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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06. 2023

4. 이상한 나라의 밥 하는 남자

[소설] 루이의 나무 

칼로 도마를 툭툭툭툭 두드리는 경쾌하고 힘찬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아침밥 하는 소리다… 할머니 소리는 아닌데… 엄마?'


나무는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다.


'여기가 어디지?'


몹시 낯선 느낌이 드는 방.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어제 기억이 밀려들었다. 어제 일본에 도착했고, 여긴 도쿄 외곽의 숙소. 나무는 실로 오랜만에 푹 잠을 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돌아보니 은혜는 아직 한밤중이었다. 샴페인을 끝도 없이 마시더라니.


나무는 몸을 비스듬히 일으켜, 자신의 침대 옆으로 늘어져 있는 커튼을 살짝 제쳐보았다. 가로로 긴 창문의 모양이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녀는 창 밖 풍경을 보기 위해 몸을 좀 더 일으켰다.

 

창 밖으로 눈부신 아침 햇살을 잔뜩 머금고 흐르는 하천 윤슬이 금가루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천 건너에는 어젠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했던 주택가가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하얗게 눈이 왔던 흔적은 있지만, 길은 이미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부지런하고 꼼꼼한 성품이 지배하는 사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은혜는 그제사 잠이 깬 모양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머리 아파. 어제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일단 씻고 준비해. 어디 가서 해장 국물될 만한 거, 뭐라도 사 먹자.”

“아, 아침부터 침샘을 유혹하는 이 치명적인 냄새는 뭐니?”


잠결에 엄마가 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곳 자취생들이 아침 해 먹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구수한 어묵국물 냄새와 함께, 어젯밤 함께 했던 목소리들이 은혜와 나무가 머무는 방 안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은혜는 괴롭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금방 씻고 나와 나갈 준비를 했다. 


나무와 은혜가 방에서 나와 부엌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 인사했다.


“굳 모닝, 나무, 은혜!”


영국 남자, 마크였다. 


“나무 씨, 은혜 씨, 시간 되면 아침 같이 먹어요! 우동 먹을래요?”


루이가 우동 면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 맛있는 냄새가, 우동국물 냄새였군요! 넘 맛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계속 얻어먹을 수는 없죠.”

“괜찮아요. 루이가 요리하는 건 얻어먹어도 돼요. 루이는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받고, 숙소 알바도 하는 부자 대학원생이에요.” 


마크가 루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아침 초대를 거들었다. 


“부자는 전혀 아니지만, 친구가 된 기념으로 일본에서의 첫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일정에 차질이 없으시다면요.”

“그런 의미라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안 그래도, 나무가 아직 기력이 없어서 따끈한 아침을 어디 가서 사 먹나 그러던 참이었거든요.”


은혜는 다소곳한 말투와 달리, 우악스러운 손길로 쭈뼛거리는 나무를 끌어당겨 식탁 앞에 앉혔다. 나무는 은혜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넉살에 기가 막혔지만, 왠지 이 일본인이 끓이는 우동이 기대가 되는 마음은 자신도 막을 수가 없었다.


“네, 따끈따끈한 우동 곧 나갑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루이는 신속하고 익숙한 움직임으로 우동면 3인분을 국물 속에 빠뜨렸다. 


마크는 우동을 먹을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냉장고에서 요거트와 과일, 아몬드 봉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작은 도마를 펼쳐놓고 과일과 아몬드를 잘게 잘라 큰 사발에 담았다. 그 위에 요거트와 시리얼을 부어 넣더니, 슥슥 비벼 먹기 시작했다.


은혜가 마크의 아침 식사를 보며 속이 부대껴 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  때마침 우동이 다 끓어올랐다. 루이가 나무와 은혜, 그리고 자신 앞으로 국물이 넘칠 듯 찰랑이는 우동 사발을 하나씩 놓았다. 은혜는 사막 한가운데서 물 만난 사람처럼, 국물부터 쭉 들이켰다. 


“아, 국물 맛이 끝내준다! 너무너무 시원하고 맛있어요!”


나무도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기 시작했다. 뜨끈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 개운한 게 은혜가 사발째 들고 마시며 열광할 만했다.


“정말 맛있어요.”


하룻밤 사이에 나무의 얼굴이 조금 더 밝아지고 혈색도 좋아진 것 같아, 루이의 마음도 들떠올랐다. 


“마크는 우동 안 먹어요?”


넌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 해장 안 해도 되냐는 은혜의 깊은 뜻이 담긴 질문이었다.


