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의 실제, 네이티브 발화 환경의 노출
제가 지금까지 적은 이야기는 스스로 어학 공부를 하면서 느끼고 찾아간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통계결과나 연구결과가 아니라 실제로 이런 저런 학습 방법을 시도해가면서 언어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저만의 어학 공부 방법을 확립해나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배경에는 제가 공부했던 일본어 학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어를 그렇게 싫어했고, 수능 영어에서 고득점을 맞았지만 언어로서 영어를 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한 마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과 다르게 일본어는 공부를 시작한 후에 단기간에 일정 수준으로 올라갔고, 그 경험이 준 것이 굉장히 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전에도 묘사했던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언어가 더 이상 장벽이 되지 않은 채로 외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기쁨, 그 언어로 된 매체를 부담 없이 찾아서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된 편리함, 그것은 언어로서 외국어를 익혔을 때 찾아온 큰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일본어를 공부했던 방식이 내가 이전에 영어를 공부했던 방식과 어떻게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겼을까’하는 질문과 경험에서 언어 학습을 어떤 방향성으로 하는 것이 지름길일까, 혹은 그 언어로서 그 외국어를 이해하고 만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했었고, 그것이 학교에서 수능 독해 위주로 배웠던 영어 학습과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80년대 90년대의 따뜻함이 풍기는 작품들을 많이 좋아해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군 중 하나는 “키다리 아저씨”나 “로미오의 푸른 하늘”같은 “세계명작동화시리즈”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만화 채널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아서 공중파에서 하는 몇 개 안되는 만화를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같이 봤고 그래서 당시의 유명한 방영 작품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문화가 개방되지는 않아서 지금처럼 일본어 원어로 된 방송이나 넷플릭스 등의 서비스가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서히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일본 음반들도 수입이 가능해지고, 일본의 일부 인기가 있던 애니메이션 DVD들은 한국에 정식으로 발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더빙으로 좋아했던 작품을 일본어로 다시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에 일본 원어로 좋아했던 작품들을 보기 시작했고, 그것이 제가 일본어에 노출되게 된 첫 배경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다보니 애니메이션 시작 앞부분에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듣게 되고, 그 주제가를 따라 부르기 기작하면서 아무런 의미도 뜻도 모르면서 노래 자체를 따라 부르곤 했습니다. 당시에 노래방에도 일본노래가 들어오기 시작해서 일본어 가사를 한글 독음과 함께 띄워주기도 했는데, 노래방에 가서도 그런 애니메이션 노래를 종종 부르곤 했습니다.
모든 작품들은 자막과 함께 봤었고 일본어를 이해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가끔 하는 쉬운 단어나 표현이 들리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단어가 아니라 그 당시의 표현입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가 부해에 누워서 하던 감탄사인 “綺麗(아름답다)”와 “명탐정 코난”의 코난이 범인에게 허를 찔렸을 때 하는 “しまった!(아차! 혹은 당했다!)였습니다. 이러한 짧막짧막한 일본어가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어조, 느낌과 함께 인상에 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토막토막 알게 된 어휘도 조금씩 늘어 가기도 했습니다.
특히 뜻도 모르는 채로 일본어 주제가를 따라 부른 것은, 일본어 발음을 한국어 발음의 영향 없이 들리는 그대로 모방하고 따라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언어인 일본어를 말하거나 뜻을 번역하려고 시도하면서 일본어를 발화한 것이 아니라, 음률과 노래로 일본어를 그대로 익혔기 때문입니다. 곡은 멜로디와 음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멜로디를 따라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외국어로서의 그저 음소 단위의 발음을 익히고 말하는 것 보다 더 자연스러운 원어와 비슷한 발음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발음 방법의 교육이나 모국어의 저항 없이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데 더 집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뇌에서 언어만을 담당하는 곳과 노래를 담당하는 곳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래서 사고로 뇌를 다쳐서 말을 못하게 된 사람도 노래를 가르치면 다시 노래하는 부분을 이용해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듣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래 따라 하기’는 한 음절의 길이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의 받침 발음과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일본어의 ん발음이나 장음 등을 자연스럽게 익히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어도 하나도 모르고 뜻도 제대로 모르고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본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리로서의 일본어 자체가 더 자연스럽게 학습이 되었고 이 소리, 듣기와 노래로 먼저 시작했던 일본어 공부는 훗날 실제로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큰 바탕이 되었습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저는 일본 원어 애니메이션 작품들도 DVD를 통해서 꾸준히 시청하기 시작하면서, 직접적으로 일본어를 배우지도 익히지도 않았지만 일본어 듣기, 그것도 그냥 어학 테이프 같은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대화체의, 살아있는 언어로서의 일본어 듣기 환경에 오래도록 노출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시 TV판 애니메이션은 26화나 52화 완결 작이 많았는데, 각 화는 20분씩입니다. 3화를 보면 1시간이고 26화를 보면 거의 9시간에 이릅니다. 이 26화를 반복해서 보면 그 9시간이 쌓입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이미 일본어 학습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장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일본어를 듣는 환경에 꾸준히 노출이 되고, 또 노래를 통해서 일본어를 발음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