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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07. 2021

굿 와이프

물론 그녀는 인생을 마음껏 즐겼다. 즐기는 것은 그녀의 천성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더 이상 신랄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들이나 보여주는 역겨운 도덕심도 전혀 없었다.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 




주말 아침. 늘 비슷한 오전 일상이 유유히 흐르던 중이었다. 아침을 먹고 거실에서 아이들과 포켓몬 카드 게임을 하던 세 사람의 시끌벅적한 대화를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 흘리며 설거지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도마 앞에 섰다. 미리 꺼내 둔 불고기감 한우를 다듬기 위해서. 대체 공휴일이 끼어 있는 3일 연속되는 주말은 미취학 다둥이를 둔 유자녀 기혼부부인 그와 나로 하여금 '휴일'이라는 단어가 주는 쾌감을 그리 느끼지 못하게 하고 만다. 아니 어쩌면 개인적인 강박일지도 모를 일이다. '주부' 이자 '아내'인 나로서는 의식적으로 식구들의 끼니 생각을 하고 말기에. 외식이나 배달음식을 불호하며 되도록 식재료를 이용해 갓 만든 따뜻한 집밥을 선호하고 마는 까탈스러운 성격 탓을 해 보기도 한다. '엄마' 로서 '아내' 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의식적인 강박적 생각들. 



아무 생각 없이 칼질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워킹맘을 접고 전업주부가 된 지 2년 차 홈셰프의 자만심 탓이었을까. 이제 요리라면 이골이 나니 '뚝딱' 해 버려야지 싶은 도마 앞의 알량한 태도는 기어코 화를 부르고 말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싹둑. 아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팠으니까. 줄줄 흐르는 피도 그 후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따끔함도. 손톱과 살이 동시에 베어 나가는 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꽤 많이 베어 나갔던 모양인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단순한 베임 치고는 너무 줄줄 흐르는 피는 아이들과 그이를 당황시켰다. 물론 그들의 당혹스러움은 그때뿐. 다시 카드 게임에 열중하는 아이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이는 자신이 요리를 하겠으니 가서 지혈하고 쉬라며 부엌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들은 사실 예상이 되어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나. 역시 여자와 남자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한번 더 느끼고 말았다. 감정적 공감보다는 문제의 대처와 대응이 우선이라는 점. 탁월한 논리적 문제 해석과 방법 모색이 우선이라는 점. 이제는 그들의 그런 점들을 본받고 배워보려고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미묘한 서운함이나 애석함은 왜 은은하게 마음에 퍼지고 마는 것일까. 



불고기감을 다듬어 점심 요리를 해 주고 설거지를 도맡아 해 주는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다. 고맙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기어코 이런 생각을 여전히 하고 마는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엄지손톱과 살점이 뭉텅이로 베어나가 내내 지혈이 쉽지 않아서 솜뭉치나 휴지로, 기어코 손수건으로 왼쪽 엄지손가락을 꾸욱 움켜쥐고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며 아파하는 나의 손가락을 같이 쳐다봐주기를.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유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내색해 주기를.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도 같아서 그 아픔의 밀도를 같이 느끼고 있다는 게 보이기를. 논리와 해결보다 감정적 정서적 공감이 가끔은 더 앞질러 주기를. 최소한 당신에게 내가 여전히 아끼는 '여자'로 느껴진다면. 왜 당신은 날 앉아주지 못했을까. 왜 나는 당신에게 앉기려고 먼저 다가가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연애할 때 보이던 온갖 유별난 애정과 정서적 공감들로부터 멀어지는가. 유자녀 기혼자가 된 이후에 깔끔하게 서서히 사라지는 감정을 묵묵히 방관한 채 흘려두고만 있는가. 감정이란 무릇 생활과 일상유지를 지속함에 있어서 물론 이성보다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기 쉽지만. 그렇지만... 