“난 우동 안 좋아해요. 아침부터 생선 국물은 제 취향이 아니라.”


마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자신이 선택한 아침밥을 열심히 맛있게 먹었다.


“그 프랑스 분은 어제 샴페인 많이 드시던데, 아직 못 일어나셨나?”

“필립요? 필립은 아침 일찍 출근했어요.”

“아, 참, <라 프랑세즈>라고 했나? 프렌치 베이커리에서 일한다고, 어제 말한 게 기억나네요.”

“오모테산도에 가면, 한 번 들러 보세요. 도쿄에서 맛집명소로 꼽히는 곳이에요. 가게도 예쁘고 음식도 아주 맛있어요.”

“그래야겠네요.”


은혜가 루이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 나무는 정신없이 우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떻게 우동면이 이렇게 탱글탱글할 수 있을까? 구수하고 깊은 국물 맛에 쫄깃쫄깃하고 오동통한 면의 식감이 더해지니,  이 세상에 오직 우동과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나무의 심장은 갈갈이 찢어져 음식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데, 나무의 몸은 오래 피를 굶은 뱀파이어가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우동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있었다.


“어머, 나무야, 너 식욕이 돌아왔나 봐!”


문득 나무를 돌아보고 은혜가 환성을 질렀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음식이 나도 모르게 술술 먹어지네.”

“루이상 요리가 네 입에 딱 맞나 보다. 루이상, 얘가 지금까지 음식을 못 먹던 앤 데요, 루이상이 해준 음식을 잘 먹어요!”


은혜는 입 짧은 딸이 남이 해준 밥을 꿀맛같이 먹는 걸 본 중년부인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나무는 쑥스러운 마음에 은혜의 팔꿈치를 꾹 잡았지만, 은혜는 아랑곳없이 신나서 떠들었다.


“나무야, 네가 음식을 먹는 걸 보니, 진짜 내 마음이 기쁘다. 루이상 음식이 진짜 맛있지?”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우리 루이상한테 밥을 계속해 달라고 부탁하자.”

“어떻게 그래.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나무와 은혜가 한국말로 소곤거리를 소리를 루이는 알아들었다. 음식에 관한 이야기일수록 루이는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 음식이 입에 맞으시면, 여기 계시는 동안 제가 계속 아침저녁을 해드릴게요.”


나무와 은혜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루이가 자신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제안을 하는가 싶었다.


“혹시… 독심술 능력 있으세요?”

“아침과 저녁을 어차피 숙소에서 매일 해 먹어요.” 


루이는 대답대신 딴소리를 했다.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죠. 혼자 해 드시는 거하고, 저희까지 먹이려고 신경 쓰시는 건 완전 다르잖아요. 친절하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무는 루이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예의를 갖춰 대하고 싶었다. 


“잠깐잠깐… 우리가 루이상에게 밥값을 드리면 되잖아. 그럼 루이상도 돈 벌고, 우리도 잘 먹고, 서로 윈윈 하는 일이지 안 그래요, 루이상?”


나무를 먹일 이 기회,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이 기회를 날릴세라 은혜가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친구에게 누가 돈을 받나요. 요리가 취미인 저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요리가 취미세요? 어쩐지, 맛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일본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거지만, 루이상 실력이 훌륭하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오늘 저녁 와서 드시는 걸로 생각하고 준비할게요. 6시쯤?”

“6시 저녁 좋죠! 그런데요, 아무래도 재료비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희 둘이 4인분은 먹을 것 같아서요. 재료값만이라도 꼭 받으세요.”

“꼭 받아주세요. 안 그럼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소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기본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은혜와 나무가 대가를 받을 것을 종용했다.


“꼭 대가를 지불해야 마음이 편하시겠다면, 같이 밥 먹으면서 저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가르쳐 주세요.”

“콜! 나무야, 한국어와 문화는 문과인 네가 가르쳐 드려라! 게다가 너 먹이려고 밥 하시는 거니까.”

“네가 더 많이 먹을 거잖아.”

“난 따로 할 일이 있지. 루이상, 전 설거지와 부엌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협상에 따라, 루이는 정말 일주일 내내 나무와 은혜를 위해 밥을 했다. 그것도 하루 방값 3000엔에 포함되어 있을 리 만무한 신선하고 귀한 식재료를 쓴 고급 요리들을.


