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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13. 2023

6. 나 그 사람 소개해 줘

[소설] 루이의 나무 

한국행을 결심하고 루이는 긴 휴가를 신청했다. 그동안 자주 만나지 못했던 오사카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어른들은 루이가 한국행을 결정한 것에 대해 경험 쌓는 과정으로 덤덤히 받아들이는 반면, 쥰은 엄마 따라가겠다고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열렬히 반응했다. 


“형, 한국에 나도 데려가면 안 돼? 아무래도 대학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형. 형마저 이 일본땅에 없으면, 나 진짜 이렇게 계속 못 살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이제 막 대학 들어간 녀석이.”


쥰은 작년 봄 오사카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다. 작은아버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억지로 대학과 전공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루이가 지금 상황에서 쥰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쥰은 이제 성인이고,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자신이 책임지는 법도 배워야 할 것이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듯한 쥰이 마음에 걸렸지만, 루이는 10월 아름다운 오사카의 가을 풍경을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루이가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파견회사 <태성 자동차> 소속 직원이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은 루이가 한국어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일본어로 ‘환영합니다. 오카다 루이 컨설턴트님’이라고 쓰인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루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일본어 인사로 말을 건네왔다.


“하지메 마시떼, 와타시와 오정현 다이리 데쓰. 고래까라 아나타오 호사시테 아키마스. 도오죠 요루시쿠 오네가이 모우시아게마쓰.” 


앞으로 자신의 직속 부하로서 컨설팅 업무를 보조할 오정현 대리. 고급 일본어를 구사하는 정현의 생글생글 웃는 인상이 밝고 사교적으로 보였다. 루이는 그가 다소 낯을 가리는 자신의 성격을 보완해 줄 적절한 인물로 생각되었다.  


“반가워요, 저는 시스템 컨설턴트 오카다 루이입니다.”

“앗, 한국말을 하시네요. 혹시 한국분이세요?”

“아닙니다. 일본인입니다. 한국말을 몇 년 동안 배웠습니다.”

“와, 어떻게 몇 년 만에 이렇게 완벽하게 한국어를… 대단하시네요!”

“오대리님이야말로 일본에서 공부했어요? 일본어가 유창하네요.”

“감사합니다. 일본에서 공부한 건 아니고요. 저도 대학 때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서 몇 년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함께 잘해 봅시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컨설턴트님.”

“컨설턴트님이라… 그 호칭은 좀 비효율적으로 길고 발음이 어려운 경향이 있네요.”

“다른 호칭으로 불러드릴까요?"

“그건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일정대로 움직일까요?”


정현은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세련되게 소화한 패션 스타일에 한 번, 배우 뺨치게 잘생긴 외모에 한 번, 나이도 자신의 또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도 기함할 일인데,  유창한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고 대화를 이끌자 정현은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정현의 머릿속에서 일본인 컨설턴트라는 대상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비위 맞추기 힘든 까다롭고 꼬장꼬장한 중년 일본 남성을 각오하고 있던 긴장감이 탁 풀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 컨설턴트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호감이 싹터 올랐다.


루이는 배려심과 유머감각까지 갖춘 정현이 부하직원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같이 일해 보니, 정현은 탁월한 외교 능력에 일본어 능력뿐 아니라 산업공학적 지식까지 깊이 있게 두루 갖춘 다재다능한 재원이었다. 


정현 또한 여러 면에서 실력이 출중한 루이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고작 몇 살 위일 뿐인데도, 워낙 공학 지식이 해박한 그가 교수님처럼 느껴지곤 했다. 정현은 그가 가르쳐 주는 산업이론과 효율적인 시스템 구축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이 기회가 감사했고, 감사한 만큼 열심히 배워나갔다. 


컨설턴트로서 탁월한 리더십과 문제 분석력을 가진 데다 한국어 능력까지 갖춘 루이에 대해 존경심과 호감을 가지게 된 사람은 정현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테슬라>의 독주를 막고, 신재생에너지 자동차 산업의 샛별로 떠오르고 있는 <태성자동차>를 일구어낸 주인공, 이창홍 사장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회사 고위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오는 말들 또한 모두 루이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실력자를 모셔온 것 같아.” 

“공장 불량품 제조율이 거의 제로로 떨어졌다는 이야기 들었나? 자동차 한 대 완성에 걸리는 작업시간도 짧아지고. 일 시작한 지 6개월도 안 되었잖아.”

