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하 Oct 24. 2021

영어가 스펙인 사회

1-1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 문법과 독해 중심 언어 학습의 문제점

우리나라에서는 필수 교육과정에서 영어를 배웁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는 우리나라 안에서는 평생 따라다니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인생을 좌우하는 한 관문으로 여겨지는 대학 입시에서도 영어는 과목 하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에도 영어 성적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 입사 시험에서도 대부분 영어 성적을 요구하거나, 영어 성적을 제출합니다. 경쟁 시장에서 사람이 상품화되고 ‘스펙’이라는 단어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무엇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스펙’의 한 칸에도 영어가 있습니다.


외국어 공부, 특히 영어는 이렇게 그냥 배움의 즐거움으로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잘 할 수 있기를 요구받는 것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치감치 조기 유학을 가거나 나중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조차도 또 ‘스펙’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영어가 삶에 있어서 ‘해야만 하는 중요한 것’으로 자리 매겨지는 것과는 반대로, 교육기관에서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은 영어를 잘 하는 이를 양산해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영어가 발목을 잡거나 영어가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토익 점수를 취득하기 위해 토익 학원에 다니고, 어학 학원에 다시 다닙니다. 그러나 학원을 다녀서 심지어 그렇게 토익 고득점을 따낸다 할지라도 실제로 외국인을 만나면 당황하거나 대화를 잘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수능을 비롯한 시험 평가 위주의 언어 능력 시험이, 문법과 더불어 읽기와 독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교육 과정도 그 틀을 따르고 있습니다.  


   

헬리콥터도 못 읽는데 수능 영어 2등급?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저는 대학입학 당시에 지문에 철자 헬리콥터가 나오면 읽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제가 ‘보고’ 외운 단어집에서 그런 간단한 단어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 입시 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책에 쓰여 있는 글씨 모양으로 익혔습니다. 

그리고 독해 구문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문에서 주제문을 찾고, 문장에서 주어 동사를 찾고, 관계절을 찾고 하면서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영어 구문의 많은 용법을 배웠습니다. That절이니, 관계대명사 절이니, 그래서 이 부분은 저 부분을 수식하는 부분이니 하는 것들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주어이니 주어 동사를 이렇게 일치해야 하니 하는 모든 문법적인 것들을 배웠습니다. 어떤 동사 뒤에는 동사 원형이 쓰이고 어떨 때는 to부정사가 쓰이고 어떨 때는 동명사가 쓰이는지를 달달 암기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조금은 언어 교육 현장이 많이 달라졌기를 희망하지만 어쩌면 지금도 일부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구문 해석”을 중심으로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영어를 공부 하면, 분명히 영어 지문을 더 빨리 파악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수월해 질 수는 있습니다. 즉 영어 고득점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공부를 통한 “영어 고득점”이 자신의 외국어 실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각적이고 좀 더 내면에 체득되는 언어로서의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해서 짜 맞추거나 “풀이”해내는 문제풀이식 외국어를 익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그러니까, 수능을 볼 때까지는 영어도 일종의 수학 문제였습니다. 눈앞에 어떤 암호문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한국어로 “해석”되는지 알아내어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영어 문제풀이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도 분명히 독해 지문을 “풀” 수 있고 고득점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언어’가 아닙니다. 공부하고 익히고 있는 것이 ‘살아있는 언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언어의 가장 근본적인 특질은 사실은 “발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발화”가 빠진 언어는 반쪽짜리 언어, 죽은 언어가 됩니다.


