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카뮈 - 2

by HeartStory

다음 날. 녀석이 나를 보았음에도 간식도 없이 편의점을 지나쳐 갔다. 뭐야 나랑 밀당을 하자는 거야? 나는 속으로 ‘간식은 어쩌고’하며 2층으로 올라가는 녀석을 뒤따라갔다. 2층과 3층에 카페가 하나씩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확인하자고 올라갈 일은 없었다. 그는 2층 '카페 카뮈’로 들어갔다. 3층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지난해부터 계단을 많이 오르내리면 무릎이 시렸다. 앞발을 들어 유리창에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카페 안에 조명이 켜졌다. 녀석은 바 테이블 안쪽의 커피 추출기 스위치를 켰다. 버둥거리는 뒷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움직여 현관 유리면에 앞발을 대고 녀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가게 오픈 준비로 바쁜 모양이다. 한 번도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길래 참다못해 체중을 실어 출입문을 밀었다. 너무 무거워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녀석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는지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직 오픈 전이기 하지만.. 특별히 받아줄게.” 하며 문을 열었다. ‘너도 내가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눈을 마주치며 “물 한 잔 부탁해” 하며 카운터 옆 스툴에 올라앉았다. 녀석은 “카페에 왔는데 물밖에 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깝다. 너희들은 카페인이 들어 있는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었어.”라고 말하며 넓고 깊은 빙수가 들어 있을 것만 같은 크리스털 그릇에 물을 담아 주었다. 동정인지 환대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면 여기에는 플라스틱 그릇이 없을지도 모르고. 천천히 물을 마시며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간 본 카페는 없지만 밖에서 보아왔던 카페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도서관과 카페를 반듯하게 반 반씩 섞어 놓은 듯한 풍경이다. 벽면에는 책이 가득한 책꽂이가 천정까지 이어져 있고 몇 개 없는 테이블은 낮은 책꽂이로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 아침 햇살이 동쪽으로 난 유리창을 자작자작 두드리고 들어와 누구의 허락도 없이 내려앉는다. 창가의 테이블은 혼자 앉아서 책 읽기에 좋은 바 테이블로 만들어져 의자들이 줄을 맞춰 대기 중이다. 책도 많아서 졸린 데 조명마저 은은하다. 어둡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쨍한 조명도 아니다. 책 읽기에 알맞은 온도와 밝기다. 북카페에 걸맞은 인테리어다. 세심한 배려의 흔적이다. 알베르 카뮈가 살아 있었어도 자신의 이름을 간판에 넣은 것을 용인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안쪽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숨어 있다. 테이블이 하나와 넓은 가죽 소파가 마치 편안한 집 안의 거실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당연히 나는 그곳을 찜했다. 얼른 영역 표시를 해두어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우선 저 녀석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겠다. 내가 이곳에 머물려면 최소한 녀석의 동의가 필요할 테니까. 그가 이 카페의 주인이 아니라고 해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자존심은 내리깔고 꼬리는 빠짝 세우고 다가가 대놓고 말한다.

“바쁜 거 같으니까 짧게 할게. 나 여기서 살고 싶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이어서 “안 되는 이유 50가지를 댈 수 있으면 내가 물러설게” 하고 최후통첩하며 퇴로를 막았다.

“좋아, 그런데 조건이 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바빠서 그런가? 아니면 조건을 50가지 늘어놓는 것은 아닐까? 의외로 너무 빨리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건이라니… 보통 녀석이 아닌데. 감히 나 같은 커리어우먼 캣이 같이 살자고 하는데 조건을 제시하다니. 일단 조건을 들어보기로 한다. 아쉬운 건 나니까.

“조건이 뭐야?” 허세를 부리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물었다.

“여기서 지내는 것은 좋은데 한 가지만 지켜 줘.” 어라…. 생각과는 달리 공손하네. 이럴 때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몰아쳐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가지 조건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여기 오시는 손님들한테 너의 능력을 과시하면 안 돼. 그리고 조건은 아니지만 꼭 지켜줘야 할 기본적인 것이 하나 있어. 그건 손님들한테 불편을 주거나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는 거야. 바로 아웃이야!” 조건보다 기본적인 것에 더 힘을 주어 말했다.