“오카다 이 친구, 새파란 컨설턴트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야. 젊은 친구가 공장 직원들 통솔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 

“공장을 움직일 수 있는 컨설턴트라야 일이 되지. 지금까지 맥킨지니 뭐니 유명회사 실력 있는 컨설턴트랍시고 와서는 사무실에만 앉아 뜬구름 잡는 이론만 지껄이고 숫자놀음만 하다 가는 인사들이 좀 많았나. 공장에 직접 나가서 기름때 두려워하지 않고 솔선수범해서 일하는 컨설턴트를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하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서 공장직원들과 소통을 잘하는 게 큰 장점이야."


이창홍은 그런 평가들을 빠짐없이 다 듣고 있었다. 그는 이번 계약이 끝나면 이 능력 있는 컨설턴트에게 어떤 제안을 할까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더 높은 자리에서 회사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인만큼, 루이가 한국에 잘 정착하도록 정성껏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 파격적인 계약조건과 함께 무상으로 고급 주택과 자동차까지 제공할 만큼, 컨설턴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대우를 하고 있었다.


그런 눈치를 예민하게 느끼는 간부들 중에 혼기가 찬 딸을 둔 이들이 루이의 배경과 사생활을 은밀히 조사해 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들의 1차 접선 상대는 주로 정현이었다.


“오카다 컨설턴트 말일세. 애인 있나? 사생활에 대해서 좀 아는 거 있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옆에서 보기에는 없다고 확신됩니다.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불철주야 일만 하고 계시거든요.”


눈치 빠른 정현은 괜한 소문을 차단하고 루이를 보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철벽을 쳤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루이는 자상한 형처럼 정현을 아껴주고, 배려해 주는 좋은 상사였지만, 아직 정현은 루이가 일 외에 다른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본 적도, 그가 업무 이야기 외 사적인 이야기를 터놓는 것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날 밤 야근 전까지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직장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봄밤, 푸른 어둠이 창가에 내려앉고 있는 시각. 봄기운이 꽃나무 가지 봉우리마다 간질이며 청춘들의 마음에 연애세포를 틔워내는 밤임에도, <태성자동차> 본사 사무실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LED 평판등 불빛이 환했다.


“타다닥, 타다다다닥,......”


몇 시간째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 조용한 사무실을 울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너무 더딘데요! 하나 돌리는 데 3분 이상 걸려요. 아직 100개가 넘는데  ”

“오늘 밤에도 집에 가긴 글렀군!”


일사분기 결과발표를 하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처리할 데이터 양이 많아 루이와 정현은 어쩔 수 없이 이틀 연속 야근 중이었다. 


정현은 데이터를 하나씩 돌리며 틈틈이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회사에서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정현이었지만, 함께 야근을 연달아 하며 루이는 ‘여자친구가 있나 보군’ 짐작하고 있었다.


“여자친구야?”

“아… 네, 형!”


정현의 얼굴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사람의 무안한 표정이 어렸다.


정현은 회사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컨설턴트님이라고 불렀지만 루이와 둘이 있을 때는 형이라고 살갑게 불렀다. 루이가 가장 짧고 효율적인 이름을 찾도록 요구한 결과였다. 이름이 정해지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도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업무 관련 외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형!”

“왜?”

“배 안고파요?”

“뭐 좀 시켜 먹을까?.”


한참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들이 회사 구내식당에서 초저녁에 먹은 밥기운은 몇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무척 배가 고팠다.


“실은 제 여자친구가 지금 치킨이랑 순대 가지고 회사 로비에 와 있어요.”


정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루이의 인격이 자상하고 온유해도, 정현의 입장에서는 프로다운 책임감이라는 선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어려운 원칙주의자 상사였다. 


“그래? 여자친구가? 여기와 있다고?”


루이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정현은 아차 싶었다. 일만 생각해도 모자라는 바쁜 상황에, 여자친구를 회사까지 오게 했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금방 나가서 음식만 받아 올게요.”


루이는 제 눈치를 보는 정현을 느끼며,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에 몰두하느라 부하직원을 필요 이상 혹사시키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당장 퇴근하고 데이트를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장 내일 아침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치울 수 없는 태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마디 불평 없이 믿고 따라와 준 부하직원과, 데이트 시간도 못 내는 남자친구에게 음식을 배달해 주는 그의 여자 친구에게, 약간의 시간이라도 선물하고 싶었다.