극단적으로, 저는 “헬리콥터”나 “발레리나”같은 단어가 지문에 나오면 그 단어를 잘 읽지도 못했음에도, 수능 영어 모의고사는 대부분 1등급을 받았습니다. 즉, 고득점을 받았습니다. 수능 때는 좀 더 실수를 많이 해서 2등급이 나왔지만 그 점수를 가지고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즉 완전히 최고득점은 아니지만 영어에 완전히 발목을 잡히지 않고 영어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수능 독해 문제를 술술 풀어가던 저에게 그 안의 지문을 하나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발음해서 “읽어”보라고 하면 읽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소리 내서 읽기”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양의 단어가 어떻게 쓰여 있으면 그것이 한국어 어떤 의미인지를 외우고 익혔고,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쓰여 있는 글이 한글로 어떤 의미가 되는지 “해석”해내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능 영어 시험은 모국어 국어 실력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능 언어영역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저로서는 영어도 “해석”이 된다면 언어영역의 일환으로서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능 국어, 즉 언어 영역은 물론 문학 공부도 해야 하지만, 비문학 영역은 평소의 독서량이나 사고, 논리 등의 감각이 많이 좌우합니다. 물론 이러한 국어 실력도 언어를 학습하는 만큼 외국어 공부에도 필요하지만, “살아있는 언어”인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언어 감각 자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이 가진 국어실력에 더해서 외국어 자체를 “언어”로서 익힐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중, 고등학교의 공교육 과정에서의 영어 공부는 저에게 ‘언어’로서의 영어를 접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헬리콥터나 발레리나를 읽지 못해도 수능 영어 2등급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지문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서 읽지 못해도 지문 내용을 “파악”하고 정답을 “맞힐”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당시 요구하는 것은 그 ‘점수’이지 내 진짜 영어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금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영어로 생각한 바를 말로 하거나 글로 쓸 수 있습니다. 외국인 친구들과 토론을 하기도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일상의 이야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때 단 한번도 “여기는 to부정사를 써야해”라거나 “여기는 That절로 꾸며줘야지”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즉각적으로 언어 체계가 사고의 틀 안에 들어와서 그 방식을 꺼내 쓰며 말하고 듣는 경우에 가깝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을 일일이 한국어로 해석하거나 동사를 찾거나 구문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영어가 말해지는 어순 그대로를 듣고 그대로 반응합니다. 이러한 감각들을 가지게 된 배경은 고등학교 때 달달 공부했던 수능 영어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문제 풀이 찍기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일부 토익 학원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영어권은 아니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곳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조금씩 몸 안에 스며든 경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외국어 공부를 위해서 반드시 그 언어권의 나라에 거주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 있으면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 공부의 방향성입니다. 저는 오랜 기간 외국에 거주하고도 모국어의 습관이 그대로 배어있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물론 모국어의 간섭이나 기존에 배운 언어의 간섭은 새로운 외국어를 배울 때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모국어의 간섭이 더 고착되는 것은 외국어를 있는 그대로의 그 언어로 접하며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문법적 설명, 구문 “해석” 중심의 언어 학습이 결코 진정으로 그 외국어를 ‘언어’로서 구사하고 잘 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를 보아도 명확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고 많은 다른 학과에서는 배우지 않을 국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국어학의 언어로서의 복잡한 체계, 규칙들을 공부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학”으로서의 언어와 “언어”그 자체로서의 “어학”으로서의 언어는 구분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저 자신조차도 친구와 대화할 때, “아 그래 여기는 구개음화를 써야지.”, “아 여기는 안긴문장을 써야지.”하면서 발화하지 않습니다. 그냥 즉각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한국어가 따로 공부한 “언어학”과는 다른 형태로 내 안에 이미 내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정말로 살아있는 언어로 익힌다는 것은 다른 언어에도 이 ‘내재화’를 얼마나 하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 언어에 대한 어문학적 지식이나 문법지식을 익히는 것과는 조금은 방향성을 달리합니다. 물론 그러한 지식이 그 언어를 익히는데 도움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핵심은 그러한 것들이 “어학적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모르는 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그 즉각적인 체화에 있습니다. 그 언어로 사고하고, 꿈을 꾸고, 그 사고를 언어로 표현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어로 사고하고, 꿈을 꾸고 말을 할 때 일일이 문법 규칙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하고 그곳에서 한국 문학과 국어학을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제 “한국어” 발화 실력이 더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언변에 능한 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쩌면 저는 이러한 국어학적 지식을 몰라도 좀 더 센스 있게 적재적소에 알맞은 어휘를 골라서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에 비해서 한국어를 못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학 실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말하기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등의 총체적인 실력을 가늠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 영역이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굉장히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살아있는 언어’로서 중요한 것은 “듣기”와 “말하기”영역입니다.


