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하 Oct 24. 2021

‘언어’로서 영어 새로 공부하기, 한글 자막의 문제점

5-4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의 고급단계, 각 언어가 세상을 보는 틀

저는 영어는 ‘언어’로서 새로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일본어만큼 단기간에 집중해서 몰입한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실제로 영어 실력은 기본기가 탄탄하지는 않고 실력 향상도 일본어 보다 더딘 편입니다. 그래서 새로 언어를 익힐 때는 특히 기본 단계에서는 대화문을 중심으로 한 집중 언어 학습 기간을 가지는 것이 실제 어학 학습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수한 표현을 하나하나 익히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 틀이 자기 안에서 확실히 자신의 언어의 구조로 자리잡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본의 틀을 형성하는 과정을 얼마나 거쳤는지가 나중에 쌓는 집을 좌우하는 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마치 집의 바탕을 쌓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완전히 단계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덧셈을 못하면 곱셈을 못하는 등의 한 개념이 없을 때 다른 것이 불가능한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종합적으로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본 토대에서 점차적으로 복잡한 체계의 이해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복잡한 체계를 접하면서 아직 불안한 기본 토대를 점점 보완하고 수정해 가능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시간과 열정이 있을 때는 집중적으로 한 언어를 대화문을 시작해서 기본부터 쭉 공부해 나가는 것을 훨씬 추천합니다. 


그러나 따로 이런 식의 몰입하고 집중하는 학습 시간을 내기 어렵고 어느 정도 언어가 초보가 아닌 궤도에 올라 있으면 제가 따로 ‘공부’를 하지 않고 그저 제가 좋아하는 일본어로 된 매체를 즐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많이 접해서 JLPT N1급 세 번 연속 만점을 받았듯이, 그 언어로 된 뭔가를 꾸준히 접하는 것도, 집중적으로 대화문을 학습하는 만큼은 아닐 수도 있어도 어느 정도 외국어 학습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완전히 영어 자체를 ‘공부’하는 시간은 가지지 못하지만 꾸준히 영어로 된 책을 읽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가끔 보기도 하면서 영어와의 접촉시간 자체를 늘리고 있습니다. 또한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하면서 꾸준히 영어를 접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영어권 국가에 거주한다면 이런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도 그 언어에의 노출과 사용 정도는 훨씬 높을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 영어로 된 강좌를 듣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펄머철쳐 디자인 코스 등 제가 흥미 있는 코스를 영어로 듣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직접 영어로 소통하고 수업을 듣는 것이 영어 자체에 익숙해지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 단순하게는 유튜브 등에서 흥미 있는 강좌 등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장점은 언어 학습이 언어 학습 자체의 ‘목적성’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내가 ‘흥미 있고 알고 싶은 것’자체에 더 초점이 맞춰지고 영어 자체가 ‘수단’이 되기 때문에, 영어 공부 자체에 대한 어떤 부담이나 노력 없이도 영어 실력을 조금씩 늘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를 이미 ‘언어’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언어 학습이 가지는 본래적인 의미의 목적을 이미 수행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언어는 단순히 자격증도 아니고, 토익 점수 같은 숫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내가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단계는 아예 그 외국어를 모르는 초급 단계에서는 하기 불가능한 방법이고, 어느 정도 그 언어에 익숙해진 중고급 학습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특히 아직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거나 영어 소설책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발음해서 읽을 수 있을지 잘 모른다면, 그 단계의 영어 원서 소설책은 좋은 교재가 아닙니다. 