“올라오시라고 해서 같이 먹어.”


루이의 제안에 정현의 눈이 둥그레졌다.


“진심이세요? 아, 아니에요. 일이 산더미같이 밀려있는데, 일해야죠.”


정현이 일본 15년 거주 경력의 일본어 강사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 세 가지,  

일본인의 친절을 맹신하고 무리한 부탁을 해서는 안됩니다. 

회사 사람이나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절대 사생활을 노출하지 마세요.  

일본인 상사나 동료에게 속마음을 얘기하지 마세요.  


루이를 상사로서 존경하지만, 정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 몇 달간 그를 수행하는 동안 세 가지 주의 사항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좀 먹고, 쉬고, 재충전해야 밤늦게까지 버티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정현은 계속 루이의 눈치만 살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야근시킨 게 미안해서, 오늘은 꼭 퇴근하게 해 주고 싶은데. 상황이 이러니, 오늘 하루만 더 분발하자고. 정말 미안해. 사과의 의미로, 지금부터 1시간 휴식!”


루이는 진심으로 정현에게 사과했다.


사람의 진심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루이의 진심 어린 사과가 정현의 가슴에 고스란한 온도로 전해졌다. 지금까지 일본인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사적으로 철벽을 치고 지내온 게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올게.”


아무래도 상사가 있는 자리는 불편할 터였다.


“형,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드세요. 실은 제 여자친구만 온 게 아니라, 친구가 한 명 더 있어요. 제 여자친구와 제 친구 모두 소개해 드릴게요.”


정현이 로비로 내려가서 여자 친구와 친구라는 여자, 두 사람을 데려왔다. 정현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이 처음인지 두 사람 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두 사람은 루이를 발견하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무래도 정현의 상사라는 점이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루이도 멀찌감치 서서 머리를 숙여 답례 인사를 건네고, 하고 있던 데이터 처리 작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현은 세미나실 불을 켜고 테이블에 음식을 먹기 좋게 세팅하곤, 루이를 부르러 왔다.


“형, 여기 와서 같이 드세요.”

“먼저 먹어, 나 이것만 마무리하고.”

“식기 전에 빨리 와서 드세요.”


루이는 대답만 던져 놓고, 데이터 처리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형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난 괜찮아. 친구들하고 편하게 먹어.”

“아까 배고프다고 하셨잖아요. 이건 순대라는 음식이에요. 치킨이랑 같이 드셔 보세요.”


눈치 빠른 정현이 자리를 피해 주려는 루이의 생각을 읽고, 음식을 덜어와 루이 앞에 놓았다. 세심한 그는 루이가 아까 배고프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미키 하우스> 시절에 필립과 숙소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해 먹던 따뜻한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순대라는 음식은 좀처럼 끌리지 않는 색감과 달리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탁 쏘는 와사비 간장 소스나 좀 맵고 새콤달콤한 소스를 곁들이면 좋겠다고 루이는 잠시 생각했다. 


음식을 다 먹은 루이는 감사의 표시로 정성스레 녹차를 내려서 세미나실로 향했다. 세미나실에 들어서는 순간 루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무……!'


그녀가, 그토록 오래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당연히 이곳에서 이렇게 재회할 것이었던 것처럼. 루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운명처럼.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루이는 나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만의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느낌, 맑은 눈망울, 가녀린 체격 그대로였다. 학생이었을 때보다, 자신감 있고 강인한 분위기가 한층 더해지긴 했지만, 정말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루이의 눈에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그녀인가!'


루이는 나무의 손을 잡고 환호하고 싶은 심정을 꾹 누르고, 천천히 녹차를 담은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극도로 절제된 차분한 손을 내밀었다. 


나무가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놓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에 그녀의 온기가 남아 감돌았다. 심장이 손으로 옮겨간 듯, 손바닥 전체가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결코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온몸의 세포들이 들고일어나 외치는 것만 같았다. 이 재회의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선 안된다고,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온 신경이 잔뜩 기대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이의 심장은 이미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뛰어올라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감정을 컨트롤했다. 


'이름을 말하면 기억할까?'


“안녕하세요, 오카다 루이입니다.”

“이나무입니다. 정현이 친구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나무는 이름을 들어도 루이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루이의 가슴에 실망감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실망. 정현의 여자친구가 아니어서 안도.


“정현 군 친구시군요. 나무 씨.”


