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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각화 May 25. 2024

지칠 줄 모른다 그리고 ...

풀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나 김수영시인의 시 <풀>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 <풀>

'풀'과 '바람'이 상징적으로 대조됨을 느꼈던 시.


길을 걸으며 밟고, 집 앞마당에 널렸던 잡초를 뽑기에 바빴던 그날들에서, 교과서에서 이 시를 만나고 '풀'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두었고, 지금까지도 느낌 그대로 담겨있다고 해도 만큼, '풀'에 대한 생각은 이 시 한 편으로 강하게 박혀 있는 것 같다.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숲.

나무가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는 숲

그리고 빈틈없이 자리한 풀




이 숲의 주인은 나무일까, 풀일까

아니면 저 사람일까


풀은 지침이 없다.

풀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널리 알린다.

바람으로, 곤충의 날개로, 곤충의 다리로, 동물들의 털자락으로, 사람의 발걸음으로, 사람의 옷자락으로, 자동차의 바퀴로. 풀씨는 뿌리내릴 어떤 곳만 있다면 이내 자란다. 일부러 물을 대주지 않아도 태양볕이 몇 날 며칠 드리우지 않아도 한겨울은 다 죽은 듯 드러났던 맨땅에 봄이 올라치면 바로 싹 틔우고 자라난다. 풀은 그 정도로 지침이 없고 악착같은 끈질김으로 생명력을 이어간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숲을 바라보면 저 숲의 주인은 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 이곳은 나의 터전임을 말하듯 온몸으로 버티고 다시 돋기를 반복하니 말이다.


풀들을 정리하고 난 주말농장

나는 주말 농장을 하고 있다. 키워내야 하는 작물들이 있어 풀을 뽑고 또 뽑는다. 내가 키워내야 하는 것은 먹거리이고 풀의 생명력을 알면서도 먹거리를 위해서 뽑고 또 뽑는다. 그럼에도 풀은 자라고 또 자란다. 뿌리털 몇 개가 남아있어 그 자리에 다시 자라기도 하고, 날아온 풀씨로 뽑아낸 그 옆자리에서 자라나기도 한다. 너도 생명이라는 생각으로 풀과 공생하고 싶어도, 작물을 위해 나의 먹거리를 위해 열심히 뽑아내며 풀과의 전쟁을 하지만 늘 풀이 이긴다. 풀과 전쟁하지 않고 싶은 마음에 비닐을 씌워보지만, 작물을 수확하고 밭을 정리하며 비닐을 걷어내 보면 그 검은 비닐 아래에서도 풀은 자라나 있다. 오히려 따뜻한 보금자리라도 얻은 양 억세지 않은 부드럽고 온순한 풀로 누워있다.


살며 다양한 위기가 있고, 지침이 있고, 꺾임도 있다. 뿌리째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고 이것이 끝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얼마 전 연재를 마친 브런치북 ≪아득한 어둠 속_꽃은 피어난다≫에 담은 것처럼 힘겨웠던 시간에서 버티고 이겨냈던, 무너질 것 같았던 그 끝자락에서 이겨냈던 힘. 풀처럼 악착같은 끈질김, 그 생명력을 풀로부터 배웠다고 한다면 어폐일까? 삶의 고난이 나를 흔들어도, 어떤 강인한 힘이 짓밟아도 일어설,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을 풀로부터 배운다.


그럼에도 뽑아내면 뽑아낼수록 더 질겨지고 억척스러워진 풀처럼 모질만큼은 익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강한 바람에 대항하지 못하고 눕는 날도 있을지 모르겠다. 살기 위해 누워버릴지도. 그렇게 누워 쉼을 통하고 비축한 힘으로 '일어서야지, 그래야지..' 할 거다. 검은 비닐 아래 조용히 누워있다, 비닐을 걷어내면 다시 곧추세우고 살아가는 온순한 풀처럼.


풀에 대해 이런 생각만 가진 것은 아니다.

