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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07. 2021

결혼의 대가

안전하고 편안하다면 만족스러운 섹스는 버려야 한다.

결혼과 사랑의 조화는 대단히 힘든 일이어서 성공하려면 역시 신이 필요하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性) -




거실 바닥과 소파 위는 이미 열정적으로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달큼한 액체가 여태 묻어있는 끈적한 젤리스트로우 껍질과 과자 부스러기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형제의 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은 곳곳에서 울린다. 수시로 들리는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는 집을 꽉 메운다.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하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오른쪽 귀에 꽂아둔 갤럭시 이어버즈의 볼륨을 한 칸 더 높였다. 그래야 스스로 어떤 생각을 억제할 수 있었기에. 부모가 된 인간들은 일정 부분 의도치 않게 소박한 재앙을 자주 겪을 수밖에 없음을. 사적 감정을 검열하고 통제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쌓아올리는 유자녀 기혼자들의 에로스를 기어코 멸망시키는 가장 탁월한 억제제는 다름 아닌 아이, 자식이라는 사랑스러운 침입자들임이 분명할 것이라고.



부부의 에로스를 조용히 파괴하는 확실한 요소로 나는 단연코 양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부모로서 어찌 보자면 매정한 생각일 수 있지만 한편 확실하게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을지 모르는 은폐된 진실을 생각하고 말기 때문에. 기혼이 된 두 사람의 섹스는 그 이후 3인 혹은 4인의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들은 섹스할 때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서로의 로맨스는 번개처럼 곧 무너질 것임을. 우르르 쾅쾅. 이 기묘하게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존재로 인해 두 사람은 그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에로스는 기어코 내팽개쳐질 테니까. 물론 반대로 얻는 즐거움도 물론 있기야 하겠지만.



삶의 여러 모순들에 대해서 출산 이후의 시간을 통해 절절히 깨닫는 중이다. 누군가 만약 끈적이는 바닥의 걸레질과 열정적이고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찬, 오르가슴에 충분히 오를 만한 대단히 만족스러운 섹스 중 무엇을 선택할지 묻는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단연코 청소기와 걸레를 선택할 테다. 물론 3초의 아쉽고 씁쓸한 망설임은 있겠지만. 이미 생활에 철저히 익숙해진 기혼녀의 최선은 전자일 수밖에.



@John William Waterhouse,  A sick child brought into the Temple of Aesculapius, 1877



보부아르는 그녀의 대표작인 제2의 성에서 말했다. '결혼이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에로티시즘을 죽인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 무릎을 탁 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를 보살피는 기혼녀는 자신과 자신의 배우자를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럽게 밀어내고 만다. 심지어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 본연이 지닌 자아마저도. 기혼자가 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전면적인 재정비가 우당탕탕 이뤄진다. 마치 그들의 섹스가 대가를 치르듯 출산을 기점으로. 하루 사이에 일사천리로. 쌍둥이 엄마 아빠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은 못 자고 못 먹고 못 씻게 되는 24시간을 맞이한다. 그들의 일상에서 에로스는 이미 급속도로 순식간에 가당치 않은 급기야 가소로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대신 동시에 아주 확실하고 선명한 공동목표가 생기고 마니. '전우여 일단 존버 하여 살아남자 그러면 영광이 따를지니'라고. (빌어먹을)



결혼의 비극은, 결혼이 약속하는 것과 같은 행복을 여자에게 분명히 주지 않는다.

행복에 관해서는 보증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여자를 불구로 만들며 반복과 매너리즘에 떨어뜨려 버린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p. 186



유자녀 기혼자의 삶 구석구석엔 이미 낭만과 에로스가 자연스럽게 시들어지기 쉽다. 대신 4인 가족 구성원의 건강하고 순탄한 생활을 위해 소아과와 치과와 같은 각종 병원 예약과 매번 내야 하는 세금들과 공과금, 기타 가정경제와 교육, 노후에 대한 이러저러 그러한 생각들이 급부상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혼의 대가로 초기 두 사람의 뜨겁게 열렬한 격정적 흥분감과 서로의 몸과 몸으로 타고 흐르는 땀과 호흡, 충만한 섹스를 원하는 상대를 향한 유혹과 탐구생활은 은연중에 '사요나라' ,  '마따 아시타 (내일 또)'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되고 만다.