루이가 나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느낀 정현과 은혜가 은밀하고 교활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루이가 나무에게 제대로 반한 모양이라고 그들은 살포시 김칫국에 입을 갖다 대고 있었다. 나무가 부담감을 느끼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이쯤에서 정현이 이 분위기를 끊어주어야겠다 싶어 나섰다. 


“형, 이쪽은 제 여자친구.......”


정현은 여자친구라며 길게 파마머리를 한 여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정신이 든 루이가 은혜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정현 군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동안 데이트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서 죄송해요. 앞으로 개선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은혜입니다. 정현이에게 많은 가르침 주신다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초등학생 자녀를 교사에게 맡긴 학부모처럼 인사하는 은혜를 보고 루이는 나무와 같이 <미키하우스>에 왔던 그때 그 다부지고 활달하던 여학생을 떠올렸다. 질끈 묶었던 생머리가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긴 파마머리로 변하고, 조금 더 분위기가 여유 있어 보이고 성숙해진 듯했지만 정현의 여자친구는 나무 친구, 은혜가 확실했다.


“그런데, 컨설턴트님 얼굴이 참 눈에 익네요…….”


은혜가 루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두 팔을 크게 휘둘러 손뼉을 탁 쳤다.


“임준검, 임준검 닮으셨어요, 컨설턴트님! 요즘 한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배우, 임준검이요!”


세 사람이 손뼉 치며 동의하는 것을 보고, 루이는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어쩜 이렇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야근 작업이 없었어도, 그날 밤 루이는 아마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었다. 나무와 은혜가 돌아간 후에도, 들끓는 흥분감은 잦아들 줄 모르고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밤새 힘이 넘치는 루이의 모습에, 정현은 인간이야 로봇이야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녹초가 되어갔다.


다음 날 아침, 루이는 이사진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흠 없는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다. 루이와 정현은 프레젠테이션 미팅이 끝난 뒤, 씻고 밤샘 작업으로 쌓인 피로도 풀 겸 회사 근처 사우나장으로 향했다. 


평일 낮시간의 사우나장은 한산했다. 뜨거운 사우나룸에 들어가 열기가 훅 끼쳐오자 정현은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갑자기 루이가 한마디 말로 정현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정현 군, 나, 그 사람 소개해 줘.”

“누구요? 나무요?”


어젯밤 루이의 나무를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 느끼긴 했었으나, 정현은 밤샘 야근의 피로감에 눌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응. 정현 군 친구. 이나무씨.”


루이의 다소 집요하게 느껴지는 단도직입적인 부탁에 정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정현이 알던 무슨 일이든 정확한 분석 후에 결정하는 치밀한 산업 전문가 루이가 아니었다. 정현이 알던 한국 사람보다 마음을 더 완곡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일본 사람이 아니었다.  


“진심이세요?”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 정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무가 그렇게 한눈에 반할 만한 미인도 아니고, 어젠 진짜 생얼에, 어디 엎드려 낮잠이라도 자다 나왔는지 부스스한 머리 질끈 묶고, 꼬질꼬질한 야상 잠바 떼기를 걸친… 정현이 아무리 과장하고 포장해서 생각해 보려 해도, 남자가 반할만한 모습은 절대절대 아니었다.


'만약 루이가 진심으로 나무에게 반했다면…, 아니야, 설마…….'


“진심이야.”


'헐!' 


루이의 진지한 눈빛을 정면으로 느낀 정현은 속으로 기함했다.


“형만 마음먹으면, 나무보다 훨씬 예쁘고 집안 좋은 여자들이 줄 설 거예요. 우리 회사 간부들도 따님들 소개하고 싶어 안달인 거 아시잖아요…….”


‘미안 나무야. 이 분 진심 파악부터 좀 하자.’


정현이 얼씨구나 루이의 호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난, 이나무씨 꼭 소개받고 싶은데.”


‘난 나무가 아니면 안 돼.’


루이의 표정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요하게 도전하는 사람처럼 너무나 결연했다. 


'하룻밤 사이 상사병이라도 났다면 몰라도, 이건 처음 본 사람 소개팅을 부탁하는 감정선이 아닌데…….'


“호, 혹시… 어제 나무 보고 반하셨어요?”


