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루이의 나무
“이런 데가 다 있구나!”
<태성 자동차>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그린 빌리지>에 루이가 살고 있다는 말을 정현에게 전해 듣고, 나무와 은혜는 신기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을 정도였다. 신문과 뉴스에서나 보던 장소에 직접 가본다는 생각이 그들을 매우 흥분시켰다.
“진짜 특이하다. 이런 데서 드라마 찍으면 어떨까.”
“야… 나무 너도 직업병 심각하다.”
나무가 여기까지 와서도 드라마 촬영지 타령을 하고 있자, 정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아냐… 여긴 드라마보다, 다큐를 찍어야 할 것 같아. 이 <그린 빌리지>에 대한 인터넷 기사 읽어 봤는데 엄청나더라고. 여기선 100% 태양에너지를 쓴다는 게 맞아?”
“맞아. 여기서 태양광으로 만드는 전기가 이 빌리지를 운영하고도 남아 돌아서 역으로 한전에 파는데, 한 달에 1억 넘게 수익금이 나오지.”
“진짜? 대박! 우리나라 태양전지 기술이 그렇게까지 발달한 거야! 우리 신혼집에도 태양 전지 설치하면 그렇게 수익이 날까?”
“집부터 살 수 있어야겠지.”
“전셋집에선 힘들겠구나. 아파트도 입주자 전체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안되고…….”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게 꿈인 은혜였다. 전셋집도 얻기 힘든 서울 땅값의 현실을 생각하며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우리 집은 태양 전지도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사랑으로 후끈후끈할 것 같은데?”
“말이나 못 하면…….”
은혜를 다시 웃게 만드는 재주만큼은 정현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회사직원들한테 여기 입주 혜택은 없어?”
“아직은. 회사에서도 가깝고, 과천이라 서울보단 땅값이 나은 편이긴 한데… 아직 회사 직원들을 수용할 만큼 큰 단지도 없어.”
“루이 오빤 어떻게 여기 사는 거야?”
어느 순간부터 은혜의 입에선 '루이 오빠'란 말이 몹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여긴 회사가 초빙하는 컨설턴트나, 연구원, 외국 바이어들이 국내에 머무르는 동안 손님 접대용 숙소로 쓰고, 대외적인 기술 홍보 이벤트나 학회를 여는 장소야. 아마 루이형이 여기서 가장 장기 숙박해 본 사람일걸. 형이 여기서 숙박을 하면서, 주거 일지 보고서를 쓰고, 개선해야 할 점을 회사에 보고한다고 들었어. <그린 빌리지>라는 신제품을 직접 테스트하고 분석해 주고 계신 상황이지.”
“루이 오빠는 진짜 인생 자체가 컨설팅이구나! 돈 진짜 많이 버시겠다! 나무야, 너, 루이 오빠 만나보니까 어때?”
루이가 돈 잘 버는 남자임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나무와 또 엮어보려는 은혜의 간교한 저 눈빛. 나무는 딴소리를 했다.
“야, 여긴 완전 공원 같아. 산책로가 지붕 위까지 연결되고, 지붕이 가든이라니… 진짜 특이하다!”
“루이 오빠 어떠냐니까!”
“이게 그린 루프, 옥상정원이라는 건가? 단열효과도 있고, 지붕수명도 길게 해 준다는 거?”
“아 기집애. 자꾸 딴소리는… 네가 루이 오빠 얘기 나오면, 그렇게 말 돌리는 게 더 이상한 거야. 진짜 사심이 없으면, 사람이 어떻더라 왜 말을 못 해?”
“이러면 땅이 넓지 않아도 전원주택의 이점을 누릴 수 있겠다. 옥상에서 가든파티도 하고, 싱싱한 채소 키워서 바로 따 먹고, 공기도 좋고… 빨리 <태성 자동차>에서 사원들을 위한 단지를 지어줬으면 좋겠다…….”
“참, 나! 나무 기집애 진짜 수상해! 왜 말을 자꾸 돌리냐고…….”
