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루이의 나무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 시내 도로 상황은 괜찮은 편이었다. 나무는 뿌듯한 마음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간간이 번화가 골목길 사이에서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사람과 차량에 깜짝깜짝 놀라기는 해도, 이젠 운전 경력 2년째, 꽤 운전에 자신이 붙었다.
'하면 하는 거야!'
잘 못하는 일이라도 해야 하면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온 나무였다. 회사가 차와 기름값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 나무가 기획한 드라마 <안아주는 남자>가 대박치고 회사에 목돈이 들어온 때문이었다. 덕분에 교통비 절약은 물론이고, 방송국과 소속사, 작가 사무실, 여기저기 쫓아다녀야 하는 것이 일상인 ‘이 피디’의 기동성이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회사가 월급을 못 주는 상황이 되면, 얘도 팔아야 할지 모른다.
'제발 얘를 팔지 않게 해 줘!'
나무는 회사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조석 위에 놓인 바인더를 간절히 기도하듯 안아 들었다. 루이가 만들어준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나무는 확신을 얻었다. 지금까지의 기획이 왜 거절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았고, 앞으로의 기획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감이 왔다.
나무는 설문조사 분석 자료를 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 티브이를 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밥 먹을 때, 출근길, 집에 와서 잠들기 전 짧은 시간,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 줄, 친구와 함께 있는 듯한 즐겁고 편안한 자연스러운 방송…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면서, 억지스럽지 않고, 즐겁고, 흥미롭고, 친근한 그런 방송…….
나무는 어젯밤 잠도 안 자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구 낙서한 후, 파워포인트로 깔끔히 정리해 새로운 기획안을 완성했다.
'제발, 우리 회사를, 날 좀 살려줘!'
***
“사장이 직원 커피 타 놓고 기다려서야 되겠냐?”
“사장님 지금 저한테 커피를 열 잔 타 주셔도 충분하지 않아요.”
나무는 들고 온 바인더를 깜짝 생일선물처럼 사장 앞에서 짜잔 펼쳐 보였다. 뭔가 나무가 신나 있다는 걸 느낀 남 대리, 지훈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게 뭐시냐?… 보자…….”
사장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팔을 쭉 뻗어 나무가 내민 바인더를 최대한 눈에서 멀리 한 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정독했다. 이럴 땐 좀 노인네 같긴 하다고 나무는 생각했다. 그냥 겉으로 보아서는 사장이 60을 바라보는 나이인지 아무도 몰랐다. 켈빈 클라인 쫄바지에, 유행하는 디자인의 뿔테 안경, 홀리스터 후디 입고 루이비통 슬링백 매고 다니는 사장은 어느 화려한 거리에 내놔도 전혀 빠지지 않는 감성 충만 럭셔리 꽃중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멋져도 노화를 피해 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하셨어요? 오… 예능 기획이네요!”
“내가 이번 기획은 목숨 걸었거든. 주말 내내 자료조사하고, 어제 새벽 세 시까지 잠도 안 자고 만들었다고.”
“주말에 저 부르시지… 그럼 저도 같이 목숨 걸고 도와드렸을 텐데…….”
지훈의 말에서 느껴지는 과한 열기에, 사장이 기획안을 읽다 말고, 그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원래 남 대리가 이 피디한테 이렇게 충성하는 스타일이었나?”
'충성은 개뿔.'
지난달 지훈이 대상포진에 걸려,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며 회사를 열흘 남짓 나오지 못했다. 혼자 사는 어리바리한 부하직원이 걱정돼서, 나무가 바쁜 와 중에도 신경을 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한약도 지어다 주고, 면역에 좋다는 음식들도 사다가 그의 자취방 냉장고에 채워주었다. 갑자기 아프게 되는 바람에 그가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도, 나무가 대신 꼼꼼하게 처리해 주었다. 지훈이 다시 회사로 복귀한 이후부터, 그는 나무 뒤를 누나밖에 모르는 남동생처럼 졸졸 쫓아다녔다.
“남 대리, 너는 몸에 좋은 음식 좀 먹고 몸이나 챙겨.”
사장이 아까 지훈을 보던 의아한 시선 그대로 나무에게 갖다 꽂았다.
“원래 이 피디가 이렇게 누구 몸 챙겨주고 그러는 스타일이었나?”
