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었습니다. 나는 하릴 없이 어여쁜 새싹이나 보러 갔습니다. 아파트 화단 곳곳에 피어오른 이름 모를 아기 싹들. 그 작은 연두들 더러 너네는 파랗고 예뻐서 좋겠다, 하고 이야기했더니, 웬걸, 가장 웃자란 싹 하나가 버럭 성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씨앗을 깨고 땅을 가르고 잎을 피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드는지 아시기나 한답니까? 우리의 잎은 연하기 짝이 없어 산들 바람에도 생채기가 나요. 또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벌레와 새앙쥐와 참새의 간식이 되지 않기를 말이죠. 그런데도 우리가 그저 파랗고 예쁘기만 한가요?
싹은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 작은 몸을 파르르 떨기까지 하더군요.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나도 이 연두들처럼 몸이 작고 연하고 어여쁠 때가 있었는데, 그 꼬마 시절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잊고 살았던 것이지요. 아니, 어쩌면 이미 지난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다 자란 나무도 봄이 오면 새싹을 피워내듯이, 우리도 매일, 매순간 새로운 싹을 피어내니까요. 작은 싹의 역정을 통해 저는 오늘도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싹의 푸르름과 그 이면의 치열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그 치열함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요.
이따금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그땐 왜 그랬을까? 그럴 필요 없었는데.'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서른 살의 내가 반추하건대 스무 살의 나는 서툴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로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스무 살의 나는 서른 살의 나보다 세상을 10년만큼 덜 경험했으니 그만큼 세상이 낯설고 어설펐으리라.
그런 과거의 나에게 너는 왜 그랬니? 너는 더 잘할 수 있었어, 하고 이야기해 본들 무엇이 달라지랴?
오직 후회와 죄책감이 남을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새싹 시절에게 필요 이상으로 엄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모르는 것도문제이지만, 올챙이 적을 너무 괄시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한 올챙이가 자라서 된 것이 개구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린 나의 어수룩함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새싹 시절의 나에게 그만큼이나 열심히 살았구나, 너 엄청 치열하게 살았구나, 하고 칭찬해 보자.
내 과거의 치열함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변의 다른 새싹들에게도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