음식을 만드는 내내, 루이는 어릴 적 자신의 입맛과 몸의 상태를 고려해서 적절한 음식을 해 주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가 루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음식에 담아 주었던 그 정성의 맛을 떠올렸다. 자신이 만드는 음식이 나무의 파리한 혈색을 변화시켜 주기를, 지친 몸과 마음에 생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기를 루이는 간절히 바랐다. 왜 그런 간절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음식에 온전히 담아냈다.   


나무와 은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낮엔 모든 것이 너무 비싸서 손도 댈 수 없는 명품 가게가 즐비한 춥고 낯선 도쿄시내를 종종거리며 헤매다, 어두워질 무렵이면 안전한 대피소로 숨어들 듯 <미키하우스>로 돌아와 이유를 알 수 없는 근사한 진수성찬의 위로를 받았다. 깊은 맛이 나는 루이의 따뜻한 음식이 낯선 환경에 지친 그들의 몸과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아직 가 보지 않은 도쿄 거리를 헤매고 다닐 힘을 었었다.


무엇이든 끄적거리는 버릇을 가진 나무는, 들고 다니는 노트에 루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했다: 


이상한 나라의 밥 하는 남자. 생전 처음 보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타인을 식사에 초대해 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엄마처럼 매일매일 조건 없이 정성스럽게 밥을 해 주는 남자. 이곳의 크리스마스 스피릿일까? 이 사람이 해 주는 음식은 무척 맛이 있고, 내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아이러니한 건, 이 사람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는 거다. 엄마가 밥을 차려놓고,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는 나를 찾아 부르던 그때.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 내가 경험한 가장 낯선 곳에서, 꽁꽁 묻어두었던 옛 기억들을 마주하는 이상한 시간.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게 틀림없다…….


저녁을 먹고 은혜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무는 약속대로 루이와 마주 앉아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 아니 백을 깨우치는 루이와 만나며 나무는 매일매일 놀라고 있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한국어는 이런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면, 다음날엔 그는 한국어 단어를 100개쯤 읽고 쓸 수 있었다. 한국 역사의 간단한 흐름을 말해주면, 한국의 역사에 관한 두꺼운 책들을 하루 만에 읽어와선, 좀 더 자세한 내용에 관해 질문을 했다. 


다행히 고등학교 시절 역사 과목을 좋아했던 나무는 루이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 주고, 일본 저자가 기술한 내용이 나무가 아는 것과 다른 부분에 관해서도 지적을 해 줄 수 있었다. 그들은 특히 서로 알고 있는 게 많이 다른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해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이는 그렇게까지 잔인한 일이 벌어졌던 것도, 그것을 은폐하려고 하는 일본 정부도 이해되지 않았다. 바다 건너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워한다는 풍문에 대해, 그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의 라이벌 의식이나 열등감 정도로만 여겼었다. 교과서 역사책까지 모조리 왜곡되어, 아무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은 루이에게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는 느낌을 주었다.


오사카 식당 <오쿠다>에서 함께 일했던 교토 우토루 마을 출신 직원들이 떠올랐다. 루이가 나무에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자, 나무는 아마도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에 끌려왔던 한국 사람들의 후손일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며 진실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루이는 이 세상 가장 겸손한 모습이 아닐까 싶은 자세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사과를 했다.


나무는 가끔 참석했던 수요시위, 고령의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려, 무너져 내리는 몸과 마음을 이기고 버티는 용기. 그들의 슬프도록 쪼글쪼글한 미소.


한 사람의 일본인에게 진실을 알린 것이 기뻤다. 한 사람 일본인의 진심 어린 사과가 기뻤고, 한 사람 일본인과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된 것이 기뻤다.


루이는 나무의 나라와 자신의 나라 사이에 응어리진 역사적 문제에 대해, 자신 한 사람만이라도 사실을 깨닫고 사과할 기회를 얻어서 기뻤다. 또한, 나무에게 정성껏 밥을 먹이고, 그녀가 맛있게 먹고 혈색이 나아져 가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사람을 무척이나 많이 죽인 전력이 있는 나라 사람으로서, 더 이상은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으며, 어떤 순간에도 사람을 먹여 살리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 루이의 내면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어쩌면 자신에게 모든 걸 아낌없이 주었던 할아버지도, 루이노 키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루이의 뇌리를 스쳤다. 


'분명, 나를 키우고 돌보고 위로해 주는 게 기뻤을 거야.'


