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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11. 2021

배웅과 마중의 시간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 자기 앞의 생,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




친정엄마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피로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간밤에 제사를 지냈다며 양 손과 어깨에 반찬통이 가득 담긴 가방들을 짊어지고 찾아온 그녀의 표정만 봐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마침 말복이라는 새삼스런 계절들의 이벤트에 맞춰,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었으나 애당초 드러내다 바로 집어넣어야 하는 마음이어야 했다. 손주들과 딸 얼굴 보러 잠시 들렀다고, 이 시국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반찬도 넉넉히 가져왔으니 집 밥 먹자고. 한 끼 함께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또한 자신은 좀 자야 겠다던 엄마의 목소리는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당신의 집에서는 계속 부단히 보이지 않는 가사 일들을 하고 계셨을 테니. 그리하여 정말 자고 싶었던, 쉬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이상하게도 나는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제사를 지내는 문화의 큰 며느리였던 엄마는 여름을 특히 힘들어했다. 사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엇비슷하지만, 아무튼 지간에 덥거나 추운 계절의 장보기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각종 전과 나물과 과일을 비롯해서 고기와 육해공이 총출동된 산해진미가 준비되는 걸 이것저것 도우면서, 한 때 나는 아빠에게 일종의 시위를 벌였었다. 이건 도무지가 어불성설이라고. 망자를 기리기 위한 화려한 상차림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그 잠시의 시간을 위해 한 여자는 며칠을 돌아다니고 손품 발품 팔아야 하는데 그 생고생을 당신이 아시냐고. 아시면 가짓수를 줄이든가 아니면 한 번 정도는 간소하게 넘어가면 안 되느냐고. 시위에 대한 결과는 조금씩 줄어드는 가짓수였을 뿐 그럼에도 '제사는 지낸다'는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안다. 그것이 일종의 빌어먹을 시스템이라는 것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랜 시간 내려온 불가피한 습관적 시스템. 누군가에게는 악습 그러나 누군가들에게는 미덕...



친정 엄마가 건넨 약과 7개가 유난히 슬퍼 보였던 건 왜였을까. 매 해마다 끊임없이 제사를 지내는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함께 늙어가는 그녀의 시간이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니면 다 키워놨어도 약과 좋아하는 딸 생각하는 그 수 해들의 마음이, 끝끝내 자식에게서 해방되지 못하고 마는 부모의 처지가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눈물이 갑자기 왈칵 쏟아지는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일 테지만 아무튼 나는 입꼬리는 올리고 미간은 찡그려지는 약간의 습관을 발휘해야 했다. 대신 헛소리 같은 일상의 자잘한 유머들이나 안부와 같은 대화들을 일부러 엄마에게 건네고 만다. 결국 울지 않기 위해서. 물론 엄마가 가면 곧장 눈물을 쏟기 일쑤일 테지만.  



그래도 박완서 선생님 말대로 '시간은 신' 이다. 그 신은 마냥 울게 놔두지 않는다. 시간은 결국 흐르고 기억은 잊혀지니까. 




아이들의 하원을 도와주시고 귀가하려는 엄마를 배웅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찬 들고 자식 집에 찾아오는 부모의 마음이나, 배웅하고 마중 나가려는 자식의 마음이나. 결국 '가족'으로 묶여 있는 이들에게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희비의 사랑 그 언저리의 무언가가 비슷하게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것도 일종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그렇게 느껴질 수 있기도 한 걸까 궁금해하면서... 병원에서, 결혼식장에서, 큰삼촌의 장례식장에서, 공항에서, 그리고 서로의 집 안팎에서. 그녀와 내가 주고받았던 여러 형태의 배웅과 마중의 기억 속에는, 기어코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어야 했던 여자들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사랑을 많이 받았을까, 받고 있을까... 그녀들이 주는 만큼, 여전히 주면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그녀들의 이름이 오랜 시간 누군가의 마음속엔 깊이 기억되면 좋겠다고,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면서...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

"그래, 그래, 정말이란다. 나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어. 한 여자를 사랑하지. 그 여자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 자기 앞의 생 中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는 66세가 되던 해,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했다 한다. 그는 죽기 다섯 달 전,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지. '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무명이었을 뿐이네'라고. 그리고 그가 남긴 유서를 통해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의 작가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우리는 그가 죽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된다. 물론 언제나 그러하듯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고 나면 모든 게 소멸되는 것. 그리하여  '자신' 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신에 대한 기억들을, '나' 라는 존재는 알 턱이 없을 뿐이지만.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 유명한 문장이 내내 회자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는 로맹가리의 그 문장을 믿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아이들은 그이를 마중 나가기를 좋아한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일종의 미션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저녁을 먹기도 전에 언제나 '아빠 몇 시에 와'를 외치며 어서 집 밖으로 마중 나가자고 보채는 아이들이기에. 그이의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너무 늦지 않는다면 밤 산책을 하다가 집 앞에서 셋이서 손을 잡고 하늘을 보거나 근처에서 킥보드를 슬슬 타거나 서로 장난을 주고받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쌍둥이가 탔어요'라는 스티커가 부착된 익숙한 차량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른다. 아빠가 왔다고. 우리가 여기 있다고. 



누군가를 배웅하고 마중 나가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어쩌면 우리가 '우리'로 사랑하는 시간이 같이 쌓여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 좌절 혹은 환멸이나 헛헛함, 회의감 등으로 인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어쩌면 누군가를 먼저 맞이하고 선뜻 잘 보내려는 배웅과 마중과 같은 또 다른 시간들 덕분에 우리가 각자의 '자기 앞의 생'을 지켜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 시간은 상대를 향한 정성과 사랑, 그리고 서로 연결되는 그 시간을 기억하려는 마음 없이는 불가한 것일 테니까...



원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 힘들고 속상했다고 해서 그 하루가 마냥 지속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고. 그 속상함을 잊을 수 있는 작은 기억들을 만들면서 그렇게 하루를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도. 가령 제사가 마냥 힘들었어도 약과 하나에 너무 기뻐하던 딸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을 그녀의 시간은 그렇게 힘듦으로만 가득했던 건 아닐지도 모를 것이라고. 함께 장을 보고 시장에서 오다가 호떡이나 아이스크림과 같은 것을 사 먹으며 종알종알 대화를 주고받았을 두 사람의 기억은 덕분에 만들어졌을 테니까. 서로 배웅하고 마중하는 시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곁에서 서로를 지켜보려는 그 '마음'이 여전하다면, 언젠가 힘겨움에 지쳐 떨어져 나가는 그들을 일으켜줄 수 있는 기억은 다름 아닌 그런 마음 들일 것이라고. 오늘도 내일도 아빠를 마중 나가려 했던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기억하면서, 아마 그는 두고두고 그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그 기억을 버팀목 삼아 살아낼지도 모를 일일 테니까. 



언젠가 시간이 너무 지나 이름 조차 기억나지 않는 인간이 되어 버릴 우리들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있었던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힘듦으로만 가득하진 않을 테다. 

물론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사랑은 또한 우리를 일으켜 살리기도 하니까.



아주 나중에, 혼자서 두고두고 기억될 것들은 다름 아닌 사랑했던 기억. 우리의 배웅과 마중의 시간..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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