문자언어보다 우선하는 소리 언어가 내 안에 형성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소리 언어를 익혀야합니다. 차라리 자막과 함께 보더라도 주의 깊게 들으며 영어로 된 영화를 보거나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는 일본어와 다르게 한국어와 완전히 언어적인 뿌리를 달리 하는 언어입니다. 일본어를 정말 반 농담으로 한국어의 어마어마하게 떨어진 사투리 같은 감각으로 배우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면 영어는 그 조차 불가능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어순이나 문장 구조, 즉 그 언어 자체를 구성하는 틀 자체가 다릅니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물론 다른 언어이고 더 깊게 들어갈수록 그 다른 부분이 명확합니다. 제가 일본어를 배울 때는 일본어는 좀 더 명사 중심의 언어이고 한국어는 동사 중심의 언어라고 배운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인데, 실제로 일본어는 많은 표현을 명사화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고 그런 일본어 명사나 표현은 한국어로 바로 직역이 되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느 정도 닮은 언어일 뿐, 그 속으로 계속 들어가면 다른 언어임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어는 일단 한국어와 닮아서 그냥 많이 듣고 접해도 그 일본어의 구조를 배우고 익히기 시작한다면 어느 정도 한국인이 그 구조를 파악하거나 익숙해지기 비교적 쉽고, 초반에는 문장 내의 어느 정도의 “치환”으로도 문장을 이해하거나 완성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더 깊게 들어가면 사용이 다른 경우가 더 많아서 실제 일본어 표현을 많이 듣고 그 자체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이 ‘치환’이 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닮은 언어라는 것은 언어의 틀을 이해하기 쉽게 해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는 자막을 볼 때 큰 도움이 되는데 큰 의역을 하거나 일본어식 표현이 사용되지 않은 경우에는 한글 자막의 순서나 내용이 말해지는 일본어의 순서와 내용과 유사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어는 한글 자막으로 접해도 어느 정도 그 한국어 단어의 일본어 표현으로서 단어를 익히거나 하는 편이 쉬운 편입니다. 심지어 한자어는 공유되어서 발음이 유사한 단어도 많습니다. 물론 “치환”식으로 생각을 해서 언어에 접근하면 실제 그 언어에 닿을 가능성은 더 적어집니다. 말했듯이 각 언어는 그 문화권이 고유하게 세상을 보거나 그 세상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틀 자체를 익히기 위해서는 완전히 그 틀 자체의 방향에서 봐야지 내 언어의 틀로 다른 언어를 치환하고자 하면 반드시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 닮은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어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일본어의 말하는 방식이나 표현방식, 세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한국어의 그것과 다릅니다. 실제로 일본어는 私, 僕, 俺, 儂, あたし, あたくし, うち, 俺等 등 ‘나’를 호칭하는 방식이 한국어에 비해서 다채로운데 내가 무엇을 사용하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의도나 성격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언어권에 대비되는 일본어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 성을 부르는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으며 똑같은 발음을 가진 성이 많은 한국은 이 부분이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일본어 작품을 번역할 때 독자의 감각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을 부르는 호칭을 이름으로 수정해서 번역해 발간하기도 합니다. 한국어는 일본어의 다양한 ‘나’를 다양하게 번역할 만한 도구를 한국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어의 다양한 ‘나’ 호칭 표현이 가진 어감은 실제로 그 일본어의 맥락과 표현 안에서 사용되는 어감을 느껴가면서 형성해야합니다.