이미 서로의 생활 패턴에 지겨울 정도로 익숙해진 관계에서 신체적 정서적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섹스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들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솔직히 궁금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마는 건 나로서는 안정과 친밀감이야말로 사실은 에로티시즘이 가진 강렬한 특징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익숙한 배우자는 법적으로 안전하다. 그야말로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실드'가 쳐지고 마는 안전한 존재다. 그러나 반대로 그 안전함과 편안함으로 인해 서로의 '타자성' 은 확실히 무너지게 된다. 미지의 탐구영역에서, 욕망의 대상에서 소외되어 버린다. 알고 싶은 '문' 은, 그와 그녀가 지닌 모른다는 타자성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John William Waterhouse, Psyche Entering Cupid's Garden,  1903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에로티시즘은 타인에게 다가가는 움직임'이라 했다. 타자성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그렇지만 결혼은 이미 서로가 보다 '안전' 하게 '아는' 관계를 위해 법적으로 결속시키는 관계. 그리고 그들은 양육과정을 함께 통과하며 서로 돈독한 '친밀성'이라는 탑을 쌓게 된다. 그리고 그 탑이 계속적으로 쌓아지는 만큼 반대로 서로가 초기에 느꼈던 타자성은, 은밀함은, 탐구하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기 쉽다. 편안함과 동시에 열정과 욕망에 확실한 제약이 생겨버리고 마는 기묘한 모순, 결혼. 유자녀 기혼부부. 왜 이 생각을 나는 사그리 없애버리지 못하고 말까. 아쉽게도. 그러나 여전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생활과 낭만 사이의 모순.  



에로스는, 욕망은, 뜨거움은 애초에 안정의 것이 아니지 않았던가. 인간의 욕망에 부채질을 하고 마는 열정적인 그것은 원래 불안의 영역이고 베일에 싸인 것이 아니었냔 말이다. 그래야 뜨거울 수 있고 그래야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모험가로서의 투지를 불태울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더 나아가 만약 그 영역이 금지의 영역이라면?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인간에게는 본디 큰 인내가 필요한 법. 만약 그 인내에 금이 가고 급기야 틈이 벌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드 해제시키게 되고 말아 버리는 매력적인 대상과 환경에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그 이상의 상상은 더 하지 않는 것으로...



그이는 더 이상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순간에 뜨거워지고 반응하고 반대로 차가워지는지에 대해서. 정숙한 부모로서의 롤플레잉에 충실하다가도 원한다면 카르멘이, 키르케가, 급기야 바다를 지배하며 유혹하는 세이렌이 충분히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신 배우자의 생각의 흐름이 지금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혹은 그녀의 생활적 일상에서 어떤 의욕이 살아 숨 쉬고 어떤 욕망을 갈망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고통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지. 결혼을 '우리'는 이상 서로를 미지의 탐구영역으로 생각할 없게 되고 만다. 게다가 양육이라도 더해지면 두 사람의 생활은 선명한 생존의 경제적 손익 법칙이 살아 숨 쉬는 영역이 되고 말기에.



새벽에 책을 읽다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만들고 아이들을 살피고 화장실 청소를 하며 곳곳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먼지들을 수시로 없애며 가계부를 정리하며 살림을 도모하는, 가끔 극한직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부모' 로서의 생활적 순간순간들 속에서도. 결혼하면 행복할까 라는 질문은 오늘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말았다. 그러다 잠깐 꿈과 마주했다. 한껏 불안의 늪에 빠진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셔츠를 사정없이 풀어헤치고 마는, 단정하게 틀어 올린 핀 하나를 푸는 순간 어깨너머로 긴 머리가 흐트러지며 몸과 마음이 소파와 식탁 곳곳에서 해방되고 마는 그런 한낮의 꿈. 꿈에서 깨어나 잠시 생각하고 말았다. '안전하고 편안하면서 만족스러운 섹스는 없다' 던 에스더 페렐의 말은 인정하기 싫지만 일정 부분 옳다는 생각을.



바다에 빠진 것 같은 불안했던 그 꿈은 한 때의 우리가 현재 잃어버린

실로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찰나의 꿈이라, 다시 꾸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John William Waterhouse, The Siren,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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