어젯밤 정현이 나무를 소개했을 때, 루이가 넋을 잃고 나무를 바라보던 게 진짜 반해서 그랬던 건가 조심스레 확인했다. 진짜 급체하듯 반해서, 하룻밤만에 급성 상사병이 도졌다면 겨우 이해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응”


루이는 나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중이었다. 부하직원 앞이라는 체면도 벗어던졌고, 남에게 무리한 부탁으로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몸에 밴 문화 관념도 잠시 내려놓았다. 일본인 치고 진솔한 편인 오사카 사람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대놓고 마음을 말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회사동료에게 말이다.


루이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정현에게 떼를 쓰고 있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졌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헐!”


정현의 기함하는 심정이 이젠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미친 거 아니죠? 혹시, 타국에서 너무 외로운 거예요, 형?’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루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집안의 딸들과 만날 수 있는 급인데 정현은 생각했다. 게다가 나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소개부터 시켜달라고 하는 것은 평소 신중한 분석가인 루이가 밟을 수순이 아니기에 정현은 더 당황스러웠다.


정현이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 루이는 혹시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혹시 그 사람 남자친구 있어?”

“없어요. 없긴 없는데, 만나보면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정현은 최대한 객관적이 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물론, 나무는 가족처럼 가깝고 소중한 친구다. 물론, 만의 하나 루이와 나무가 잘될 수 있다면 나무를 생각해서도 더 바랄 일이 없을 것이다. 끝까지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무가 상대에 비해 가지지 못한 결핍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루이의 마음이 정말 진심이라면, 나무에게 다가가는 그를 막을 수 없을 거라면, 차라리 그 시기 - 나무의 약점을 발견할 때 - 를 앞당겨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는 세게 태클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나무 상처받는 거 못 봐요 저는.”

“무슨 뜻이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형은 제가 너무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이세요. 형을 믿지만, 저는 걱정이 돼요…….”


정현은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형에게 나무가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형은 스펙도 너무나 훌륭하고, 업계 최고 컨설팅펌의 수석 컨설턴트에, 모든 걸 다 가지신 능력 있는 분이잖아요. 나무는 그렇지 못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형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조건이에요. 집안, 학벌, 재산, 가족 관계,… 모든 면에서요. 나무는 제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친구인데, 잘 안되면… 상처받을까 많이 조심스러워요.”


‘나무가 더 이상 마음 아파하는 거 볼 수 없어요, 형.’


특히 자신의 소개로 만났다가, 악연으로 끝난다면, 정현은 나무가 어떻게 나올지, 오랜 친구들인 자신과 은혜, 나무의 관계가 어떻게 틀어져 버릴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부탁할게. 딱 한 번만 자리를 마련해 줘. 그 담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결코 내가 나무 씨에 대해 실망하는 일도, 나무 씨를 아프게 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약속해. 어떤 형태로든 나무 씨에게 곁에 있어 좋은 사람이 될게.”


‘너는 몰라. 그럴듯한 이력 뒤의 내 진짜 모습을... 내 가슴속 깊은 상실감을... 나무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그동안 나무를 놓쳐버리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제발, 제발 부탁이니 나무와 만날 수 있게 나를 도와줘.’


반년 가까이 곁에서 루이를 수행하면서, 정현은 이렇게 절박한 루이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나무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나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한 그의 표정 앞에서 정현은 어쩔 줄 몰랐다. 


어떤 어려운 프로젝트를 맡길 때보다 더 큰 부담이 밀려왔다.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은 엄청난 부담감이 정현의 마음을 누르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물어는 볼게요. 형, 너무 기대는 하지 마요. 워낙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애라……”


안될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경고하는 것 밖엔 정현이 부담감을 떨쳐보려 달리 해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잘 말해 줘. 이렇게 부탁할게.”


정현의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면서도, 루이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정현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간절히 부탁했다.


***


정현이 루이로부터 소개팅 부탁을 받고 하루가 지났다. 다가온 주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이가 했던 말들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아, 이틀 연속 야근으로 심히 지친 심신임에도, 정현은 깊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늦잠 자긴 글렀다 싶어, 정현은 일찌감치 일어나서 장 봐서 바로 나무와 은혜가 사는 옥수동 아파트로 건너왔다.


제법 따사로운 봄기운이 창틈으로 달큼한 향기를 풍기며 새어 들어오는 느긋한 토요일 오전이었지만, 즐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궁싯거리기는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감이 떨어진 걸까? 사장의 인맥빨이 이젠 안 먹히는 걸까? 기획하는 드라마마다 편성을 따지 못해, 접어 둔 것이 몇 개짼가.' 


