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의 실제, 죽은 말과 살아있는 말
제가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게 되었던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당시 대학에서 연극부에 들었었는데, 연극부를 하면서 워낙 농축된 시간을 보내서, 연극부 집행부 기간을 마치고서 연극부를 후배들에게 이월하고 나니,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비어버린 시간을 채울까 고민하다가, 문득 “나는 일본어 듣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데, 이참에 아예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우연히 일본어 은사님을 만나서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룹으로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 곳에서 일본어를 배우면 수업을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따라간다면 대부분 1년 안에 JLPT 구2급, 그리고 2년 안에 JLPT 구1급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인 수업이 갖춰진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장점으로는 일 년에 두 번밖에 새 학생을 받지 않는데, 그래서 같은 반이 된 사람끼리는 2년 동안 쭉 같이 학습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같이 비슷한 수준에서 외국어 실력을 키워가는 동지가 변함없이 2년간 지속되는 것도 외국어 공부를 학습하면서 큰 시너지가 되었습니다. 동료 학생들과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기도 하고 같이 따로 스터디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금 늦게 반에 합류해서 수업을 듣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JLPT 구2급에 합격하고, 그 시험 성적으로 일본 교환학생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을 하였으며, 교환학생에 가기 전인 일본어 학습을 시작한지 1년 반 만에는 JLPT 구1급에 합격을 하고 곧바로 일본 츠쿠바 대학교로 일본 정부 장학금을 받고 교환학생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냥 ‘한번 일본어를 더 본격적으로 공부해볼까?’정도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교환학생 신청과 합격은 당시에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성과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생님께 배웠던 언어 경험이 제가 언어를 언어로서 공부하고 접하는 토대를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사실은, 일본어 공부를 하기 이전에 대학에서 활동했던 연극부 활동이 어학 공부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본어 선생님도 우연히도 연극을 하셨던 분이라 그 부분을 알고 계셨습니다.
연극이 어학 공부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이전에 적었듯이, 연기를 제대로 배울수록 연기는 “연기하지 말라고”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냥 목소리 톤이나 이럴 것 같은 어조 등을 흉내 내거나 만들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캐릭터를 분석하고, 그 캐릭터가 처한 상황, 감정을 이해하고 대사가 있으면 그 캐릭터가 어떤 감정과 마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한 마디 문장을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캐릭터의 모든 대사에 대한 이해, 캐릭터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진짜 연극은 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수업을 하셨던 연극부 졸업생 선배 언니에게 연극 화법 연기 지도를 받았었는데, 그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가 “연기하지 말라.”는 것과 말은 그렇게 ‘정말로 그 말을 내가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발화의 필요성과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캐릭터가 정말 그 말을 해야만 했던 이유와 감정 등을 더 찾아가게 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캐릭터를 연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캐릭터가 되어서 정말 그 마음을 가지고 발화를 할 수 있을 때 연극은 살아있는 것이 되었고 관객에게 전달되는 무엇이 생겼습니다. 그냥 대사를 외워서 내뱉거나 이런 식으로 말해야지 하고 대사를 말하면 그 연기는 가짜가 되고 그냥 연기가 되었습니다. 밖으로 전달될 수 있는 그 중심이 사라졌습니다.
어학 공부에서 연극 경험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닌, ‘말’자체에 대한 핵심, 본질에 접근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즉, 그냥 대본에 적힌 대사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사에 나의 마음, 감정, 의도, 어떤 내 안의 밖으로 꺼내서 전달하고 싶은 어떤 것이 없는 채로 대사를 한다면 그 말이 죽은 말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어학 공부를 할 때 대화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단순히 대화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가 아는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해가면서 말하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대화문의 대사가 의미하는 바, 인물이 전달하려는 바를 파악하고, 그 마음을 담아서 그것을 외국어라는 형태로 발화하도록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대사라도 당황했을 때, 놀랐을 때 등 모든 대사가 다르게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일본 노래들을 뜻을 모르는 채 따라 부르면서 네이티브의 인토네이션이나 발음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던 상태였고 제가 일본어를 직접 발화했을 때 ‘이건 어딘가 어색한데?’, ‘지금은 좀 더 일본어처럼 들렸나?’같이 제 피부에 일본어의 언어 감각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던 때였습니다. 이 언어 감각의 형성, 자기 스스로 자신의 소리나 발화를 듣고 어색함을 느껴서 교정할 수 있는 그 감각의 형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외국인의 어색한 한국어 발화를 들으면 즉각적으로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다든가 내가 말실수를 했을 때 ‘아 이건 좀 이상한 발음이었어.’라고 느낀다든가 스스로 오타가 났을 때 다시 읽고 오타를 잡아낼 수 있는 능력과 비슷합니다. 이는 내 안에 좀 더 올바른(네이티브에 가까운) 발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것이 학습이 되어서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전에 말했던 네이티브의 대화 발화 환경에 충분히 노출되는 경험이 없고서는 생기기 힘들 수 있습니다. 글줄이나 오디오 북 녹음, 뉴스 진행이나 어학 테이프가 다 담을 수 없는 미세하고 풍부한 많은 정보들이 그런 네이티브 대화 속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글줄을 읽고 상상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충분한 노출을 통해서 익숙해지고 학습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언어는 무에서 유를 내가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해서 쓰이고 있는 그 도구를 나도 사용할 수 있도록 익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창조해서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 세상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 외계어가 됩니다.
저는 그러한 외국어 대화에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충분히 노출이 되었던 경험과, 연극 경험을 통한 말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맞물려서 일본어 학습에 있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