하긴 주인이 아닌 녀석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솔직히 조건보다 기본이 나에게는 더 어렵다. 하지만 어쩌랴. 나중에 쫓겨나더라도 일단은 머물러야 하니까. 조건을 승낙한다. 아 잠깐…. 그런데 내 능력이 뭔지 알고 있나? 어느 누구도 모르는 내 능력을.

“네가 말한 대로 할 수 있어. 그런데 내 능력이 뭔데.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알아?” 짐짓 모른 척 떠 본다.

“네 능력은 사람과 눈으로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거 아무한테나 보여줬다가 곤란해질 수 있어.”

아! 그렇군. 아직 모르는군. 내가 너를 모르듯이 너도 나를 모르니까.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놀라게 되겠지. 네가 더 놀랄지 내가 더 놀랄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나는 녀석의 팔을 쿠션 좋은 내 발바닥으로 두 번 꾹, 꾹 눌러준다. 기쁨의 골골송도 짧게 울려준다. 이로써 기한도 법적 근거도 없는 계약이 성립되었다.

어라,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계약을 하다니. 내가 너무 과속했다는 생각에 속도를 줄이며 이름을 물었다.

“도윤, 강도윤. 너는 이름이 뭐야?”

“길냥이”

“아무도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구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나는 자유인 아니, 자유냥이니까.”

“그게 편하면 나도 길냥이라고 부를게. 하지만 이름 있고 자주 불려야 존재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존재감이 있으면 간식도 얻어먹을 수 있나?”

“당연하지. 사람들이 너를 볼 때 한낱 길양이라고 생각하면 간식이든 사랑이든 뭘 주겠니? 준다고 해도 일회성이지.”

“그래? 그러면 어쨌든 당분간 같이 살아야 하니까 네가 이름을 지어줘 봐.”

“원한다면…. 음.. 블루 어때? 아니면 그레이.”

“넌 상상력이 부족한 거니 성의가 없는 거니? 내가 ‘러시안 블루’ 혈통이라고 품종이나 피부색으로 나를 특정 짓지 마라. 인간들은 혈액형이니 MBTI니 하는 걸로 상대를 틀 안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책장에 철학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진짜 순진한 거야 아니면 상상력이 바닥난 거야.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답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미라. 어때?”하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한다. 이번에는 내가 뜸을 들인다.

‘미라’라고. 그 단어에 ‘이’ 자를 앞에, 중간에, 맨 뒤에 어디에 넣느냐에 따라 세 나라의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미라’는 한국 사람의 성과 이름을 합친 성명이 된다. 중간에 넣으면 미이라가 된다.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환대받던 시절이 떠오른다. 고양이 미이라가 있을 정도면 그 영향력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겠지. 마지막으로 맨 뒤에 넣으면 ‘미라이’가 된다. 일본말로 ‘미래’라는 뜻이다. 오오…. 어찌 이런 발칙한 생각을 했을까?

“그거 좋다. 그런데 왜 미라야?”

“그냥, 순간 떠오른 이름이야.” 녀석, 아니 이제 도윤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야 한다. 도윤의 과거가 보이면 미라라는 이름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게 답답할 뿐이다. 천천히 알아가기로 하지. 분명 그녀의 성은 이 씨 일거야.

“좋아, 그럼 나를 미라라고 불러 봐.”

“미라야! 어때? 어감도 좋고 존재감이 살아나는 것 같지 않아?”

“어 맞아. 존재감이라는 싹이 조금씩 싹트는 것 같아. 그런데 싹이 무럭무럭 자라려면 간식이 있어야 할 텐데. 존재감과 간식의 상관관계라는 네 이론에 따르면 간식이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하는 것 아닐까?”

도윤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아까 내게 주고 남은 간식 봉지를 꺼냈다. 그렇게 난 간식을 또 챙겼다. 미라라는 이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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