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그리고 일등
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 24가을
어제는 기다리던 첫번째 기록 마라톤 대회였다.
오늘 춘천 마라톤이라는 국내 3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가 진행되다 보니 5천명 모집도 간신히 채운 작은 대회였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음이 좋았고, 3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를 주관하는 곳에서 주최하는 대회이니 운영도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행사 시작은 깔끔했다.
생각보다 많은 이벤트 부스들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예상 못한 유명인들의 방문이 대회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모처럼 따뜻해진 날씨 속 반쯤 물든 붉은 단풍잎과 파란 하늘이 스트레칭하는 몸을 가볍게 했다.
나는 이전 마라톤 기록이 없고, 접수 때 10KM 달리기에 1시간 30분 이상 걸린다고 체크했기에 A, B, C, D 중 D그룹에 속했다.
달리기 기록 순으로 나뉜 조는 페이스가 가장 빠른 A조부터 시작해 페이스가 가장 느린 D조가 마지막 출발이었다.
모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작 카운트를 세다 보니 평상시보다 심박수도 빨라졌다.
화이팅 소리와 함께 천천히 기록 발판을 밟고 10km 달리기 여정을 시작했다.
처음은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호흡을 일정하게 가다듬고, 호흡에 맞춰 팔을 치고, 팔에 맞춰 발을 구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언덕길, 평지 상관없이 꾸준하게 달리기를 계속했다.
중간중간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차들 옆을 달리고, 공원에 자전거를 타고 나온 아이들과 뒤엉켜 달리며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혼잡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동안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분들의 페이스에 의지하여 달리기도 하며, 평상시보다 빠르고 안정적인 8분대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렇게 1시간 30분 이내 10km를 완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8km 지점을 통과할 때였다.
"저기요, 너무 늦게 와서 기록은 안 남을 수 있습니다."
퉁명스러운 스태프의 말에 귀를 의심하며 멈춰섰다.
무슨 질문을 해야할 지도 잊은 채 스태프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일단 달리세요, 달리는데 기록은 안 남을 수 있습니다."
그의 달리라는 말이 신호가 되어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달렸다.
결승점이 1km 남았을 때 코스 안내판을 치우는 스태프들 모습과 그 뒤로 유명 가수의 노래로 축제 분위기인 대회장이 보였다.
방향을 몰라 우왕좌왕하니 누군가 손짓으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대회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즐기고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기둥만 남은 피니쉬 라인이었던 곳 주변을 맴돌았다.
이미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몇 개 안 남은 간식을 타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핸드폰을 보니 스마트 칩이라는 곳에서 기록을 확인하라는 카카오톡이 와 있었다.
그때쯤에는 기록은 포기상태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회를 해보니 기록이 되어 있었다.
01:28:20 나의 첫 공식 대회 기록이면서 첫 PB(Personal Best Record)였다.
긴장이 풀리며 슬며시 속에서 화가 일었다.
1시간 30분 이내에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니었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대회개요를 다시 확인했다.
며칠 전까지 보이지 않던 대회 상세 일정이 적혀 있었다.
달리기 시간은 4시~5시30분으로.
A조 출발시간이 4시였고, D조 출발시간이 4시 20분이었다.
가장 페이스 빠른 A조는 1시간 30분 이내가 제한시간이었지만, 가장 느린 D조는 1시간 10분 이내로 들어왔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회 꼴등과 개인 기록 일등을 동시에 경험했다.
돌아오는 길에 도움을 받는 커뮤니티에 질문을 했다.
페이스가 빠른 A조 기준으로 시간 제한을 잡는 게 일반적인 거냐고.
일반적으로는 D조 출발 후 몇 분 후부터 카운트 하지만, 주최측의 운영 방침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답변과 함께 많은 축하와 위로의 말들이 전해졌다.
하프나 풀코스까지 있는 대회였으면 10km 대회에서 대회장이 정리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5km, 10km 대회만 있었기에 의도치 않게 후미 주자의 씁쓸함을 맛본 것이다.
10km도 이런데 풀코스 후미주자들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해 보니 씁쓸함을 넘어 달리기를 관둘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42.195km를 달리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제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실시간으로 주로가 치워지며 빨리 달리기를 강요받는 압박감은 상당할 것이다.
나는 달리기는 계속 하겠지만, 대회 출전은 많이 하지 않기록 마음 먹었다.
오래 계속 달리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