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웅크린 채로 수평선 너머를 힘없이 바라보고 있다. 바다는 계절을 숨긴 채 잿빛 하늘과는 아무런 친분이 없다는 듯이 경계선을 긋고 있다. 저 멀리 하얀 물체는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둔 죄로 존재감이 반감되어 윤곽선만이 그것이 등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무채색, 외로움이 묻어나는 그림 속의 한 남자, 등대가 있어 외로움을 나누는 것이 아닌 몇 배로 배가시켜 버린 그래서 더욱 불안감이 지배적인 그림. 차라리 어설픈 밤이라도 얼른 오면 어떨까 싶다. 어둠이 내리고서야 등대는 제 몫을 다할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저 수평선 너머에 그 빛을 길잡이 삼아 오가는 배들이 나와 함께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두려움도 빛에 물러나지 않을까? 화가는 시간과 공간의 저 너머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리고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바다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리는 감각에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영식이 오빠! “
“어, 세나야! 오랜만이다. 작년 결혼식 때 보고 처음이네. 이모랑 이모부는 잘 지내시지? 그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왔는데.”
“그럼.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도 아침저녁은 꼭 함께 드신대. 이제 결혼 1년 차이지만 부모님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 그나저나 우리가 아까부터 한참을 옆에 서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림에 푹 빠져 있던데. 그림이랑 영혼의 소통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영혼의 소통까지는 아니고. 나는 언제쯤 이런 그림을 그려 개인전을 해 볼 수 있을까 부러운 마음에.”
솔직히 부러운 마음보다는 자괴감이 더 크다. 서른 중반에 아직 변변한 작품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랬구나, 아참. 이쪽은 전화로 얘기한 여행사에서 일하는 내 친구 수연이. 인사해. 두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신랑이랑 약속이 있어 그만 가봐야 해. 둘이 잘해봐.”
그렇게 세나는 가고 처음 만나는 그녀와 나는 각자의 시선으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전시장의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내게 그림보다는 그녀가 이 공간에서 느낄 소외감에 더 신경이 쓰였다. 상대의 눈치를 볼 만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눈치를 볼 사람은 그 여자 수연이다. 그런데 이 여자 수연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왜일까?
세나가 나에게 말하길 그녀는 그림을 잘 모르고 일 때문에 서양화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고 했다.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이 일을 핑계로 나와 그녀가 한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게 만든 것은 세나가 우리에게 날린 에로스의 화살이었다. 세나는 우리 둘을 안다고 생각되는 것만큼 모르기도 했으니 이해가 간다. 그리스 신화 속 에로스의 화살촉은 두 가지다. 하나는 뾰족하고 날카롭고 나머지 하나는 뭉툭하고 무디다. 뾰족한 화살촉은 상대를 사랑하게 만들고 뭉툭한 화살촉은 증오하게 만든단다. 그중에 우리는 둘 다 모두 뾰족한 쪽을 맞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영식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수연이라고 합니다. 세나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나와는 어떻게..."
"세나와는 대학시절 여행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여전히 여행이 좋아 여행사에서 일하고 있고요.”
“명화와 관련한 미술관 투어 상품을 발굴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슨 고고학도 아니고 발굴은 아니고요. 사람들이 많이 찾을 만한 상품, 돈이 될 만한 상품을 개발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돈 되는 거에는 젬병이라서… 요즘에는 인터넷을 뒤져보면 양질의 정보들이 많을 텐데 굳이 이렇게 발품까지 파시는 걸 보면 행동주의파이신가 보네요?”
“미술에 인상파 말고도 행동주의파가 있나요?”
“하하.. 미안해요. 절대 비웃은 것은 아닙니다. 재밌어서 웃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미술 사조에는 행동주의 파는 없어요. 수연 씨의 스타일이 모든 움직이며 직접 확인하는 것 같아 비유해 본 거예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영식 씨가 특별히 좋아하는 미술사조나 화가가 있나요?”
“화가는 조르주 쉬라를 좋아합니다. 신인상파를 좋아하고요. 조르주 쉬라는 신인상파와 점묘화를 창시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화풍으로는 점묘화를 좋아하고요. 점묘화는 작은 점들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는 매력이 있죠.”
“좋아하는 스포츠는 뭔가요?”
일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일을 위해 만난 사람에게 개인적인 취향을 그것도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식으로 훅 들어오는 것인지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노란불이 초록불로 바뀌기 몇 초 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 분위기를 틈타 초록불을 댕겨보고자 답을 하며 그녀의 취향을 물었다.
“오늘 이 자리가 소개팅 자리인 줄은 몰랐네요.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는 없어요. 나는 운동경기도 잘 안 봐요. 텔레비전 중계든 직관이든 거의 보지 않아요. 월드컵 경기도 잘 못 봅니다. 초조하고 승부에 지면 어떡하나 경기 내내 걱정도 되고 그래서 즐겨보는 편은 아닙니다. 수연 씨는 어떤 스포츠를 좋아하십니까?”
