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카뮈 - 1

by HeartStory

그림자는 길어지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길 건너 아파트 뒤로 모습을 감춘 오렌지와 함께. 희미한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더니 어느새 대기가 프러시안 블루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리자 편의점 안의 조명은 더욱 밝게 빛났다. 그만큼 쇼윈도에 반사되는 내 모습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피골이 상접하던 모습은 며칠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내 갈비뼈가 12쌍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유리입자에 걸러진 은은한 조명은 검푸른 털에 윤기를 더했다. 에메랄드 빛 눈은 여전히 왕족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래 맞아, 러시아 황실과 영국의 여왕이 사랑했던 러시안 블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쥐를 잡아먹는 것과 같은 야생의 본능은 잊은 지 오래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의 손을 거친 음식만 먹는다. 주제 파악을 하라는 길냥이들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럴 이유도 없고. 어라… 그래 너.. 지금 속으로 뭐라 그랬는데.. ‘쥐가 무서운 건 아니고?’ 이런 뉘앙스로 들린 건 나의 자격지심일까? 아님 말고.

내 모습에 도취해 자만하고 있을 때 뒤에서 한 청년이 다가오는 모습이 쇼윈도에 비치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여기에서도 통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행색은 아니었으나 분명 나에게 간식을 줄 만한 사람이었다. 편의점 유리창에는 종종 이런 알고리즘이 뜬다. 여기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의 취향이 털린 것일까? 아니면 나의 선인안이 날로 좋아지는 것일까?

길지는 않지만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 낡은 셔츠, 무언가 무거운 것이 들었는지 몸집에 비해 커 보이는 축 처진 가방, 그 안에 더 이상 공간이 없다는 듯이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다. 제목부터 <기억한다는 착각>이다. 과학책인지, 심리학 책인지, 철학 책인지 난해하다. 행색은 구겨진 문단 같다. 인생의 단추를 몇 개쯤 잘 못 잠근 듯 어설펐다. 그에 반해 이목구비는 제자리에 꼭 맞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반듯하니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패션테러리스트다. 너무 표현이 심했나? 내 기준으로 이야기해서 그렇지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멈칫했다. 도망가던 쥐가 갑자기 멈춰 돌아 선 상황에 맞닥뜨린 것처럼 놀랐다. 놀란 것은 잠시였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과거도 미래도 그 어떤 그림자도 없었다. 두 눈을 부며 눈곱을 떼고 다시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혹시 신이 주신 내 능력이, 쥐를 잡는 본능마저도 버리고 내가 얻은 그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다시 쥐를 잡아먹어야 하는 것인가. 텅 빈 창고처럼 비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공허는 낯설지 않았다. 희한한 인간이다. 놀라움은 호기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녀석이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뒤에서 말했다.

“너 뭘 보고 있어. 배고프구나. 뭐가 먹고 싶어?”

내가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가끔 사람들은 동물들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냥이나 멍이들에게 말을 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도 녀석의 텅 빈 눈을 보며 맞장구를 쳤다.

“저 안에 진열된 츄르가 먹고 싶은데.. 네가 사줄래?”라는 눈 빛을 보냈다. 애처로운 눈빛을 발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필살기는 정말 아쉬울 때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알아 들었는지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네가 점찍은 ‘츄르’를 들고 나왔다.

“이게 먹고 싶었구나. 자 먹어.”라고 말하며 내 발 앞에 놓았다. 위생관념도 있고 센스도 있는 사람이다. 그냥 삐쭉 내민 것이 아니다. 내가 먹기 좋게 버려진 플라스틱 커피 뚜껑에 스틱형 츄르를 쨔서 내려놓았다.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라. 그럼 다음에 또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눈앞에 놓인 츄르를 외면하고 다른 생각을 할 만큼 한심한 고양이는 아니다. 일단 먹으면서 생각해 보자.

츄르를 다 먹으니 한결 정신이 또렷해졌다. 역시 뇌 건강에는 디에이치씨가 많은 참치가 좋은가 보군. 츄르를 먹으며 다른 사람들의 눈을 보았다. 다 보인다. 내 눈은 정상이다. 이상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까 그 인간이 비정상이다. 왜지? 이유가 뭐지?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 유령인가? 아니야 나에게 유령을 볼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시지는 않았어. 거기에다가 내 말을 알아 들었어. 한 번뿐이기는 해도 심상치 않아. 내가 원했던 참치맛이었어. 빨간색 포장지라고 생각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진열된 츄르 종류만 해도 한 브랜드에 일곱 가지가 넘는데 그중에서도 정확히 내가 점찍은 것이야. 다른 냥이들이 좋아하는 일본산도 태국산도 아니고 국산이었어. 확률로 따지자면 5%도 안된다 말이야. 이 인간, 뽑기 운이 좋은 놈인가? 아니면 내 운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지. 아 됐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럴 수도 있지.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간사를 넘어 우주의 섭리니까.