그 생각은 루이의 마음에 굉장한 위안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


나무와 은혜는 일주일 내내 걷고 또 걸었다. 다리 근육이 뭉치고 발이 부어서 더는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신기한 건 죽을 것 같이 피곤해질수록 나무의 마음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무의 뇌리를 흥건히 채우고 있던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예리하게 파고들어 심장을 짓이기던 무자비한 절망감의 칼날이 무뎌지고 있었다.


은혜가 인터넷으로 찾아 적어온 유명한 곳은 대충 다 가본 것 같았다. 하라주쿠, 우에노 공원, 아사쿠사 절, 긴자, 시부야. 


“오늘은 신주쿠에서 점심 먹고 오다이바까지 갔다 오자. 그럼 도쿄의 이름난 곳은 다 찍은 셈이야.”


오다이바라는 이름이 귀에 익어 검색을 해 보니, 몇 년 전에 읽었던 소설 <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작>의 배경이었다. 도쿄만에서 부두 하역일을 하는 주인공 ‘료스케’가 바라보던 곳, 화려함과 첨단의 상징이자 다가가기 힘든 새로운 사랑으로 묘사되었던 곳, 그곳이 바로 이 오다이바였다. 


신주쿠에서 오다이바로 한 번에 가는 지하철은 관광지의 모노레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패션의 거리 신주쿠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함께 탄 덕분에 최신 유행 옷차림의 젊은 남녀들이 가득 찬 지하철칸은 생기가 넘쳤다. 


올 겨울 일본 남자들 유행 패션은 금발에 카멜색 코트인지, 댄디한 느낌의 코트에 긴 머리를 곱게 염색한 남자들이 많이 보였다. 젊은 남자들은 여자들만큼이나 외모에 잔뜩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나무야, 넌 한국 남자와 일본 남자 중 어느 쪽이 더 잘생긴 것 같냐? 평균적으로 말야.”

“네 생각은 어떤데?”

“남자는 한국 남자가 더 잘생겼고, 여자는 일본여자가 정말 예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열심히 사람들을 관찰하던 은혜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 난 완전 반대로 생각했는데? 내 눈엔 일본 남자들이 훨씬 멋있는데?”

“어머 기집애, 혹시… 네가 말하는 ‘훨씬 멋진 일본 남자’는 루이상?”

“루이 씨도 멋있지.”

“그치그치! 루이상, 안 꾸며서 그렇지, 진짜 잘생긴 얼굴이야.”


생각해 보면, 루이는 21세기 도쿄 번화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남자들과 많이 달랐다. 하나도 꾸미지 않은 수수함은 둘째 치고, 염색 같은 건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듯한 긴 흑발에, 도무지 몇 살인지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덥수룩한 수염이라니. 그의 진지하고 사색에 잠긴 듯한 고요하고 맑은 눈빛이 나무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일이면 여기서 경험한 모든 것,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나무는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고작 일주일을 머물렀을 뿐인데, 여기서 한참을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이상 넘넘 그리울 거야. 연락처 받아 갈까? 이메일이라도 주고받게.”


은혜도 나무와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정현이가 왜 의처증이 생겼는지 알겠다. 다른 남자들한테 관심 좀 끊어.” 

“오… 뭐지 이 반응은? 루이상은 내 거니까 넘보지 마시라, 이런 뜻?”


짓궂은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은혜의 얼굴을 나무가 기가차다는 듯 밀어냈다.


“야, 루이 씨가 들으면 어이가 없겠다.”

“왜애… 내가 볼 땐, 루이상이 너 신경 써 주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오늘 밤 너한테 연락처 꼭 물어볼 거라는 데 한 표 건다!”

“야, 로맨스 소설은 그만 쓰고, 우리 여기서 내려야 하는 거 아니냐?”

“맞아 맞아! 내려내려!”


역이름을 확인한 은혜가 화들짝 놀라며, 나무의 등을 떠밀었다.


오다이바에 내리자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거대한 쇼핑몰이 그들을 맞았다. 건물과 가로수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차디찬 바닷바람에 서로를 껴안다시피 감싸 안고 쇼핑몰 주변을 배회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넓은 광장 같은 부둣가 앞으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졌다. 부둣가 끝에 미국 맨해튼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복제품 같은 푸른 여신상이 우뚝 서 있었다. 동경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신상이 생뚱맞다고 생각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꼭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기에 자연스러웠다. 