이렇게 얘기해 놓고 아차 싶었다. 초록불이 다시 노란불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수연 씨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금 펴졌다.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너무 갔다. 그것도 목적지와는 반대방향으로 갔다. 없다고 하고 끝냈으면 될 것을 운동경기를 잘 안 본다니. 어쩌자는 것이냐.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다. 거짓말도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안된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을 엔디비아 메모리 속도만큼 돌리고 있는데 답이 날아왔다.
“축구를 좋아해요. 오늘 도움 주신 보답으로 주말에 서울 FC경기 티켓이 있어서 괜찮으시면 같이 가려고 했는데 다른 방법으로 보답을 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렇다면 다음 주부터는 축구도 좋아하고 운동경기 관람도 좋아하는 걸로 하죠. 몇 시에 만날까요?”
“제가 시간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저와 함께 관람하시면 축구경기가 좋아질 거예요.”
그렇게 엔디비아 메모리급으로 머리를 굴린 답이 이렇다니 AI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어도 에로스의 화살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네 개의 계절을 지나오며 마치 그 계절들이 처음 찾아온 듯 설렘으로 서로를 맞이하고 서로의 것이 되고자 했다. 그동안 그녀가 구성한 여행상품은 성공을 거두어 여행사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품 속의 배경이 된 거리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직접 찾아가 보며 그림 속 그 시대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고 변화된 현재의 모습들과 비교해 보는 상품이 여행자들의 감성을 건드린 듯하다. 상품의 판매량과 비례하여 그녀도 승승장구하였다. 나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지만 더욱 자신감을 찾은 듯 모든 면에서 추진력에 탄성이 붙어 속도감 있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변한 것이라고는 서울 FC의 팬이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없다. 아니다, 큰 변화가 있었다. 화가가 되고자 하는 꿈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가르치던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미술대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심지어 몇 년 전에 가르쳤던 학생들 중 몇 명은 나도 아직 열어보지 못한 개인전을 열었다. 미술대전에 입상한 제자의 인터뷰에 내 이름 석자가 올라가기도 했다. 내가 갈 길이 화가가 아니라 가르치는 일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면 분명 그림을 그리는 소질, 그러니까 스킬은 분명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뿐만이 아니라 떠오른 영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다. 나에게는 그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떠한 영감도 떠올리지 못하고 간혹 떠오른 영감조차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했다. 그리고 수연을 만나 보낸 시간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편을 택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솔직히 그게 싫지 않았다. 그동안 그것이 주는 편안함을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수연은 뜻하는 것들을 이루고 있었고 나도 꿈과는 멀어지는 듯 하지만 나름 내 본연의 소질을 찾아 내 몫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만족감으로 수연과의 두 번째 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일이 점점 늘어나니 영식 씨 만나는 시간은 줄어드네. 나 만나지 못하는 시간들은 어찌 보내고 있어?”
“미술학원 학생들의 작품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 학원생들의 진학률도 높고 상도 많이 받고 그런 좋은 소문들로 우리 학원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요즘엔 나도 나름 바빠”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개인전 한 번 해야지. 대관은 내가 알아봐 줄게.”
“개인전이라.. 내 실력으로는 좀 무리가 아닐까 싶어. 난 아무래도 학생들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아.”
“영식 씨는 항상 그런 식이야. 수동적이고 실패할까 두려워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겁쟁이처럼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내가 옆에 있으면 실패할 수가 없어. 해보자. 영식 씨”
“생각해 볼게”
그날 이후로 시간이 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수연만 있었을 뿐이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 그 여름의 태양보다도 더 뜨겁게 작업을 마쳤다. 수연의 초상화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자 풀지 못한 앙금은 더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잎들이 차가운 바람을 견디려 애쓰고 있을 무렵 우리 둘은 그동안 알았다고 생각했던 서로에 대해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영식 씨 나 새해부터 파리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어.”
“축하해.”
“그게 다야?”
“미리 알았으면 멋있는 멘트나 선물이라도 준비했겠지만, 갑작스러운 희소식이라."
뭐라고 했어야 수연이 마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연의 들떠 고조된 말이 날아왔다.
“영식 씨 나랑 파리로 가자. 여기 정리하고 파리에 가서 그림 공부도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파리에서 개인전도 열고. 어때 멋있지 않아. 같이 파리로 가자.”
“나는 화가보다는 화가를 키워 내는 일에 더 소질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 미술을 사랑하는 것과 그림을 잘 그리는 일은 별개인 것 같아. 당신이 축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축구선수가 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잘하는 것이 모두 일치하면 좋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못해.”
“내가 원하고 사랑한 사람은 화가 김영식이지, 미술학원 강사 김영식이 아니야.”
“난 당신이 화가 김영식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가 꼭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 나에겐 그런 능력도 없고. 사랑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지만 난 그런 기적 같은 일을 이루어 낼 만큼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어.”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지 말았으면 해.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당신은 당신을 모를 거야. 영원히”
그게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수연이 파리로 떠난 후 세나를 통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을 수연에게 보냈다.
그림 속 바다의 계절은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