그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로 1:1치환이 되지 않으며, 그 언어의 세상을 보는 틀, 문화적 틀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틀 자체를 익히는 그 접근을 해야 합니다. 번역을 통해서 다른 언어의 핵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언어 학습이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그 언어를 번역하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그 언어 자체로 이해하는 단계로 가게 되고, 그 언어로 사고하고, 말하고, 꿈을 꾸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번역이 필요해지면 어떻게 번역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고민하게 됩니다. 내 안에 형성된 그 외국어의 감각이 내가 아는 모국어의 감각과 완전히 1:1로 치환되거나 일치하지 않아서 더 근접한 표현, 더 잘 표현 할 수 있는 어휘나 단어를 찾아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을 토씨도 다르지 않게 동일하게 번역하는 번역가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번역은 그렇게 내가 이해한 그 언어의 틀을 다른 언어의 틀로 어떻게 옮길 지를 섬세하게 고민하고 작업하는 일종의 창작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개성이 들어간 창작물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떻게 번역되는가?’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운 언어로 어떻게 보고 표현하고 이야기할까를 배우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새로운 표현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수채화로 그린 정물화와 유화로 그린 정물화는 같은 사물을 보고 그려도 그 느낌과 표현이 다릅니다. 표현 도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도 이와 같습니다. 수채화를 잘 그린다고 해서 유화를 바로 잘 그리기는 힘듭니다. 두 도구의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붓을 사용하는 등 유사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한 도구에 익숙하면 다른 도구도 어느 정도 더 익숙하게 익힐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이와 비슷합니다. 수채화로 그린 그림을 유화로 동일하게 그려서 똑같은 느낌을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어 번역도 이와 같습니다. 번역을 거치는 순간 원래의 그것과는 다른 무엇이 됩니다. 원본을 비슷하게 재현하고 싶다면 나도 수채화를 사용해서 그려야 합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려면 그 언어 자체의 사용법을 익혀서 그 틀 안에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완전한 재현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외국어 학습자가 네이티브에 한없이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네이티브가 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을 나타낼 수도 있고, 혹은 언어 사용 자체는 사용자의 개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국어 화자도 똑같은 한국어를 구사하지 않습니다. 목소리 톤, 굵기, 어조, 높이, 말투, 선택하는 어휘, 표현방법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네이티브 한국어”로서 이해하는 어느 정도의 틀은 존재합니다. 즉 틀, 이 도구를 익혀서 어떻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가는가, 즉 어떻게 내 안에 있는 무엇을 밖으로 보는 이가 알아볼 수 있게 표현해내는가를 익히는 것이 언어 학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언어는 그림으로는 추상보다는 구상화에 가깝습니다. 보는 이가 보고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을 표현해내는 것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도구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감정이나 어떤 것들을 표현하는 많은 매체로 그래서 다양한 예술 영역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음이, 몸짓이, 색채가 글이나 말로는 담아내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매체는 장벽에 막힌 언어와 다르게 시공간을 넘어서 공감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언어도 표현도구로서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좀 더 예술적인 시의 영역 등에 들어오면 구상보다는 추상에 가까운 것이 됩니다. 즉 보는 이가 즉각적으로 곧바로 무엇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언어를 학습할 때의 출발은 소통의 본질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기분에 따라 아무렇게나 생산하는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로 공유되는 소리를 내가 발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리 언어로서 그 소리 자체에 익숙해지고 그 소리를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목이나 목젖, 입술, 혀 같은 신체 기관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외국어를 발화하는 기본적인 도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구의 활용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이올린도 손으로 퉁기거나 활로 연주를 하는 것이 차이가 나듯이 우리 몸의 연주방식에 따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소리는 다양하고 그 연주방식, 즉 언어 소리의 발음방식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방식의 발음방식, 연주방식을 익힐 때야 비로소 그 나라 언어를 좀 더 그 나라 언어로서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언어를 듣고 그것을 내 언어의 자음체계나 모음 체계로 바꿔서 적어보거나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결코 그 언어의 올바른 발음이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ㄱ과 g는 다르고 q와 ㅋ은 다릅니다. 