저 멀리 <동경만경> 소설 표지에 그려져 있던 레인보우 다리가 보였다. 나무는 그 너머에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 소설 속 주인공 남자였던 ‘료스케’의 사랑을 잠시 생각했다. 첫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몸에 불을 붙일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그의 사랑. 그토록 진지하게 사랑을 믿었는데. 그랬던 사랑이 변하고, 그 실연의 상처로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남자. 상처투성이 ‘료스케’. 상처투성이 청춘. 그는 새로이 다가온 사랑, ‘미오’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 만약 내가 지금, 바다로 뛰어들어, 도쿄만을 헤엄 쳐 너에게… 간다면… 날 끝까지 좋아해 줄 수 있겠어?


사랑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함께 담긴 료스케의 마지막 대사였다. ‘료스케’와 ‘미오’,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걸. 변한다 할지라도,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처럼 느껴졌었다. 


과연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그들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인생. 인생이란 원래 그렇게 심히 모호하고 불안정한 것인지 모른다. 희망과 절망 동전 양면 같은 인생에서 모두들 가능한 앞면의 기회수가 더 많기만을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욱이는 나하고 헤어지고 조금 더 행복해졌을까? 조금 더 편안해지기라도 했을까?'


나무는 문득 심장이 아려와서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나무 자신이 진욱에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인생의 뒷면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은 아직도 송곳처럼 예리한 고통이었다.


“나무야 괜찮아?”


은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무를 보았다. 


“괜찮아. 나 정말 괜찮아지고 있어.”


물론 나무는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무너진 가슴을 안고 살아갈 일도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나무는 감지할 수 있었다. 진욱에 대한 자신의 뜨겁던 감정이, 그 죽음같이 타들어 가던 헤어짐의 고통이 미세하게 퇴색했다는 것을.


“은혜야, 이런 흠 투성이, 상처 투성이의 삶이라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게 맞겠지?”


은혜는 나무의 질문이 제 가슴에 내려앉는 묵직한 바위처럼 느껴져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최대한 쾌활하게 대답했다.


“너의 아픔들이 너를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야. 분명 잘 살아갈 거야. 내가 항상 곁에서 널 지켜보고 응원할 거니까!”

“솔직히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 자신도, 타인의 마음도, 서로를 믿는다는 것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은혜야, 나는 진짜 살아간다는 게 버거워…….”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착각으로 쌓아 올린 삶은 무너졌고 폐허만 남았다.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다는 희망도 없고, 어떻게 다시 쌓아 올릴지 방법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나무는 인생의 가장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벌거벗은 맨몸으로 에덴에서 쫓겨나 수풀을 헤치고 살아가야 했던 최초의 인간이 걸어간 길. 거친 풀에 얇은 피부를 베이고, 돌부리에 걸려 무릎이 까지는 상처보다 두려운 건, 홀로 헤쳐가야 할 남아있는 인생길 자체인지도 몰랐다.


다만, 아직 희망이 있었다. 인생이 바닥을 치는 이 고통 속에서도, 나무는 실낱같은 희망의 빛 하나를 보고 있었다. 그 빛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더 살아가 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제 안에 분명히 피어나 있었다.  


“나무야, 그래도 살아 보자. 우리 지난 일주일 동안 여기서 즐거웠잖아. 이 낯선 곳에서 좋은 사람들 만나 진짜 재미있게 잘 지냈잖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좋은 시간들이 더 많이 찾아올 거라고 믿어. 믿음을 가져 보자.”


혼자인 나무가 절망하고 마음을 잘못 먹을까 봐 그게 제일 불안한 은혜였다. 그녀의 한마디한마디에 조바심이 잔뜩 묻어났다.


“걱정 마. 나 죽지 않아. 인생이 바닥을 쳐도, 죽을 만큼 절망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의 장치가 하나 있더라고."

“그게 뭔데?”

“망각의 힘.”


어느새, 진욱과의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진욱에 대한 나무의 마음이 이제 죽음을 불사할 만큼 절대적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을 끌어내리는 무겁고 슬픈 절망감의 중력에 맞서 싸우며 세차게 떠오르는 망각의 부력을 나무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소설 주인공 ‘료스케’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처럼 ‘진욱’에 대한 생각도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점점 더 희미해져 갈 것임을 나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난 페이지를 넘기고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나가기로 결심하는 일이 필요할 뿐이었다.


“진짜 헤어져야겠다, 여기서.”

“어?”

“나 이제 진욱이 보내주려고,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 일어설 거야.”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졸업하고 좋은 데 취직하고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야!”

“그래! 행복하게 살자!” 

“행-복-하-게-살-자-!”

“행-복-하-게-살-자-!”