사장도 오해도 문제지만, 지훈의 저 그렁그렁 쳐다보는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이 나무를 더 기함하게 만들었다.
“아, 그 젊은 나이에 대상포진 걸리는 사람이 어딨어! 남 대리가 그렇게 오래 아파서 사람 놀래키니까, 자꾸 걱정돼서 쉬고 먹으라는 거잖아. 빨리 체력 회복해서, 목숨 바쳐 일해!”
“이 피디님이 진짜 따뜻한 분이신 거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요. 존경해요 정말. 저는 정말 이 피디님 위해서 충성할 거예요.”
나무는 올라오는 혈압을 꾹 눌러 참았다. 몸 안 좋은 사람 스트레스받을까 봐 소리 지르기도 겁이 났다.
“아 됐고! 이 기획안에 집중 좀 해주세요. 진짜 잠 안 자고 힘들게 만든 거라니까……!”
“야! 이 피디! 아무리 그래도 잠도 안 자고 말이야… 그러면 기특하잖아. 이렇게 일처리가 빨라서 내가 이 피디만 믿는다니까. 보자…….”
“오! 대단한데요!”
지훈은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나무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기획안을 지지하는 리액션을 보였다.
“야, 우리 이 피디 언제 이런 자료들을 다 모으고 분석했대?”
월급도 조금밖에 못 주는 작은 회사에서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는 나무에게 늘 미안한 사장은 한 번도 나무에게 철저한 시장분석과 자료수집 같은 걸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큰 제작사에 종사하는 지인들, 후배들이 귀띔해 주는 대로, 대세들이 몰려드는 판을 따라가며 시류에 편승할 수 있게 문을 열어 끼워 넣어 주었을 뿐이다. 특히 최소의 제작비와 비싸지 않은 작가들을 데리고 작업할 수 있는 막장 드라마가 가장 만만하고 꾸준한 수익이 보장된다 판단했으므로, 회사를 세운 이후 내내, 중장년층 주부 시청자층을 겨냥한 아침 드라마 위주로 제작해 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더 이상 방송국에서 아침 드라마 기획을 쳐다보지 않는 것 같다는 게 회사가 당면한 문제였다. 아마도 시류가 바뀌고 있거나, K 문화 대국 시청자 수준에 맞추어, 더 비싼 작가를 써서 좀 더 참신한 소재의 아침 드라마를 가져오는 회사들이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미디어 문화 흐름에 대한 감각이 예전만 같지 못함을 박만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 <드레곤 미디어>라는 대형 제작사의 연출 피디로 잘 나가는 후배, 김기만이 있어 그나마,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큰 제작사의 움직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요즘 박만수만 보면 먹방 예능 해보라고 난리였다.
나무가 가져온 기획안을 살펴보며, 박만수는 희망의 빛을 본 듯했다. 제작비용, 작가 섭외등 따져보고 거쳐야 할 관문이 많겠지만, 일단은 이 기획안이 주는 어떤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친구들을 만나 같이 밥을 먹는 듯한 자연스러운 친근한 느낌을 주는 관찰 예능 컨셉인데… 요리를 잘하는 출연자들이 나와서 친구 혹은 연인을 위해 요리를 한다… 그 요리에는 각자의 감동적인 사연이나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 감성적인 내레이션으로 감동을 더한다… 느낌 좋은데. 아주 좋아! 이번 주 내로 프레젠테이션 할 수 있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나무는 자신의 목에 걸린 USB를 가리켜 보이며 자신 있게 씩 웃어 보였다. 나무는 회사만 오면 자신감이 급상승하다 못해 다소 뻔뻔해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느꼈다. 고래를 기 살리고 춤추게 해서 없는 실력도 키워 부려먹는 일에 굉장한 자질을 보유한 사장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신임을 받고 지낸다는 것은, 가끔 월급이 밀리는 회사라 할지라도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고 싶을 만큼 나무에게 큰 보람과 행복감을 주었다.
“이런 자연스런 예능 시나리오 쓸 만한 작가가 누가 있지?”
“몇 년 전에 대박 났던 <집밥 도사> 기억나세요? 그 프로그램 시청률 처음에 엄청나게 올렸던 작가가 이미도라는 분이었거든요…….”
나무는 기획을 하면서 점찍어 두었던 작가의 이름을 꺼냈다.