우리가 한국어로 적은 외래어나 영어 단어는 한국어화 된 영어, 즉 한국어이지 영어 자체가 아닙니다. 컵도 cup과는 발음이 다릅니다. 이는 활로 연주하는 곡을 아무리 손으로 퉁기면서 똑같이 연주하려고 해도 똑같은 곡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 그 언어는 그 언어의 구조 안에서, 그 언어의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번역 식 사고는 완전한 그 언어에 닿게 되기 힘들고, 내가 그저 번역해가면서 원서를 독서하고 있다면 나는 그 언어를 언어로 익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듣고 그 뜻이나 표현이 외국어 자체로 들어오고 나도 내 안에 있는 어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그 외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늘어갈 때 진짜 그 언어를 언어로 사용하는 단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번역은 도움이 되는데 이미 한 언어에서의 표현 틀이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좋은 보조도구로는 이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Rage, anger, fury 등이 다르고 한국어와 1:1치환이 되어서 번역되지 않을 수 있지만 학습자는 이 단어들을 한국어의 “화”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는 단어를 이해하고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단어는 좀 더 분노에 가까운 단어인지 등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단어를 이해하는 도구이자 단서가 됩니다. 즉 우리는 이미 하나의 표현도구, 모국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모국어는 다른 틀, 표현 도구를 익히는데 있어서 예시나 방향을 이해하는 도구로는 활용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차이도 같이 익히면서 그 외국어가 가진 고유의 감각을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경험을 바로 표현하는 어떤 외국어 단어는 떠오르는데 그 외국어를 한국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일상에서 종종 그런 경험을 하는데 그것은 각 언어가 구획 짓고 표현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한국어보다 명사가 중심이라고 말해지기도 하는 일본어에서는 한 단어나 명사로 표현되는 것이 한국어에는 그 비슷하게라도 치환되는 명사가 존재하지 않아 쭉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대로 한국어의 어슬렁어슬렁, 훌훌 같은 감각어들은 그 자체의 어감을 다른 언어로 완전히 번역하거나 치환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그 설명을 한다고 해도 본래의 단어가 사용될 때의 어감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런 단어는 다른 언어를 배운다고 해도 다른 언어가 가진 틀이 가르치는 표현과의 교집합을 찾기 힘든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는 한국어의 틀이 아닌 새로운 틀도 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어떤 것을 표현하는 다른 수단이나 내가 인식하는 어떤 새로운 감각을 익히게 됩니다. 만약 ‘어슬렁어슬렁’이 없는 문화권에서는 우리가 ‘어슬렁어슬렁’이라고 느끼는 무엇을 접해도 그것을 곧바로 표현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본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틀의 교집합이 한국어와 그래도 겹치는 듯 한 부분이 존재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그 언어의 차이를 보면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구조적인 틀에서 적어도 영어보다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자막을 봐도 소리를 듣는 것이 방해받는 정도가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어가 영어나 한국어와 크게 다른 점은 한자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본어 자막을 보고 알아본다는 것은 그 자막을 알아보고 읽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 따로 한자 학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어 영상 매체를 한글 자막을 통해 보는 것은 어느 정도 일본어 학습에 도움이 되는 면이 있습니다. 들리는 일본어가 한국어로 번역될 때 어순의 변경 등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들리는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하기에도 용이합니다.


그러나 초급 영어 학습자가 한글 자막과 함께 영어로 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일본어와 같이 외국어를 들으면서 동시에 번역된 자막을 보고 외국어를 파악하고 공부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막을 읽고 집중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쏟게 되어서 발화되는 영어를 듣는 집중력이 분산될 수 있습니다. 즉 영어 듣기 자체가 익숙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막을 읽다보면 영어 자체를 귀담아 듣지도 않게 되고, 영어 자체 발음이 한국어의 발음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 영어 발음방식이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에는 그냥 듣기만 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도 힘들 수 있습니다. 