나무는 바다를 향해 외쳤다. 은혜도 따라 외쳤다. 마침내 둘은 한 목소리로 같이 외쳤다. 바닷바람을 피해 서로의 품을 파고들던 연인들이 고개를 들어, 바람을 맞고 서서 굳건히 행복을 다짐하는 여자들을 쳐다보았다.


****


루이는 나무와 은혜에게 마지막으로 뭔가 특별한 음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은혜가 크리스마스 저녁에 먹었던 오코노미야키가 참 맛있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날 나무는 죽을 먹어야 해서 맛보지 못한 아쉬움도 있어, 오사카의 명물다운 제대로 된 오코노미야키를 구워 볼 참이었다. 오늘따라 시장엔 설을 맞아 명절음식이 많이 나와 있어, 루이는 오코노미야키에 넣을 해산물, 야채와 함께, 설에 먹는 떡인 가가미 모찌와 메밀국수도 사 왔다. 신선하고 영양가 있는 재료들을 뜨겁고 부드러운 치즈와 초콜릿으로 감싸듯 찍어 먹는 퐁듀도 준비했다. 퐁듀는 필립이 루이에게 가르쳐 준 요리였으므로 다크 초콜릿과 치즈 덩이들을 보고 필립이 금방 눈치를 챘다.


“퐁듀?”

“필립, 이 치즈랑 초콜릿 좀 봐줘.”

“좋은데! 돈 좀 썼겠는데? 오늘 저녁 메뉴는 퐁듀야?

“퐁듀와 전통 일본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가가미모찌하고 메밀국수도 샀어. 오코노미야키도 구울 거야.”

“아, 내일이 설이지? 내일 누구 손님 와?”

“아니, 오늘 저녁에 우리가 먹을 거야, 다.”

“설은 내일인데? 게다가 이 많은 음식들을 우리가 다 먹는다고? 오늘 복권 당첨됐어? 아님, 너 어디 멀리 떠나?”

“무슨 소리야? 한국에서 온 여학생들 마지막 저녁 차려주려고. 내일 떠난대, 한국으로.”

“진짜? 그렇다고 이렇게 비싼 음식들을? 세상에 이 치즈 한 덩이가 얼만데. 너 솔직히 말해. 너 사랑에 빠진 거 맞지?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근사하게 차려주는 것도 진짜 이상했어.”

"나 원래 요리하는 거 좋아하잖아. 그리고 네 말대로 내일이 설이고.”

“농. 내 눈은 못 속여. 어느 쪽이야? 네 마음을 훔쳐간 여자. 은혜? 나무?”


퐁듀의 주 재료인 스위스산 에멘탈치즈와 그뤼에르 치즈를 제대로 구하려면 신주쿠까지 나가야 구할 수 있는 데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프랑스인인 필립은 잘 알았다. 몇 년을 함께 살면서, 오가는 객이 한 둘이 아닌 <미키하우스>에서 잠시 며칠 다녀가는 낯선 사람들을 위해 루이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필립은 분명 뭔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


나무와 은혜가 오다이바에서 다시 신주쿠를 거쳐 마지막 쇼핑까지 마치고 <미키하우스>로 돌아왔을 때는 6시를 살짝 넘긴 시각이었다. 그들이 도착했던 첫날 크리스마스 저녁을 연상시키는 요리들이 테이블 가득 예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나무와 은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이제 왔어요? 마지막 날인데 좋은 데 갔었어요? 오늘이 마지막 저녁이라서.......”


허리에 앞치마, 머리에 두건을 두른 루이의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빛나 보였다. 나무와 은혜는 자신들을 위해 마지막 저녁을 이렇게 성대하게 준비한 루이에게 너무나 감사해서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들을 진심으로 챙겨주고 돌봐주는 루이의 따뜻한 보살핌에 지난 일주일간 지친 근육이 다 풀리고, 도쿄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몸 한기마저 다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어우, 나무 이 기집애 쇼핑에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동안 그 크고 멋진 쇼핑센터들 다 지나치더니… 막판에 선물 사야 된다고 갑자기 백화점 가자고 하는 바람에… 저희가 조금 늦었죠?”


진수성찬 잔칫상을 보고 황송한 마음에, 은혜는 괜히 나무를 탓하는 말들을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 횡설수설했다.


“이제 막 음식이 다 준비돼서 상을 차리는 참이었어요. 내일 설이기도 하고, 두 사람 송별파티도 할 겸 저녁에 여러 가지 좀 만들어 봤는데,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나무는 루이가 차린 음식을 보고 마음 깊이 전해오는 온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은혜가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저희를 위해 이 많은 걸... 이 많은 음식들을 다 혼자 만드신 거예요?"