건물 정면 입구의 유리문을 지나 들어서자, 자연광이 편안하고 쾌적한 느낌을 주는 로비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의 유니폼인지, 멋진 슈트를 입은 날렵한 몸매의 훈남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여기가 회사 숙소 입구인지 물 좋은 나이트 입구인지 순간 헷갈렸다.
“여기 왜 이렇게 경비가 많아? 것도 엄청 훈남들인데?”
“경비… 역할도 하긴 하는데, 호텔로 치면 벨보이 겸 컨시어지들이지, 손님 접대를 하지 않을 때는 주택 관리인 역할도 하고… 저래 봬도 보통 인재들이 아닐걸. 여기 일하려면 영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되고, 아마 여기 주거 시스템 파악하고 관리할 능력 되는 박식한 공학 전공자들일 거야. 이 오빠보다는 한 수 아래겠지만 말야.”
“뭐래. 야, 화분에서 흙 떨어진다. 똑바로 들어!”
이 와중에 오빠라는 택도 없는 호칭을 은근슬쩍 집어넣는 정현을 향해 은혜는 짜증 난다는 듯 핀잔을 주고, 나무는 쿡쿡 웃었다.
“야, 그렇게 은혜한테 오빠 소리가 듣고 싶냐?"
“은혜는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오빠라고 다 살갑게 불러주면서 나한테만 ‘야, 정현아’ 한단 말이야. 얼마나 섭섭한데.”
“오빠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들이니까 당연히 오빠라고 부르는 거고, 넌 나랑 동갑이잖아. 어떻게 오빠라고 불러주길 기대해? 어이없어 진짜!"
“너 오빠라고 할 때 얼마나 귀여운 줄 아냐? 그때마다 나 완전 질투 난다고! 나도 오빠라고 불러 줘. 불러 줘."
떼를 쓰기 시작하는 정현을 본체만체하고, 은혜와 나무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여자의 이런 무시에 익숙한 정현은 재빨리 포기하고 후다닥 달려와 일행 대표로 로비 데스크에 방문을 알리고, 루이에게 전화 확인을 거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꼭대기층인 5층으로 올라갔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똑똑 왔다는 신호를 주며 현관입구에 들어서자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등이 저절로 켜졌다. 밝은 불 빛 때문에 벽에 걸려있던 떡갈나무 그림과, 그림 아래 어울리게 놓여있는 그림 속 나무와 색감이 비슷한 테이블이 드러났다.
“들어와요!”
센서등이 켜졌다 꺼지는 것을 느끼고 루이가 안에서 외쳤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넓고 훤한 실내가 펼쳐지며 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루이가 보였다.
“형, 저희들 왔어요! 냄새 완전 좋은데요.”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서들 와요!”
정현이 가져온 화분을 어디 둘지 몰라 두리번거리자 , 루이가 부엌에서 나와, 정현과 함께 베란다에 꾸며진 허브 화단 옆에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형, 이 화단 형이 만든 거예요?”
“내가 만들었어. 요리할 때 신선한 허브랑 야채 쓰고 싶어서.”
“형 요리 진짜 잘하시나 봐요. 형 도대체 못하는 게 뭐예요?”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는 루이의 허브 화단을 보고 루이의 요리 내공을 감지한 정현이 베란다 한 편에 세팅되어 있는 야외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 화단 진짜 깔끔하고 멋져요. 여기 뷰가 장난 아니네요. 식물원에 온 것 같아요. 나무야! 여기 와서 이 화단 좀 봐바.”
거실을 둘러보던 은혜가 베란다에 얼굴을 쏙 내밀더니 루이의 화단을 보곤 흥분해서 나무를 불렀다. 은혜와 함께 화단을 둘러보는 나무의 눈에 확신의 빛이 스쳤다.
루이는 서둘러 부엌으로 돌아가서 뭔가 가득 담긴 그릇들을 오븐에 넣곤, 돌아서서 부엌 가운데 놓인 아일랜드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손님들에게 음료수를 권했다.