“지금 당장 빨리 연락해 봐. 작가 섭외하고, 미팅 날짜 잡고, 김 피디도 불러서 기획안 모니터 작업하자. 이번엔 감이 좋다야! 될 것 같아!”
***
# 며칠 후, 엠컨설팅 회의실
“아주 좋은데요?”
나무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기획안 모니터 작업은 이미도 작가의 긍정적인 첫마디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이 작가는 사정이 생겨 앞서하던 프로그램에서도 하차를 하고 본가가 있는 미국에 다녀와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무를 만나보곤 기획안이 정말 마음에 든다며, 바로 함께 일해보자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갑자기 잡힌 이른 아침 미팅임에도, 별말 없이 나와 주었다.
“뭐, 스토리만 자연스럽게 잘 이끌고 나가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런데 요리 잘하는 연예인 출연자는 섭외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저희 <드레곤 미디어>도 지금 요리 잘하고 관찰 예능에서 매력 발산되는 연예인들 일 순위로 섭외하는 상황이거든요…….”
김 피디의 말을 들어보니, 연예인들을 섭외하려면 대형제작사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 모양이다.
“연예인보다는 외국인 쪽이 끌려. 출연료도 그렇고 섭외가 쉬운 것도 이점이지만, 친구들과 모여 집밥 해 먹는 스토리는, 타국 살이 하는 외국인 쪽이 더 느낌 있지 않아? 이 피디하고 남 대리는 어떻게 생각해?”
사장은 아무래도 현재 회사 자금 상황이 최악인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실은 제가 처음에 한국말 잘하는 호감 외국인을 생각하면서 기획을 했어요. 아직 확실한 출연자가 확보되지 않은 데다, 외국인의 경우 연예인에 비해 화제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일단 연예인 출연자와, 외국인 출연자 두 가지 옵션을 다 기획안에 넣었어요.”
“뭔가 반전 매력이 있어서 화제성도 있고 요리도 잘하는 외국인을 찾는 게 관건이겠네요. <드레곤 미디어>에서 제작하는 <세계의 청년> 가끔 시청하는데요, 거기 나오는 사람이 방송 외에 다른 전문적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반전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더 멋있게 보이더라고요. 가령 업계에서 잘 나가는 기업 컨설턴트인데, 요리를 잘하고 자상한 매력이 있는 외국인이라던가…….”
지훈이 마치 루이를 만나본 것 같은 묘사를 해서 나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남 대리 생각이 일리 있네. 근데, 그런 출연자를 어디 가서 찾아?”
'제가 찾아 놨는데요.'
자랑하고 싶지만, 아직은 확실하게 결정된 게 없으니 말을 아껴야 한다.
“커리어, 인품, 외모가 모두 매력적인 외국인의 사연 있는 요리. 적당한 출연자만 찾을 수 있다면 저도 그쪽이 더 끌려요. 요즘 사람들이 외국음식, 새로운 음식에 대한 관심도 많잖아요. 음식 레퍼토리도 더 풍부할 것 같고, 한국이라는 타지에서 생활하며 친구들과 모여 밥 해 먹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한국인 시청자들이 위로받고 배우는 게 있기도 하겠구요. 혹시 요즘 외국인이 요리하는 먹방 다른 방송사에 시도한 적 있나요? 제가 미국에서도 한국 방송을 많이 챙겨보긴 했는데 혹시 놓친 방송이 있나 싶어서요.”
이 작가의 질문에 김 피디는 드디어 자신이 끼어들 타이밍이 왔다는 듯, 줄줄 아는 것을 풀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하는 먹방은 일본인 ‘리아’가 전국 맛집 돌아다니면서 진행했던 <리아의 맛집> 하고 프랑스인 ‘마누엘’이 고정 출연하면서 한국음식 배우던 <한국의 맛 탐험기>가 있었죠…….”
“그 프로그램들 다 시청률이 괜찮았었어.”
“일단 먼저 그 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이 좋았던 요인과 한계점에 대해 분석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사장이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무가 새로운 기획안을 들고 오더니, 사람의 분위기마저 달라진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아까 기획안 자료 준비한 것에서도 느꼈지만, 뭔가 더 철저히 분석하고 제대로 연구하고 기획하려고 마음먹은 게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방송계 동향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김 피디가 썰을 풀기 시작했다.
