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의 고급단계, 끝이 없는 어학 공부
대화문 중심의 기초 교재를 통해서 소리 언어 중심으로 한 외국어의 기본 뼈대 학습을 하고, 나아가 읽기와 쓰기까지 단계별로 학습이 되고, 프리토킹 학습도 경험을 했다면 외국어의 중고급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선생님이나 교재가 달라지게 될 수도 있고 혹은 직접적인 교재를 통한 학습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 외국어가 어느 정도 ‘언어’로서 내 안에 자리를 잡아서, 그 언어를 활용하고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좀 더 고급 단계의 학습을 바란다면 필요와 흥미에 따라서 동시통역이나 순차 통역 등의 고급 영역의 학습을 따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단지 학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언어로서 그 외국어를 계속 갈고 닦아나가는 단계가 됩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 외국어를 계속 접하는 기회를 계속 가지는 것입니다. 언어 학습도 흐르는 강물에 놓인 배 같아서 사용하지 않으면 빠른 속도로 물살에 쓸려서 뒤로 돌아가듯이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습한 외국어를 간접적으로라도 계속 접하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 언어는 단순히 이력서에 쓰이는 ‘내 능력’이나 어학 점수로 기록되는 ‘내 점수’가 아니라 내 삶의 일부이자 사용 언어 자체로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외국어를 학습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더 가까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쓰이는 수단으로서 가치가 크기 때문입니다. 도구를 관리하지 않으면 녹이 슬듯이 내 언어 능력도 꾸준히 길을 들이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관리는 의식적인 ‘공부’차원이 아니라 ‘활용’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전에는 일부 어학 교재가 그 외국어의 교재가 되었다면 이제는 그 외국어로 된 모든 것이 자신의 교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외국어의 뼈대를 이해하고, 틀을 학습해서 그 외국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직접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단어나 표현을 다 알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단어, 새로운 표현을 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 접하는 것들은 내가 쌓은 내 언어의 틀 위에서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이것은 한국어 모국어 화자가 새로운 한국어 단어나 표현을 접했을 때 그것을 새롭게 익히고 알게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학습한 외국어로 된 방송, 라디오, 신문, 책, 잡지, 인터넷의 글 등 모든 것이 나의 교재가 되며 또한 그냥 내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내 정보원이자 창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모국어로 되어있지 않은 정보도 번역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접할 수 있는 힘을 키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그 관련 정보를 더 폭넓게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좀 더 다양한 문화권의 의견을 집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즉 외국어 학습으로 인해서 내가 접하고 알게 되는 세계나 정보의 양이 넓어지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내가 좋아하고 흥미 있는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책 등이 존재한다면 번역이나 자막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즐기는 과정 속에서도 계속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접해 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즐기는 와중에도 언어 실력은 계속 상승하는 시너지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즉 학습한 외국어는 단순히 학습이라는 내가 투자하는 시간을 요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응용하고 사용하는 내 일부가 되며, 그 상태로 나와 함께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언어를 접하지 않게 된다면 언어 감각은 더 떨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습을 더 계속한다면 언어 능력은 물론 더 상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자신이 그 외국어에 능숙해지고 싶은 정도가 어떠한지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보고 싶은 매체들을 대체로 무리 없이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가 가능한 선에서 만족하면서 심화 학습을 중단한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언어를 심화로 계속 더 공부를 하면 그 언어를 더 만나가면서 좀 더 새로운 기쁨을 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모국어인 한국어도 통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말은 언어적인 아름다움이나 구조 등은 모국어 화자도 더 깊이 공부해 볼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독특한 기쁨을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은 외국어 공부 뿐 아니라 삶의 큰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모국어 사용자이든 외국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이든 어느 국적의 어느 문화권의 친구이든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의 외국인 친구의 경우에는 그 문화적 장벽과 언어적 장벽을 넘어서 소통한다는 작은 감동이 함께 있습니다. 문화권에 따라서 아주 세밀한 경험이나 상식이 다른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러한 소통은 큰 충격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세계를 확장시켜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기후 등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일상생활의 느낌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계절 별 인상도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거주했던 유럽 쪽은 여름이 건조하고 겨울이 습했는데 이런 하루하루 피부로 느껴지는 경험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큰 편이었습니다.
물론 외국인 친구는 내가 생산하는 오류를 다 고쳐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네이티브의 생생한 예시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친구는 친구인 동시에 나의 간접적인 언어 선생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둘 다 모국어 화자가 아닌 채로 영어 등의 공용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경우에는 이런 언어적인 오류 교정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과 만남이 새로운 문화권을 알고, 만나고 경험하는 통로가 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어지는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학 공부의 “끝”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학은 수능 만점을 받았다. 끝. 하는 종류의 “골인 지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국어인 한국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그 누가 가장 한국어를 잘 마스터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 분야의 어려운 전문적인 용어들을 많이 알고 있는 법조계나 의료계 사람들일까요? 혹은 발음을 특히 많이 연습한 아나운서나 기자, 성우일까요? 강연자일까요? 문학적으로 유려한 표현을 쓰는 시인이나 소설가일까요? 같은 모국어 화자라고 할지라도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한국어의 능숙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한국어를 마스터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처럼 말 하고, 소설가처럼 유려한 표현을 쓰며, 의료계나 법조계의 종사자들처럼 전문 용어를 다 알아야 한국어를 마스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한국어 네이티브 발화자이지만 제가 모르는 한국어 단어와 표현은 무수히 많습니다. 기자처럼 발음이 정확하지도 시인처럼 심상적인 표현을 유려하게 많이 쓰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어 모국어 화자로 살아가고 있고, 제 한국어도 알게 모르게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언어 학습입니다.
언어나 외국어 학습 자체에 있어서 궁극적인 골이나 종착지가 있기는 힘듭니다. 언어 자체가 그 지식을 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기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필요한 정도의 수준에서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어학실력을 갖추는 것 정도를 목표로 한다면 어학 공부의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외국어를 “활용”하기 시작한 중고급 단계에 왔다면, 내 교재를 통한 어학 학습은 마무리 단계에 왔다고 할 수 있고, 또 진짜 어학을 사용하면서 계속 익혀가는 내 진정한 어학, 외국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에 끝이나 완성은 없습니다. 언어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살아있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학습한 외국어를 내가 사용하면서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간다면 언어 학습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