풀을 생각하면 추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나는 바람을 좋아했다. 바람을 좋아해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며 얼굴과 몸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공기의 흐름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놀이였고, 몇몇 친구들과 그러며 놀았다. 누가 더 멀리 날아가는지 초등 1, 2학년 때 친구들과 순번을 지켜가며 다리 위에서(시골다리라 그렇게 높지 않다. 2층 높이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뛰어내리곤 했는데, 다치지 않았다. 바로 풀 때문이다. 풀 덕분이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숲으로 펄쩍 뛰어내린다. 그러면 풀은 푹신한 솜이불처럼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었다. 아주 넓고 두꺼운 솜이불처럼.


우리들이 풀숲에 뛰어내리면 거꾸로 튀어나오거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작은 날개 달린 풀벌레들. 더운 여름 풀숲 아래에서 쉼을 취하던 그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오른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아이가 그 모습을 진풍경으로 제대로 본다. 그럼에도 두 번째 세 번째 뛰어내림에도 그 자리가 다르고 충격이 다르니 그때마다 풀벌레들은 날아오른다. 풀숲은 그렇게 작은 곤충들의 쉼터였다. 주말 농장에서 나의 손에 거침없이 뽑혀나가는 잡초이지만 다른 작은 생명에게는 집이기도 하고, 쉼터이기도 한 거다.


차를 타고 지날 때 풍성하게 자라난 풀밭이 보이면 저 풀밭에 누우면 푹신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릴 적 뛰어내리며 나를 감싸주었던 포근한 풀밭이 떠올라서이기도 하고, 마음으로는 다시 저 풀밭에 풀썩하고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서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것은 어릴 적 순수함에서 벗어나 어른의 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하려고도 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풀숲은 걷지 말라고 타이른다. 풀밭에는 먼지, 해충, 진드기가 있으니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 앞서는 거다.


어릴 적엔 저 안 좋은 것들이 없었을까. 있었을 텐데도 그만큼 어른들은 바쁘셨고, 그 시선의 빈틈을 노려 그렇게 놀았다고 생각을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을 한다. 공기 좋았던 시골마을이라 지금처럼 저런 나쁜 것들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놀았음에도 무엇에 물리거나, 가려움증이 생겼거나, 많이 아팠던 기억이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풀숲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다. 어릴 적 따뜻하고 푸근했던 추억을 담고 있는 곳, 작은 생명들의 쉼터. 그리고 짓밟아도 일어서고 뽑아내도 다시 이어가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들의 터전이라고.




작년 여름.

끄적였던 시가 있다(2023.07.21)

거기에 풀이 들어가 있어 이곳에 첨부해 본다.


그저 끄적임이었고, 등장하는 꽃들은 꽃말을 가지고 만들어낸 말장난이었다.

<꽃말>

노란 튤립 : 헛된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붉은 장미 : 사랑, 열정, 열렬한 사랑, 아름다움

노란 민들레 : 감사하는 마음, 행복





뜰앞에서


                                          보각화(로플리)


촉촉한 이슬이 내려앉은 새벽녘

앞산 위로 솟아오르는 빛줄기

가지런히 피어난 꽃들이

제가 먼저 빛을 받겠노라고

늘어졌던 줄기를 곧추세운다


노란 튤립아 너는 왜 피어난 것이냐

달님의 빛을 받고 태어나

내 마음 전하고파 이리 피어났노라고


그러니 너는 헛된 사랑만 하는 거란다


붉은 장미야 너는 왜 피어난 것이냐

붉은 태양과

세상 사랑의 온기를 받아 이리 피어났노라고


그러니 너는 사랑하는 연인들 손에 가는 거란다


노란 민들레야 너는 왜 피어난 것이냐

바람 따라 떠돌다

내려앉은 쉼터에 감사한 마음 담고 피어났노라고


너의 마음이 느껴져 내가 절로 행복해지는구나


풀들아 너는 왜 피어난 것이냐

오랜 옛적 이 땅에 자리 잡은 것이 우리네 조상이라

이 땅을 지켜내려 피어났노라고


그렇구나 이 땅의 주인이 너로구나

그 집념으로 살아가고 또 살아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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