“일단 <리아의 맛집>은 리아 한국어 말투가 무척 재미있었어요. 이미지도 좋았고 외모도 웬만한 여배우들 뺨치고 엉뚱한 매력이 오랫동안 식상하지 않았던 게 시청률에 한몫했던 것 같아요. 초저녁에 하는 시간대라 가족들이 밥 먹으면서 시청하기도 좋았고. 그런데 갈수록 ‘리아’의 원맨쇼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되어버리곤, ‘리아’는 떴는데, 리아에서 다른 엠씨로 바뀌곤 프로그램은 점점 사그라졌죠. 그리고 <한국의 맛 탐험기>는 프랑스 청년 ‘마누엘’이 혼자 한국에 살면서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어보고 한국 맛에 빠져드는 컨셉으로 했는데, 처음엔 잘 생긴 애가 한국어도 잘해서 20-30대 여성 시청자들 상대로 반짝하다가, 얘가 요리 실력에 한계가 있는 데다, 한국 여자들 쉽게 보고 사생활 난잡하다고 소문이 안 좋게 나서 말이야. 사실, 내가 걔를 첨에 딱 보고 난봉꾼인걸 알아봤었다니까…….”
김 피디는 사장님이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우자 높임말에서 반말로 돌아섰다. 그는 아는 거 다 풀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답게 아는 대로 줄줄이 필요 이상으로 답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들은 끝없이 내리는 눈처럼 처음엔 좋다가 갈수록 질리는 맛이 있었다.
나무가 문득 지훈을 돌아보니, 졸려서 실신 직전의 상태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풍선 인형처럼 허우적대며 졸고 있는 지훈이 안쓰러워 나무가 귓속말로 제안했다.
“너무 힘들면, 남 대리 자리에 가서 좀 쉬어.”
얼굴도, 눈도, 새빨개진 남 대리가 곧 울듯한 표정으로 나무를 쳐다보았다.
'제발 감동받지 말라니까. 너 또 아프면 나 무지 귀찮을 것 같아서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있는 거라고.'
“빨리 나가.”
나무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지훈의 등을 떠밀고 나서야, 그는 마지못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김피디가 방을 나가는 지훈의 뒷모습에 잠시 눈길을 주는 사이, 작가가 끼어들어 화제를 전환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김 피디님. 이제 다른 성공한 프로그램에서 가져와야 할 것들과 차별화 전략에 대해 나누어 보죠.”
이미도의 칼 같이 잘라 정리하는 태도에 나무는 탄산수가 위벽을 훑고 지나간 듯 속이 시원했다. 어쩐지 이 작가와 잘 맞을 것 같은 흡족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가 이 작가가 던져준 바통을 이어받아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김 피디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출연자 자체의 매력, 인성이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요리도 상당히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요리 레퍼토리가 풍부해야 방송 수명이 길어질 테니까요. 그리고 차별화 전략은 감성적인 연출과 자연스러운 감동을 주는 스토리로…….”
“일단 다른 거 다 떠나서 출연자 매력이 제일 중요해. 특히, 초반 몇 화는 진짜 잘생기고 말도 잘하는 끼 있는 애들이 몰입감을 확 높여 놓아야 해. 한국말도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요리는 요리사 대기시켜 놓고 가르치면서 가도 되니까…….”
나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끊고 들어오는 김 피디의 말투에는 많은 경험으로부터 오는 자신감을 넘어서서 너희들이 뭘 아냐,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오만함이 드글거렸다.
때마침 사장이 자리로 돌아오고 연이어 지훈도 커피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쉬라고 해도 쉬지 못하고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었다.
지훈이 방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나무 앞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아 또, 얜 왜 이래…….'
그런 미묘한 순간을 놓칠 사장이 아니었다.
“남 대리한테는 이 피디가 젤 높은 사람인가 보네. 이 피디한테 첫 커피를 딱 안겨주네… 옆에 있는 사장 질투 나게 시리…….”
지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됐어요. 이거 사장님 드세요.”
나무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사장 앞으로 밀었다.
“어우 됐어. 나는 진심으로 날 위해 주는 거 아니면 안 마셔!”
나무가 박만수와 커피 한 잔을 놓고 시답잖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이 작가는 김 피디가 커피를 받아 들고 호로록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뚫고 들어왔다.