다음날 어제 그 녀석을 만난 비슷한 시간부터 기다렸다. 오해는 하지 말아라. 간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그 청년을 다시 만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다시 한번 눈을 보고 뭔가 채워진 게 있는지, 내 눈빛을 보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날이 바뀌고 새벽 2시가 되었어도 오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 사장이 내게 즉석밥 용기에 담긴 사료를 주었다. 정감이 가는 사람이다. ‘이번 겨울은 이 사람 집에서 나는 것은 어떨까’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건 무리다. 그녀의 집에는 이미 다른 녀석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작고 아늑한 공간을 헤집고 들어가 빼앗고 싶지는 않다. 난 게을러도 이기적인 고양이는 아니다. 배도 부르고 그 청년을 기다리며 신경을 썼더니 졸음이 몰려온다.

건물 뒤편 구석진 자리에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이곳이 내 임시 거처다. 익숙한 발소리에 눈을 떴다. 교대한 편의점 알바가 빈 종이 박스를 버리러 왔다. 그렇다면 시간은 9시가 넘었다는 것인데 늦잠을 잔 모양이다. 편의점 알바는 눈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그녀의 눈은 맑다. 미소만큼이나 미래도 밝다. 이 여학생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다. 중요한 인물이냐고? 지켜보면 알 거다. 성질 급한 인간들 많군. 급한 성격에는 상상력이 스며들 공간이 없다는 점을 알아 두도록 해라.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며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는데 ‘딸랑딸랑’ 유리문에 달린 풍경이 손님의 입장을 알렸다. 어제 그 녀석이다. 그의 동선을 따라 내 고개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상품들이 진열된 매대에 가려 사라졌던 녀석이 다시 내 시야에 들어왔다. 대용량 우유 한 팩을 들고 있다.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계산대와는 반대쪽인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서 있는 곳 유리창 너머 바로 왼쪽에는 반려동물들의 간식들이 진열돼 있다. 잠깐 눈을 마주친 그는 고양이 간식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갔다.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간식이 아니다. 나는 연어맛 츄르를 생각하고 그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뱁새가 황새의 마음을 어찌 알겠니. 그때는 작은 확률이 우연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내게로 왔을 뿐이야. 저거라도 감사히 받아먹어야지 했다. 간식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성의를 봐서 맛있게 먹어 줄게. 작은 포장지에 들어 있는 인간의 손톱만 하게 생긴 쿠키를 발 앞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받침도 없이 봉지 안에 든 것들을 몇 개 꺼내어 놓았다. 그러고는 한 손에는 우유를 다른 한 손에는 나에게 주고 남은 간식 봉지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가다가 갑자기 돌아섰다. 순간 남은 봉지의 것들을 다 주고 가려나 하고 생각했다. 나의 자만심이 만든 오해였다. 더 주고 간 것은 한마디 말 뿐이었다. 그게 더 나의 자존심을 뭉게 버렸다. “츄르는 하루에 두 개 이상은 안 먹는 게 좋아. 이것도 좋아하게 될 거야.” 녀석이 주고 간 간식을 툭툭 발로 굴리며 나쁘지 않은 머리를 함께 굴렸다. 내가 츄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것은 내 눈빛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우연일까? 내가 어제 너무 냉큼 받아먹어서 내가 츄르를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 두 가지 중 하나는 틀림없다. 눈치가 빠른 놈이거나 내 눈빛을 읽을 줄 아는 놈.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녀석은 나의 일 순위 타깃이 되었다. 내 어망에 걸려들었다는 얘기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알겠니? 이쯤이면 모를 수 없을 텐데. 내가 왜 그 청년을 참치맛 츄르처럼 점찍었는지 말이야. 모른다고? 설명해 달라고? 그 이유는 두 가지야. 내가 가을을 좋아한다고 해서 바로 옆에 이어지는 겨울까지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좋아하지 않을 계절이 어디에 있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니. 고양이도 사람과 별다를 게 없어. 사람을 예로 들면 어떤 엄마가 아빠를 좋아한다고 해서 고모까지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런 것과 비슷한 거야.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빠졌는데, 너희들 인간이 이해해. 내가 가끔 이래.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말했는지 모를 때가 자주 있어. 이 이야기도 읽다가 보면 그런 문장이 있을 거야. 내가 초보 고양이라 그래. 너희들이 이해해라.

둥둥 떠다니는 솜사탕과 내 마음처럼 깊은 하늘. 짙은 초록의 바다만큼이나 깊은 생각에 빠진 시인처럼 굴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는 이가 없는 계절.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야. 좋은 건 순간이야. 좋을 때 준비를 해야 해. 반려묘가 아닌 나에게는 겨울을 무난히 보내려면 준비를 해야 하지. 이번 겨울은 그 청년에게 빌붙어야겠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거야. 겨울이야 어떻게 나겠지만 그 청년의 눈을 본 순간 발동한 내 호기심이야. 몇 번의 겨울을 지나왔지만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야. 그 녀석의 과거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꼭 밝혀내고야 말겠어.

생각이 정리되고 굴리던 간식도 다 먹었다. 겉모습은 인간의 쿠키처럼 바삭했고 속은 부드러운 연어살이 잼처럼 혀 끝에 녹아났다. 생긴 것과 다르게 고양이 간식에 해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가 섞인 불안감이 문뜩 들었다. 봉지 안에 남은 간식은 왜 가지고 갔을까? 전문가 다운 간식 선택이 어쩌면 반려묘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번 겨울과 내 호기심은 어떻게 해결을 하지? 아니다. 이번만큼은 꼭 이 녀석 옆에 있을 것이다. 편의점 사장 네는 포기할 수 있어도 녀석은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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