“여기 마실 것들 좀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테이블 위엔 와인과 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음료수가 즐비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그 옆 나무 쟁반 위에는 작은 송이로 잘라진 청포도 무더기와 함께 한입 크기로 잘라진 치즈, 허브가 뿌려진 크래커 등이 질서 있게 놓여 있었다.
나무의 눈에 루이는 딱딱한 컨설턴트의 옷을 벗고 고급 식당의 셰프 역을 맡기로 한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처럼 보였다. 부엌에 서 있는 루이의 움직임 외에 나무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엌을 배경으로 한 그의 모습과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숙해 보였다. 이 정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내는 출연자라면, 한 번 주사위를 던져볼 만하다.
바쁘게 음식 준비로 분주하던 루이의 눈길이 문득 나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무는 흠칫 놀라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루이의 따뜻한 눈빛이 해를 보고 난 뒤의 잔상처럼 그녀의 마음에 남았다.
“형, 도와드릴 거 없어요?”
루이가 요리실력까지 갖춘 완벽남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난 정현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씻고 부엌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거의 다 준비됐어. 메인 음식은 오븐에서 10분 뒤에 꺼내기만 하면 돼.”
“메뉴가 뭐예요? 냄새가 죽이는데요!”
“파스타 그라탱.”
“그게 뭐예요 형?”
“이탈리아 면요리, 파스타 위에 여러 가지 치즈를 얹어 오븐에서 구워 내는 거야.”
표면을 하얗게 덮은 뜨거운 치즈 아래에는 나선으로 감긴 스프링처럼 탄력 있게 생긴 파스타가 열기 가득한 토마토소스에 야채와 함께 버무려져 있었다. 치즈가 살살 녹아내리는 파스타를 한 입 가득 넣고 우물거리던 정현은 절망한 표정으로 포크를 식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형 진짜 요리까지 잘하시면 어떡해요! 사람이 한 군데 정도는 못난 구석이 있어야지!”
정말 낙담한 듯 리얼하게 구겨진 정현의 표정 연기에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루이 혼자 사는 공간 구석구석 따뜻하게 울려 퍼졌다.
얼마 만에 모여 먹는 밥인가. 정겨운 웃음소리. 도란도란 말소리. 컨설턴트로 취직한 이후 늘 혼자 지내왔던 루이의 외로운 가슴을 누군가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지는 듯했다.
루이의 음식이 마술을 부리는 듯했다. 그의 음식은 영혼까지 전해오는 깊은 따스함, 포근한 행복감 같은 감정들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낯선 집에서 처음 밥을 같이 먹는 어색함이 사라지고, 단란한 가족이 밥상을 공유하는 친밀감이 피어올랐다.
이 정도 요리 실력이라면 기획하는 방송에 너무나 적합한 매력적인 출연자가 될 것이다. 그는 출연제안을 수락할까?
“나무야, 요새 회사 상황은 어때?”
컨설팅 이후 개선된 점이 있는지 궁금한 정현이 물었다.
“컨설팅해주신 덕분에 진짜 많은 걸 깨닫고, 배웠어. 정말 감사했어요. 정현, 너도 수고 많았다며.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루이 형이랑 나랑 일주일 동안 잠 못 자고 진짜 힘들게 일했다는 것만 알아라. 더 이상은 루이 형이 너한테 부담 주지 말라고 눈치 줘서 말 못 한다.”
“전해주신 자료만 봐도 얼마나 일 많이 했을지 다 느껴졌어. 내가 진짜 이번에 기획하는 방송, 편성 따고 대박 나면 은혜 제대로 갚을게.”
“은혜는 이미 있으니까 됐어.”
“어우, 썰렁해.”
정현이 은혜의 어깨를 감싸 안자, 은혜는 눈을 흘기면서도 정현을 밀어내지 않았다.
“나무 너, 어제 먹방 기획 프레젠테이션은 잘했어?”