일본어는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비교적 발음이 쉬운 언어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전히 네이티브처럼 발음하는 게 쉬운가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적어도 일본어는 일단 글자가 자음 모음이 분리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소리 나는 음절의 수가 다른 언어보다도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 발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들리는 소리를 이해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요미가나로 풀어 쓸 경우에는 발음과 쓰이는 말이 비교적 일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어의 경우에는 음소의 발음 자체도 다양하고 묵음 등도 많습니다. 그래서 단어 별로 철자나 읽는 방식을 익혀야합니다. 그래서 그 철자를 보면서 소리를 듣는 방식의 학습은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영어는 철자 학습 없이 단지 듣기만으로 올바른 철자를 유추해서 적을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자막은 철자를 아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는 한국어와는 문장 구조가 크게 다릅니다. 가장 크게 동사가 앞에 옵니다. 이것은 아예 문장을 표현해서 발화하는 방식 자체, 말을 구성해가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한국어와 비슷하게 동사가 가장 뒤에 오는 일본어와 영어의 큰 차이점 입니다. 그래서 영어 작품의 경우 한글 자막과 함께 본다면 한글 자막이 영어의 구조와 너무 크게 달라서 오히려 영어를 들을 기회를 많이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어의 경우는 어느 정도 영어 학습이 진행되고 ‘소리 언어’로서의 영어에 익숙해지면 무자막이나 영어 자막으로 보는 것을 더 추천합니다. 저도 영어 작품을 영어 공부도 겸해서 볼 때는 주로 영어 자막을 많이 이용하는 편입니다. 이것은 ‘나는 한글 자막 없이 알아들을 수 있어.’같은 과시 같은 거라기보다, 한글 자막이 영어를 듣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반에 새로운 작품을 감상할 때는 자막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내용 이해에 더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 처음에 한글 자막과 함께 보고 그 다음에 영문 자막이나 무자막으로 보면서 공부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혹은 이중자막을 지원하는 서비스가 있으면 이중자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나중에 영어 듣기가 많이 익숙해지면 자막 여부에 상관없이 영어가 들려서 한글 자막으로 보아도 한글 자막 번역을 왜 그렇게 의역했는지 나 더 좋은 번역은 없었을까를 생각해보는 등 하면서 보게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초급 때는 영어 등의 언어의 경우에는 자막이 오히려 들리는 말을 듣기 어렵게 방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뇌가 동시에 완전히 다른 두 구조의 문장을 처리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영어 자체로 이해하는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영어 매체는 한글 자막이 아닌 영어 자막을 이용하는 것을 더 추천합니다.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등 같은 경우에는 물론 세부적으로 매우 다르지만 적어도 어순 등에 있어서 한국어 보다는 영어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과 한자어를 공유해서 한자를 알게 되면 서로의 언어에서 발음은 달라도 그 의미가 공유되듯이 라틴어 어원 같은 것을 공유하는 단어도 많아서 발음만 다르거나 유사한 단어도 많습니다. 그래서 언어 구조가 비슷해서 일본어 작품을 볼 때 한국어 자막이 덜 방해가 되고 도움이 되는 면이 있듯이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등을 들을 때 영어 자막을 보거나 반대의 경우에도 도움이 되는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 매체에 한글 자막을 언어 공부의 의미로 완전히 추천하지 않는 것은 아예 문장 구조, 즉 언어의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자체 have나 get등의 동사의 감각이나 느낌을 살리는데 있어서 한글 번역은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글은 영어의 have나 get처럼 쓰이는, 바로 치환되는 동사 사용도 없고, 관사나 현재 완료 같은 사용도 존재하지 않아서 한글 번역과 영어만을 나란히 놓고 보면 영어 자체의 감각을 많이 잃게 됩니다. 한글로 완전히 번역이 되지 않는 영어가 가진 구성 요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어’로서의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그 외국어 자체를 그대로 사용하는 감각을 계속 더 늘려갈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어가 번역된 의미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가 하나의  의미나 감각으로 들리게끔 감각과 연결하고 훈련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hungry를 한국어 배고프다는 뜻과 엮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몸에서 음식물을 요구하는 듯한 이 허기진 감각과 hungry를 연결하여 그 감각을 느낄 때 나도 모르게 hungry하고 말이 튀어나오게끔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봐도, 그것을 번역해서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지금 저 인물이 저런 기분을 느끼고 있고 저런 말을 하고 싶을 때 이렇게 말을 하는구나 하고 영어 자체로 듣는 것입니다. 


영어는 한국어와 동사나 전치사의 용법이 다르기 때문에 직역하면 이상하게 들리거나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번역이 아니라 그 영어 표현의 의미 자체를 감각적으로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 27화 JLPT N1급 세 번 연속 만점의 마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