한국은 문맹률이 낮은 편이지만 많은 나라에 문맹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 국가의 문맹인 그 어떤 사람을 두고도 그 나라의 “네이티브 발화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나라 말을 사용해서 일상생활을 하고, 듣고 이해하고 말하는 바를 전달하고, 사고하고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이티브가 아닌 표현과 발음”에 즉각적인 위화감이나 이상함을 느끼는 감각과 귀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네이티브 언어로서의 그 언어를 체득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을 문자로 옮기거나 문자로 옮겨진 것을 읽지는 못할지라도 말이지요. 그럼에도 그 사람은 그 언어의 네이티브, 다른 말로는 다른 언어 학습자가 평생 학습해도 따라갈 수 없을 수도 있는 그 언어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언어 학습을 통해 네이티브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은 가능해도 완전히 네이티브와 동일해 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네이티브로서 받은 교육과 언어 노출 정도, 경험 등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자연스러운 말하기 영역의 네이티브 영역에서는 타 언어권의 5살, 7살 아이가 외국어 학습자 성인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네이티브 언어의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한국어에서 만큼은 다른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보다 이런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 영어 학습자 중 저처럼 영어를 학습했거나 하는 사람은 문맹과는 반대로 “보고 읽으면 뜻은 아는데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외국어 학습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네이티브 문맹과는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저 글을 보고 뜻은 아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의 언어는 ‘살아있는 언어’, ‘언어로서 내재화 된 언어’가 아니라 죽은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수 없는데 문자를 보고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언어’를 ‘언어 구사자’로서 하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진짜 그 언어의 구사자가 되면 그 언어를 더 이상 “해석”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글을 읽으며 한글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냥 “읽습니다.” 한글을 “독해”하는 일도 없습니다. 풀어서 해석할 필요가 없이 우리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쓰인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전문 용어나 어려운 표현, 혹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뜻을 찾아보거나 유추해 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한글의 “독해”까지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전문지식을 위한 글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글에서 “독해”를 요구하는 글이 있다면 그 글을 잘 쓰인 글이라고 평가하지 않고 잘 안 읽히는 글, 잘 쓰이지 못한 글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진정으로 어떤 한 언어를 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더 이상 “독해”하지 않는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해”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언어가 늘지 못합니다. 느는 것은 “빠른 독해 실력”입니다. 즉각적인 “읽기”와 “독해”는 다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을 보고 그것이 네이티브의 발음으로 머릿속에 쭉 들리고 그 쭉 들린 문장이 그냥 별다른 노력이나 모국어로의 치환, 해석 없이 그 뜻 그대로 이해가 될 때, 그 사람은 한없이 네이티브 발화자와 비슷한 영역에 다가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 체득의 목적은 단지 네이티브와 유사해지거나 네이티브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서 그 외국어를 체화하는 것입니다. “듣기”와 “말하기”가 빠진 언어, 책으로 하는 문법공부와 독해에는 이 언어 체화의 과정이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문학’ 학자의 외국어 학습 커리큘럼이 오히려 ‘언어’로서의 외국어 학습단계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어문학 중심의 외국어 학습은 어문학적 지식에는 해박해 질 수도 있지만 그 어문학이 즉각적인 ‘언어’사용 자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국어학적인 지식은 국어의 많은 용례와 사용을 보고서 국어를 밖에서 본 틀에서 분석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갓난아기에게 구개음화니 안긴문장이니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하는 발음과 단어, 의미를 가르쳐주지요. ‘언어’로서의 외국어 학습은 어문학자의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갓난아기가 언어를 학습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외국어는 그 문법적인 틀, 사고의 틀 자체가 모국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새로운 틀을 알고 익히는 것은 그 언어를 이해하고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 이해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발화의 영역, 사용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더욱 도움이 됩니다. 그래야 “한마디 말은 할 수 없지만 쓰인 글을 읽으면 해석은 할 수 있는” 사태를 면하게 됩니다. 발화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네이티브 환경의 “듣기”에의 충분한 노출 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