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희대 Jan 08. 2023

여행지에서 걸려온 전화

도대체 왜?

여행지에서 이른 아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오전 8시 반에 그런 전화가 왔습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기 싫은 일 중 다섯손가락안에 들일을 해버린 거죠.


예상대로 호텔 주차장에 있는 제 차를 긁었다며 청년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한 것 같습니다. 난감하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실랑이를 하는 것은 아마도 제가 하기 싫은 일 중 가장 싫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자가 뭐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충 합의 보자고 하면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고 그런 과정이 즐거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아무튼 대충 가죽을 걸치고 동물원 쇼륨에 나가는 초식동물처럼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결의를 다진 입매무새 정도는 보여주겠다는 느낌으로 갔는데 청년을 보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굉장히 예의 바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더군요. 숙박지 근처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소속을 밝혔습니다. 적지 않게 안심이 되더군요. 보험으로 처리해드리겠다고 제가 보는 앞에서 보험사에 연락했습니다. 경우 없는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되레 미안할 정도로 연신 사과를 해가면서요.


차의 상태로 말하자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스크래치가 조수석 앞부분에 나있었습니다. 굳이 청년이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그 스크래치를 하고서 몇 날며칠을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였죠. 하지만 자세히 보니 도장면이 까져있더군요. 컴파운드로 문질러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 일단 보험 접수를 했습니다. 청년의 예의바름에 저도 최대한 젊은이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더군요. 호텔 주차장은 바다보다 넓었습니다. 고기잡이배 서너 척을 끌어다놔도 될 정도로 빈자리가 많은 평일 오전, 왜 하필 제차 옆에다 주차를 하려 했는지. 심지어 제 옆에 두 자리나 비어있어 한 칸 건너서 주차해도 됐을 텐데 굳이 뭐 하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얼마 전 고속도로에서 4중 추돌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때 견적이 수천만 원 나와 보험으로 처리했다고. 과연 예의만 바른 이 청년은 차를 계속 몰아도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 차 옆에 주차된 청년이 모는 소형차가 왠지 불길한 기운이라도 덮어쓰고 있는 느낌마저 들더군요. 자꾸 사람을 그른 길로 안내하는 요물처럼 말이죠.


그 넓은 주차장에서 내차를 긁은 자신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청년 옆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주차된 청년의 차가 먼 훗날 옐로우 매거진의 가십성 기사로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며 청년과 헤어졌습니다. 청년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서 마스크를 쓰고 코를 훌쩍이며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으로 이른 아침 관광객들이 호텔을 떠나서 그런지 주차장의 빈자리들은 더할 나위 없이 광활해 보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크니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