“새로 기획한다는 방송이 먹방이야? 누가 나와? <어촌 라이프> 나 <오늘 뭐 먹을래?>처럼 연예인들 나와서 예능 하면서 요리하는 거야? 아님 <저 나라 식당>처럼 다른 나라에 식당 열어 한식 전파하는 거야?”
“어제 나무가 회사에서 기획 프레젠테이션 했대. 나무야 빨리 말해줘. 궁금해, 궁금해.”
나무는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 했던 내용 그대로 루이와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실은… 제가 지난주에 루이 씨 만났을 때, 어릴 때 요리하기를 좋아하셨다는 이야기 들으면서 영감을 얻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기획의 주인공은 루이 오빠구나. 루이 오빠 출연하시면 넘 좋겠다!”
은혜가 김칫국을 마시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무의 기획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갑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루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방송에 출연해요?”
루이의 영문을 모르는 말과 표정에, 또 한 번, 모두 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나무가, 루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방송출연 한 번 고려해 보실래요?”
“하세요, 오빠! 오빠 나오면 인기 대박일 거예요. 연예인 뺨치는 미모에, 한국말도 완벽하시고, 요리 실력도 엄청나시고. 오빠, 방송하실 때, 저 허브 화단도 꼭 방송에서 보여주세요!”
나무는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오빠오빠 하는 걸 정현이 왜 거슬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계속 오빠거리면서 나무가 차마 제 입에 담지 못해 망설이던 그의 외모와 실력에 대한 칭찬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했다.
“루이 형이 출연하면, 우리도 출연할 가능성 있지 않아? 친구들과 함께 모여 밥 먹는 컨셉이라며…….”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너희들은 어때, 그런 일이 생겨도 괜찮겠어?”
“우린 넘 좋지!”
정말 떼 놓을 수 없는 한 쌍의 바퀴벌레다.
루이는 의외의 제안에 당황했는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티브이 출연이란 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일지도 감이 오지 않았지만, 고액의 비용이 걸린 계약에 묶여있는 상황이라, 티브이 출연 자체가 계약에 위배되는 일인지도 따져봐야 했다.
잔뜩 기대하는 듯한 나무의 눈빛을 보며 뭐라도 대답을 주어야 하겠기에 루이가 입을 열었다.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네, 긍정적으로 한 번 생각해 봐 주세요.”
나무의 말투에서 그녀가 진심으로 루이의 출연을 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무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되게 하고 싶다.
만약, 이 방송 출연이 <태성 자동차> 제품이나 <그린 빌리지> 홍보 효과를 낸다면… 그린 빌리지에서 촬영을 한다면 어떨까?
루이의 뇌리에 일을 되게 하기 위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루이는 회사에 제출할 홍보 기획안과, 그다음에 일어날 과정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회사에서 승인이 나면, 나무를 만나 회사와 조율된 자신의 기획안과 나무의 기획안을 대조하며 출연조건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
"나무 씨, 다음 주, 주중에 한 번 만나요. 방송출연에 대한 답을 그때 드릴게요. 아마도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더 빨리 결정 나면 더 빨리 전화드릴 수도 있어요.”
“네. 전 아무 날이나 퇴근 후엔 시간 괜찮아요. 어디서 뵐까요?"
“나무 씨 집이 옥수동이라고 했죠? 제가 나무 씨 집 근처로 갈게요.”
어쨌거나, 나무를 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반가운 것이었다.
모두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그라탱 그릇을 남김없이 말끔히 비웠다. 테이블을 정리한 후 루이는 커피 주문을 받았다.
“여기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으니까 뭐든 주문해요. 카푸치노, 라테, 모카커피 다 됩니다! 시럽은 바닐라하고 헤이즐넛, 캐러멜 있어요.”
“바닐라 라테요”
항상 좋아하는 게 확실한 은혜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전 아이스 캐러멜 라테요 형!”
