없는 사람이 있을까 부담스러운 동정의 눈빛을 받느니, 차라리 외톨이가 되는 게 나았다.
“제 이야긴 재미없을 거예요."
갑작스레 어두워진 나무의 표정에 루이의 가슴도 내려앉았다. 자신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너무 길게 질질 끈 건 아닌가 그는 문득 미안해졌다.
“제 이야기가 너무 길고 지루했죠.”
“아니에요. 루이 씨 이야긴 정말 재미있게 잘 들었어요. 다만,…….”
나무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뼈대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살아 흘러나오는 자신의 과거 상처들이 두려웠다.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그냥 적당한 선을 지키는 사이로 지내면 된다.
“죄송해요. 저는 제 사생활 이야기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전 가족은 없고 친구랑 같이 살아요. 은혜 지난번에 보셨죠. 정현이 여자친구요. 그 친구가 지금 저에게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에요. 정현도 그렇고요.”
나무가 ‘가족이 없다’는 이야기를 무심하게 던지고, 재빨리 다음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하지만 루이는 느꼈다. 그녀가 차마 말로 다 내뱉지 못한 외로움이 아픔이 제 가슴에 와닿는 것을. 있는 힘을 다해 껍질을 겨우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와 바르르 떨고 있는, 갓 태어난 병아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이는 그런 나무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었다.
“저도 은혜 씨나 정현 군처럼 나무 씨가 믿고 편하게 느끼는, 가족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루이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은 무척 진지했다. 마치 방금 자신이 말한 대로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라도 하듯.
'아, 이 사람 뭐지?'
이렇게 동화 속 왕자님의 얼굴을 하고 여기 그녀의 바로 앞에 앉아 공들여 나무의 일을 컨설팅해주고, 나무가 묻는 족족 친절하게 대답하며 옛이야기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는 이 남자. 거무죽죽 멍으로 얼룩진 나무의 과거사를 눈치채고도 다정한 얼굴로 친구 같은, 가족 같은 관계를 이어가자는 말을 하는 이 남자. 나무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는 모임에 가입한 기념으로 제가 밥당번을 한 번 하고 싶은데요. 다음 주 토요일 시간 어때요? 모두 시간 괜찮으면 12시까지 저희 집으로 오세요.”
'정말 이 사람은 말이 안 된다.'
세계적인 컨설턴트가 밥당번을 자처하고 있다. 나무는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감사하고, 미안하고, 따뜻하고, 든든하고,…….
잘해준다고 마음을 의지하면 안 돼 생각하면서 눈을 들어 루이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무의 의심과 불안들이 바람에 날려가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의 마음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만이 봄볕이 대지에 스미듯 그녀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Sklo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