“요리 가르쳐가며 하는 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가장 중요한 관건이어야 해요. 그래야, 자연스러운 진심,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음식에 담기죠. 시청자 수준이 높아져서, 짜놓고 억지로 연기하는 행동들은 금방 눈치챌 거예요. 게다가 출연자들이 전문 연기자가 아닌 경우는 더 그렇죠. 아까 이 피디님이 말씀하셨던, 자연스러운 감동으로 차별화하자는 거 좋아요. 물론, 김 피디님이 말씀하신 대로 외모나 한국어 말투가 매력 있는 주인공을 찾는 것도 중요하고요. 그래서 말인데 캐스팅 후보 생각해 놓은 사람들 있어요? 저는 캐스팅 후보가 먼저 정해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직접 인터뷰해서 감동 포인트들을 찾고 스토리를 출연자에 맞춰 잡아나갈 수 있으면 해요.”
“제가 생각하는 후보가 있긴 한데, 출연 의사를 아직 물어보지 못했어요. 다음 주까지 출연자 후보 파악해서 따로 말씀드릴게요.”
“이 작가는 희한한 방식으로 일을 하네! 미국식인가? 작가 수업 어디서 받았어요?”
이미도의 딱 부러지는 교통정리도 신경이 거슬리고, 나무와 이미도가 딱딱 호흡이 잘 맞는 것도 눈꼴사나운 김 피디가 작가의 출신성분을 발가벗겨보겠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김 피디가 이미도 작가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사장이 김 피디 쪽으로 턱짓을 하며 나무에게 요란한 눈짓을 보냈다.
좋은 타이밍이 아닌데 싶었지만, 나무는 사장이 시키는 일은 웬만하면 그대로 시행했다. 권위자에게 쉽게 굴복한다기보다, 늙고 고생한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도, 일단 순종하고 보는 자식의 철든 마음과 비슷한 심리였다.
“왜 저에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만하죠.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마음 불편하고 싶지 않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끝내죠.”
작가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더 이상 김 피디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누가 뭐랬다고 이렇게 정색을 해요… 가만 보면, 작가들이 다 은둔형 외톨이 타입이라 사회생활을 잘 못해…….”
자꾸 눈짓을 하는 사장의 뜻 - 미팅 끝나기 전에 말 꺼내라는 - 을 단박에 눈치챈 나무가, 김 피디와 작가, 두 사람의 언쟁을 끊고, 끼어들었다.
“김 피디님, 혹시 <드레곤 미디어>에서 제작하시는 <세계 청년>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요리실력 갖춘 인맥 가진 사람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으세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렇다니까! 자기 발로 뛰기 전에 기댈 생각부터 해요. 숙제는 자기가 먼저 한 후에 어른한테 봐달라고 해야지.”
이미도를 향하고 있던 적대감의 불똥이 나무에게 파바박 튀었다.
“좀 알아봐 줘라. 너한테 도움 구하라고 내가 시켰다. 우리 이 피디같이 열심히 하는 사람 없다. 주말 내내, 잠도 못 자고 일한다.”
“우리 이 피디님, 기댈 생각부터 하는 기회주의자 아니에요. 혼자여 열 사람 몫 일하는 정말 성실하고 훌륭한 분이세요!”
지훈은 나무가 작년에 직접 뽑은 부하직원이었다. 착하고 성실해 보여서 뽑았는데,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를 잘 못 가리는 게, 큰 흠이었다.
“얜 또 뭐야! 아이고 형님, 직원들 군기 잘 잡으셔야겠어요. 똥오줌을 못 가리네, 젊은 사람이… 직원들 감싸주기만 하지 마세요, 제발!”
애교 넘치는 다방 마담처럼 유들유들 사장이 합세를 하고, 지훈이 나서 나무를 감쌌지만, 김 피디는 나무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김기만은 박만수의 학교 후배지만 엠컨설팅의 자문 역할을 하고 배우 캐스팅이나 제작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는 갑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갑질을 일삼는 편이었지만 특히 나무에게 가장 심하게 이빨을 세우고 덤벼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배인 박만수가 나무에 대한 신임이 두터운 것이 꽤나 못마땅한 듯했다.