나무는 이런 선택의 순간이 늘 어려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그녀는 절약이 인생의 모토인 듯 살아왔다.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최소한의 비용으로 신선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필터만 사서 커피를 직접 수동 분쇄해서 내려먹는 드립 커피만 쭉 마셔왔다. 비싼 커피전문점의 에스프레소 커피는 웬만하면 지나쳐 갔기에 뭘 주문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무 씨는 뭘로 하실래요?”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커피액을 뽑고 있던 루이가, 나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전, 에스프레소는 잘 모르는데요, 그냥 루이 씨가 권하시는 걸로…….”
“카푸치노 마셔 볼래요?”
나무가 커피의 고소한 향을 즐기는 편이라고 지난번 카페에서 말했던 게 기억난 루이가 카푸치노를 권했다.
“그럴까요?”
“카푸치노, 아주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
카푸치노를 마셔보겠다는 나무에게 루이가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맛있는 카푸치노를 약속했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그가 가만히 볼 때도, 이렇게 미소를 지을 때도 나무는 그와 눈이 마주치면 가슴속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남자. 나무가 얼음이라면 그는 햇볕 같았다.
나무는 정신도 차릴 겸 일어서서 거실 벽면의 책장을 살펴보았다. 일본어와 영어로 된 전공서적으로 보이는 책들이 즐비했다. 책장의 맨 윗 칸에 놓인 사진 액자들에 눈이 갔다. 초로의 남녀, 그리고 그 가운데 졸업가운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루이가 서 있었다. 졸업식 때 찍은 가족사진인 모양이었다. 또 다른 사진에는 졸업사진의 부부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부부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루이가 있었다.
루이가 커피를 쟁반에 담아 거실로 가져왔다. 나무도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여기 바닐라 라테, 이건 아이스 캐러멜 라테,......”
“아싸, 이건 내 거!”
정현은 루이의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긴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커피를 신나서 집어 들었다.
“나무 씨 건 카푸치노, 제 것도 카푸치노.”
“어머, 이…거…슨… 무슨 분위기? 둘이서 함께 카푸치노? 둘이서 둘이서…….”
루이가 카푸치노 두 잔을 나무와 자신의 자리 앞에 나란히 내려놓자, 은혜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놀리듯 말했다. 루이는 그저 미소로 넘겼지만, 나무는 자꾸 엮지 않기로 했잖아 하는 정색한 표정으로 은혜의 짓궂은 표정에 응수했다.
비워진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돌아간 루이는 케이크를 꺼내 위에 뭔가를 뿌리고 흘리더니 작은 접시와 포크를 함께 쟁반에 담아 들고 나왔다. 나무는 내내 그가 나오는 먹방을 시청하는 듯한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형, 설마 이 케이크도 직접 만든 거예요?”
“아냐, 이건 프랑스인 친구가 하는 베이커리에서 사 왔어. 나무 씨 기억하죠 <카페 몽펠리에>. 필립이 만든 케이크예요.”
“휴, 다행이다! 형이 케이크까지 만들었다고 하면 전 집에 가려고 했어요.”
루이는 케이크를 한 조각씩 정성스럽게 잘라 접시에 담아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아, 이 케이크! 이거 크레이프 케이크 맞죠!”
“넌 어떻게 이 케이크 이름을 알아? 누구랑 먹은 거야?”
“먹긴 뭘 누구랑 먹어! 티브이에서 요리사가 만드는 거 본 거지!”
정현이 눈을 흘기며 은혜의 얼굴 가까이 포크를 들고 다가가자, 은혜가 한 손으로 정현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티브이로 보니까 만드는 과정이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오! 맛있다. 음, 이 맛 죽음이다!”
“형, 이건 그냥 입에서 살살 녹네요. 저 한 조각 더 먹을게요.”
“안돼, 그만 먹어! 요새 너 배 나오려고 해! 우리 관리해야 해.”