결국 사장의 위염이 재발했다. 사장의 위염은 제때 월급 받지 못하는 생활고의 시작을 알리는 조명탄임을, 드라마 제작회사 5년 차인 나무는 훤히 꿰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속에, 시원한 물이라도 부어주기 위해 나무는 제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점심 준비로 야채를 손질하고 있던 정현이 나무의 기척을 느끼곤, 야채를 다듬던 동작을 멈추었다.


“나무야, 너 소개팅할래?”


뜬금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현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소개팅’이라는 화두를 도마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나무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한참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어.”


‘어쩌면 저렇게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을까.’


정현은 아직 한 발짝도 못 나갔는데, 길 입구부터 바리케이드가 봉쇄하고 있는 듯 암담한 느낌이 밀려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응수했다.


“왜 싫어?”

“싫은 이유는 백 가지가 넘는데, 간략히 가장 큰 이유 하나만 말하자면, 네가 아는 사람하고 엮이는 게 싫어.”


나무의 짧은 한 마디에 가시가 된 상처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진욱은 정현의 같은 과 동기이기도 했었다. 진욱이 미국 어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동기들을 통해 들었을 뿐 연락이 끊어진 지는 오래지만, 나무는 정현이 어떤 식으로든 진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의 첫사랑앓이에 대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는 친구가 둘씩이나 있다는 사실이 나무는 때때로 편치 않았다. 늘 가까이 머물며 보살피고 가족처럼 염려해 주는 그들이기에 오히려 맘 놓고 아픔을 다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 통증이 아니라, 몇 년씩 가는 만성 지병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겨운 법이니까.


지금도 가끔 어떤 기억들이 마음에 되살아나면, 길을 걷다가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때가 있다는 것을 친구들은 알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그 시간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망각이라는 뇌의 장치가 그 모든 생생했던 기억과 감정들을 희미하게 흩어버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진욱 때문에 죽을 듯 아팠던 그 겨울의 기억은, 나무의 의식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인지, 어릴 적 기억처럼 드문드문했다.


“네가 그렇게 대답할 줄 벌써 짐작은 했는데, 이게 남자가 너무 아까운 케이스라서 말이지.”

“지금 소개팅이 문제가 아냐. 나 진짜 제대로 대박 기획 하나 터뜨리지 않으면, 또 월급 끊길지 몰라.”


정현이 칼질을 멈추고 나무의 얼굴을 살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심각한 상황이 또 벌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정현이 보기에 드라마 제작회사라는 곳은 참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직장 같았다. 2년 전이던가, 나무가 월급이 끊겨, 6개월 동안 대출금으로 버티며 한 달 한 달 버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불안했던 그 시간,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은혜가 난리였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게 아까워서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며 고집을 부리던 나무였다. 무엇보다 이것만큼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이 없다고 했다. 사장 박만수를 떠날 수는 더더욱 없다고 했다. 본인이 그만 둘 마음이 없는데 아무리 친구라도 그만두라니 말라니 하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정현과 은혜는 그때 알았다. 나무는 자신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무언가를 먼저 그만두거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정말 월급이 또 끊기기라도 한다면, 나무의 예민한 자존심은 더욱 두터운 철벽을 두르고 숨어들 것이 뻔했다.


‘지금 나무에게 루이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정현은 100%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 형의 그 눈빛을, 그 진심을…….'


나무와 만나고 싶어 하는 루이의 간절한 표정을 떠올리며, 정현은 다시 한번 소개팅 제안을 흘렸다.


“진짜 괜찮은 남자가 널 딱 집어서 소개해달라고 했는데… 뭐, 본인이 싫으면 할 수 없지만…….”


워낙 상대가 내세울 만하다 보니, 정현의 목소리에는 의기양양한 기운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정현은 ‘루이 씨가 나무 너에게 반했대’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말을 아꼈다. 


"날 집었다고? 그 사람이 나 알아?”


나무가 정현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낚싯줄을 확 잡아당기는 심정으로, 정현은 루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께 너 은혜랑 우리 회사 왔었잖아. 밤에 야근했을 때."

“그래, 야식 싸 들고.”

“그때 만난 내 상사 기억나? 일본에서 온 컨설턴트라고 한국말 잘하던 분.”

“그 잘 생긴 상사 분? 설마……!”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Nv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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