나무 또한 김 피디를 백 프로 믿지 않았다. 그가 속한 <드레곤 미디어>가 작은 제작사들을 하나씩 삼키고 있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했다. 회사의 중요한 인맥임에는 틀림없으나, 꾸역꾸역 시간을 내서 부를 때마다 달려오는 진짜 속셈이 뭘까 하는 생각이 항상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혼자 잘해오고 있었는데, 괜히 김 피디의 인맥에 욕심을 내는 사장의 장단을 맞춰주다 당하고 말았다. 김 피디 옆에 찰싹 붙어 최대한 얻을 거 다 얻어내라는 사장의 압력 때문에 김 피디한테 부탁하는 일을 피해 가기는 힘들었다. 말 섞을 때마다 매번 경험하는 것인데도 나무는 그가 ‘넌 나보다 한참 모자란 인간이야’라고 독 묻혀 던지는 말들이 뜨겁고 싫었다.
하지만 오늘은 신기하게도 나무의 마음이 별로 상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기쁨이 그녀의 가슴에 퐁퐁 샘솟고 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누가 뭐라 하든 이번 기획 시나리오는 세계적인 컨설턴트의 컨설팅을 바탕으로 탄생한 만큼, 나무는 자신이 있었다. 내일, 토요일에 나무는 멋진 출연자 후보와 일생일대의 담판을 지어보리라 결의를 굳혔다.
***
필립은 동그란 마요르카빵이 촘촘히 정렬된 묵직한 트레이를 오븐에서 꺼내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여러 개의 오븐이 돌아가며 삐 소리를 낼 때마다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우는 검은 속으로 석면 장갑을 낀 팔을 넣어 빵 트레이를 꺼내는 일만 한 시간째. 필립이 빵 트레이를 겹겹으로 얹은 제과점용 카트를 부엌에서 가지고 나오면 은경과 젊은 여자 직원이 한 김 식은 빵을 일부는 유리 진열대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베이커리용 비닐봉지에 담았다.
루이가 주문했던 케이크를 찾으러 <카페 몽펠리에>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필립이 부엌에서 마지막 카트를 부엌에서 밀고 나오는 중이었다. 빵에 남아 있는 열기가 뜨겁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고가 많네, 필립!”
“루이, 왔어?”
“내가 주문한 크레이프 케이크 준비 됐지?”
“여기. 이것 때문에 내가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프랑스 사람이 직접 만든 거 여기서 먹기 힘든 거 알지!”
“수고했어! 케이크 값은 내가 제대로 쳐줄게!”
“초콜릿 시럽하고 코코아 가루도 따로 담았어. 먹기 직전에 이렇게 돌려가면서 뿌려서 내.”
<미키 하우스>에서 필립이 아침으로 종종 종이장처럼 얇은 크레이프를 굽곤 했었다. 크레이프 케이크는 그런 얇은 종잇장을 수십 장 구워 사이사이에 생크림을 발라가며 차곡차곡 쌓아 만드는 것이다. 섬세한 정성의 맛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제대로 된 맛을 아는 프랑스인이 오랜 경험을 쌓아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이니 확실할 터였다.
“고마워. 그럼 수고!”
“루이!"
필립이 루이를 불러 세웠다. 루이가 뒤돌아 보자, 필립이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왜?”
“지난번 그 여자랑 잘 만났어? 케이크도 그 여자랑 같이 먹는 거 맞지?"
루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필립은 크레이프 케이크를 만들며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궁금증을 터뜨렸다.
“그 사람 이름 나무야.”
“나무? 5년 전에 우리가 만났던 그 나무?"
사람 얼굴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도, 그 이름은 필립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을 듣고, 필립은 무척 놀랐다.
“울랄라… 세상에… 어떻게 찾았어?”
“우연히. 은혜 씨도 만났어. 나무 씨 친구 기억나지?”
“기억나지. 사교적이고 똘똘하던 여학생.”
“내가 지금 시간이 좀 없다. 조만간 너 쉴 때 한 번 들를게.”
“알았어. 조만간 만나서 속시원히 이야기 듣자."
루이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이며 돌아서 카페를 나왔다. 루이는 서둘렀다. 나무 일행이 곧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간다.
이제 프렌즈 밥 모임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같이 먹는 시간, 마음을 나누는 시간, 그 시간이 루이는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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