달달한 음식에 사족을 못쓰는 정현이 애교를 떨어보았지만 조만간 치를지 모를 결혼식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은혜는 케이크보기를 돌같이 하라며 단칼에 잘랐다.
나무는 카푸치노와 크레이프 케이크의 조화로운 맛을 음미하며 별세계를 느끼고 있었다. 정성스러운 음식이란 건 기억 속 할머니의 음식이나 은혜가 고향집에서 가져오는 명절음식뿐이었던 그녀에게 루이가 주는 음식들은 신세계였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정성 가득한 매력적인 맛과 향.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커피도, 케이크도, 정말 맛있네요!”
루이의 집에 들어선 이후로, 긴장감이 가시지 않아 딱딱해 보였던 나무의 표정이 이제야 편안해 보였다.
좋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음식을 만들어 주는 행복감을 루이는 가능하면 자주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가 밥당번 자주 할 테니까, 마지막주 토요일 아니라도 언제든지 와요.”
루이가 다음 만남을 제안하자, 먹을 것 다 먹고 배를 두드리며 앉아 있던 정현과 은혜가 나무의 눈치를 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루이가 나무를 만날 다음 기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적극 돕겠다는 의지가 두 친구의 눈빛에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 다음 주에도 루이 오빠네서 모일까?”
은혜가 장난인 듯 장난 아닌 표정으로 모두에게 동의를 구했다.
“너무 요리 잘하는 형이랑 비교되는 거 싫지만,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실 것 같으니까 콜!”
“나무야, 네 생각은 어때?
은혜가 꼬드기듯 물었다. 또다시 선택의 순간. 나무는 자신의 한 마디에 결정이 달린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다시 긴장하는 나무의 표정을 보고, 루이가 나섰다.
“괜찮아요. 시간이 안되면, 다음에 만나요. 부담을 주려는 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 자꾸만 폐를 너무 많이 끼치는 것 같아서요.”
누군가의 신세를 반복해서 진다는 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다음으로 나무가 질색하는 일이었다.
“루이 오빠가 먼저 오라고 하신 거잖아, 오빠도 우리랑 만나는 게 좋으시니까 또 초대를 하시는 거지. 그죠, 오빠?”
“그럼요. 우린 친구니까,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은혜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얄밉도록 뻔뻔한 표정으로 루이에게 동의를 얻어가며 응수했다. 나무는 신세 지고 있다는 죄책감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솔직히 말해 이 만남이 필요했다. 할 수만 있다면, 루이와 친구들과 자주 보고 싶었다.
전엔 친구들과의 밥 모임이 그냥 편하게 모여 있는 밥 나눠 먹던 아무 생각 없는 자리였다면, 먹방을 기획하는 지금은, 친구들과 만나 밥을 먹을 때, 즐거운 분위기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방 아이디어를 얻는데 영감을 얻는 부분이 있었다. 작가가 취재가 필요하고, 음악가가 뮤즈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짜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는 걸까?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까 괜찮은 걸까?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먹방 기획만 생각하자! 그것부터 성공시키고 나서 모든 신세를 거하게 갚자!
“그럼… 다음 주에도… 그땐 저희가 준비해 와서 한국음식 맛 보여 드릴게요.”
할 줄 아는 것 하나도 없으면서, 이번엔 한국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체면을 세우고 있는 나무를 보며 은혜는 속으로 한숨이 터졌지만,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것보단 뭐라도 준비해 오는 게 나을 듯싶기도 했다.
“저는 요리해서 친구들 먹이는 걸 좋아하니까, 부담 느낄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나무 씨가 만드는 한국음식도 먹어보고 싶긴 하네요.”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는 나무의 말에, 루이가 기대하는 듯 반응하였다. 순간, 나무는 자신이 대책 없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엇… 기대하실 만큼은 아닌데…….”
어떡하지? 하… 이런 저급한 실력으로 한국의 맛을 어떻게 보여주냐고!
아냐 아냐! 방법이 있다! 해야 되면 하는 나잖아!
나무의 뇌리에 정다운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최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