나무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마음이 울리도록 감격한 사람의 감탄사처럼 들렸다.


“루이가 사랑하는 사람, 아니 떠나는 사람을 위해 정성껏 차린음식이에요.”


필립이 루이대신 그의 마음을 전해주려 했으나, 루이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해서 발음이 새는 바람에, ‘사랑하는(love)’이라는 말은 ‘떠나는(leave)’이라는 말로 변질되어 버렸다.


“다들 식기 전에 먹어요.”


루이는 서둘러 상 차리기를 마무리하고, 필립이 또 나서기 전에 거친 손길로 그의 입에 떡을 물려주었다. 루이는 마지막으로 가스레인지 위에 있던 퐁듀 냄비들을 테이블 위의 전용 받침대 위로 옮기고 그 아래 작은 초에 불을 붙였다. 그 옆 큰 접시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진 버섯과 빵, 그리고 각종 야채와 새우,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이런 멋진 음식들은 처음 봐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 이 음식들의 이름이 다 뭐예요?”

“이건 스위스 치즈를 녹인 치즈 퐁듀고, 옆에 건 초콜릿 퐁듀예요.”

 “퐁듀는 스위스와 프랑스 일부지역에서 즐겨 먹어 유래된 음식이죠. 원하는 음식을 이렇게 따뜻한 치즈나 초콜릿에 찍어서 드시는 거예요.” 


루이의 대답에 필립이 음식의 유래를 설명하며 거들었다.


“이 떡은 일본 사람들이 설에 먹는 가가미모찌라는 떡이고, 메밀소바도 설음식이에요. 이건 오코노미야키라고 오사카 전통음식인데 은혜 씨는 크리스마스 저녁에 드셨던 거 기억하시죠?”

“기억나요. 정말 맛있었어요. 제가 넘 맛있었다고 말해서 송별 선물로 해 주신 거예요? 참, 나무는 그날 죽만 먹느라 못 먹어 봤지. 나무야, 루이상 오코노미야키 진짜 맛있어.”


그날 크리스마스 저녁에, 오코노미야키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도, 나무 몸상태가 죽 이외 다른 음식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라 냄새만 맡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나무는 설레는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어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오코노미야키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한국의 부침개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소스와 마요네즈 맛이 함께 느껴지면서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도 났다. 여러 가지 재료의 식감이 살아있으면서도 싱싱한 해산물의 향이 모든 맛을 하나의 분위기로 묶어주는 깊은 고소함이 느껴졌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즐거운 맛에 나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루이의 마음도 껑충 뛰어올랐다. 생전 처음 느껴본 눈부시게 환한 감정 앞에서 루이는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기만 했다. 


“내년에 꼭 또 놀러 와요.”


루이의 표정을 보고 뭔가 느낌이 왔는지, 필립이 나서서 그들을 초대하며, 또 다른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루이 본인이 나서지 않는 데 필립이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말 감사했어요. 어떻게 보답을 할 수 있을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큰 도움을 받았어요.”


나무는 지금 느끼는 이 벅찬 감정이 감사함인 줄로만 알았다.


“꼭 또 놀러 오고 싶어요. 내년 겨울에 <미키하우스> 오면 다들 계실 거죠?”


은혜는 진심이었다. 나무와 함께 꼭 또 놀러 와 이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음번에 올 땐, 가난한 학생이 아닌 돈 많이 버는 커리어 우먼으로 와서 이 고마운 사람들을 신주쿠에서 봤던 한국 고깃집에 데려가 한턱 크게 쏘겠다고 결심했다. 


모두들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다 함께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누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새해전야를 기념하기 위해 새벽까지 맥주 파티가 있었을 테지만,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사람들을 배려해, 짧은 저녁 식사를 끝으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루이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결국 읽던 책을 덮고 일어서서 좁은 방 안에서 서성거렸다.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이 감정이 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얼마나 순조로웠던가!


루이는 3월에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며, 졸업 전에 이미 명문학교의 수재들만 뽑아 가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제일의 컨설팅 회사, SGC에 취업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SGC는 일본 회사지만, 보잉사나 제너럴 모터스 같은 미국 대기업들을 주 고객층으로 확보하면서, 최근 본사 전체를 미국의 워싱턴 주로 이전시켰다.


첫 출근 일을 5월 1일로 맞춰놓은 루이는, 졸업과 동시에 <미키 하우스>를 정리하고, 오사카에 들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후, 4월 중순 경에 미국에 입국할 예정이었다. 신입 컨설턴트들은 단독 활동 전 경험을 쌓기 위해, 몇 년간 거물급 컨설턴트를 수행하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말은 곧, 처음 몇 년간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굴러야 하는 처지라는 뜻이었다.


그에게 일어날 변화들을 생각하면, 그 어느 누구와 어떤 약속도 할 수가 없었다. 건네 줄 전화번호나 주소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이메일 계정도 학교를 졸업하면, 사라질 것이었다. 루이는 군입대를 앞두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버린 것 같은 암담한 심정을 느꼈다.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루이는 얼른 문을 열었다. 

꺽다리 필립이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무가 아니어서 실망했지?”


루이는 제 마음을 알아채고 놀려대는 필립이 돋구는 짜증을 삭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왜?”

“너 이렇게 보내면 후회한다.”

“나 몇 달 후면 미국 들어가야 하고, 미국에 들어가서도 어떻게 될지 몰라. 친했던 사람들과도 이별하는 마당에, 어떻게 한국에 있는 사람을…….”

“진짜구나, 네 마음…, 내가 너랑 산지가 지금 3년이 넘는데, 너의 그런 눈빛 처음 봐. 루이 잘 생각해. 연락처라도 받아 둬. 내 말 명심해…….”


루이는 말을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필립을 억지로 밀어내고 문을 닫아 버렸다.


“똑똑똑”

“뭐야, 아직 안 갔어? 내가 알아서 할 거라니까!”


루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다, 깜짝 놀랐다.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필립이 아니라 나무였다. 필립을 기대하며 굳어졌던 루이의 표정이 일순간에 부드러워졌다.


나무가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루이 앞에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작은 상자 하나를 받치고 있었다.

 

“저, 그동안  정말 많이 감사했어요. 뭔가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미리 준비한 것이 없어, 이 초를 샀어요. 매일 맛있는 아침 저녁 해주셨던 거, 친절하게 대해주신 거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을 여행이 되었어요.” 


상자의 한쪽 면은 투명한 비닐 재질이어서, 반투명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색 초가 보였다. 일본어로 <향초>라고 적혀있었다. 


“일본에서 산 기념품이잖아요. 한국에 가져가서 일본을 추억하는데 써요. 전 괜찮아요. 그리고 저도 많이 즐거웠어요.”

“제 것도 같은 걸로 샀어요. 제가 느끼는 감사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비록 작은 선물이지만, 이거라도 꼭 드리고 싶어요.”


나무는 고집스럽게 초를 그의 손에 올려놓고야 말았다. 그녀의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루이의 손바닥 위해 초와 함께 올려졌다. 


'필립의 말대로, 일단 그녀의 연락처라도 받아둘까?'


하지만 루이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앞으로 뭘 할 거예요?”

“졸업을 해야 해요. 실은 이번 겨울에 졸업해야 하는데, 졸업 학점을 채우지 못했어요. 내년 여름에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해요.”


'연락처 줄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 곤란해할까?'


루이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을 머물다 가는,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이성적인 분석이 자꾸 루이의 입을 막았다. 자신의 앞날도 예상할 수 없는 마당에, 관계를 이어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이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짓처럼 생각되었다. 


“한국에 가서도 밥 잘 먹어요.”


루이의 한국말 인사에 나무가 웃었다. 


“한국어 발음 좋으세요.”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그땐 한국어로 이야기해요.”


'그래,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말고, 좋은 인상을 남기고 보내주자.'


루이는 나무의 연락처를 받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아 버렸다. 루이는 마지막 인사의 의미로 나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제 손 안으로 들어온 순간, 루이는 작은 새 한 마리를 품고 있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정말이지 놓치고 싶지 않은 이 감정을 이해할 길도, 표현할 길도 없어, 루이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그 마음을 꾹 억눌러 버렸다. 금방 지나갈 감정이라고 생각했기에. 지금은 인연을 맺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루이 씨는 좋은 학생이라서 한국어 금방 배울 거예요.”


'우리가 진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나무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루이가 연락처를 물어볼 거라던 은혜의 말은 틀렸다. 역시 착각이었다. 당연한 것인데, 왜 이렇게 허전한 마음이 드는지 나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큰 위로와 즐거움을 느꼈던 여행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섭섭함일 뿐일 거라고 여겼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Placi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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