장미 같은 혈색이라니. 그녀는 비웃으면서 생각했다. 모두 쓸데없단다, 애야.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좋은 날과 나쁜 날을 겪었더니 인생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더란 말이지. 게다가 네게 하는 말이지만, 이 캐리 뎀스터는 켄시티 타운에 사는 어떤 여자와도 운명을 바꿀 생각이 없단다. 하지만 그녀는 애원했다. 애석한 일이야. 장밋빛 시절이 사라진 것이 서글펐다.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p. 51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침대, 1892.    (우리의 침대는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의 나였다면 '왜'라는 부사에 집착하고 말아서 기어코 감정을 드러내 그이를 불편하게 하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괜찮아'라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꾹 혼자서 눌러 버리고 만다. 아마도 경험으로 다져진 지혜라면 지혜일지 모른다. '우리'가 만든 4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예의를 떠올리며. 남겨진 3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책임감 하에. '나'라는 사적 인간이 가지는 혼란스럽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픈 그러저러한 감정들을 외부세계로, 내가 아닌 타자에게로 발화되고 마는 타이밍 앞에서 참는 연습을 꽤 오래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 결혼을 하고 터득한 하나의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내'라든지 '절제' 혹은 '헌신'이라고 하는 빌어먹을 덕목들일테다. 



일부일처제의 '와이프'가 되고 나서 절절히 깨닫게 된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서로 간의 친밀감과 연민이 쌓일수록 동시에 잃게 되는 것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서로 '사랑' 한다는 표현을 해서 하나가 된 그 시절 두 사람의 욕망과 뜨거움은, 애절함과 유별남은, 그렇게 서로를 향한 궁금함과 욕망의 실효성이라는 것은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 서로 '원한다'는 충만한 힘이 도달하는 어떤 목표치는 방향이 바뀌어 버리고 만다는 것. 당신을 욕망하고 원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단체 집단이 되어 버린 '우리'의 남은 생활의 실존적 생존의 시간들이 보다 원활하고 평온하게 엔딩을 맺는 '생활'에 집중되고 만다는 것. 



갓 지은 집밥을 고집하며 매 끼니 매 주말 비슷한 메뉴여도 다른 영양소들로 분배하여 미리 식단표를 마음속에 저장해 둔 채 식구들의 영양을 책임지는 일. 제철 식재료를 사서 소분해 두는 것. 계절이 바뀜에 따라 침구 시트를 바꾸고 옷장을 정리하는 것. 생필품의 재고 여부를 수시로 관리하며 구매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품목에 대해서도 시시때때로 핫딜이나 세일을 고려하며 최선의 가격으로 소비하는 일. 가계의 재무 흐름과 자산의 축적률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공유하며 경제적 의견을 교환하는 것. 생활적으로 연관되는 각종 개편되는 정부의 행정 정보나 세재개편 등에 대해서는 해당 신문 기사나 정보를 축적한 후 정리하여 그이에게 정보교환과 이해를 함께 도모하는 것. 무엇보다 메인 양육자로서 아이들에 대한 모든 행정적 생활적인 것들을 도모할 것 - 양육이나 교육, 기타 의료적 생활적인 것들을 전부 포함시켜 - 그렇게 가정의 메인 경제부양 투자자로서의 '당신' 이 신경 쓸 일이 없도록 내부의 컨트롤 타워로서의 행동에 만전을 다하는 것. 무엇보다 간혹 분노나 고통이나 아픔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온화로운 표정과 아무렇지 않은 밝은 미소를 자주 보이며 '괜찮음'의 신호를 보내며 내가 아닌 타자들로 하여금 화평을 느끼게 할 것. 



@JTBC, 인간실격 中 부정. 



이런 현재의 나는 어쩌면 당신에게 '굿 와이프'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이제는 감히 그렇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현재 통과하는 이 사랑의 시간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퀘스처닝' 중인 상태라서. 생활적인 '굿 와이프' 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굿 와이프가 지키려는 가족들로부터 최선을 다해서 떨어지고 싶은 고통스러운 모순을 여전히 느끼고 말기에.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 딱딱하게 굳어진 가부장적인 당신으로서는 절대 생각하려 하지 않는 어떤 섬세한 생각들을 기어코 하면서 살고 있기에. 가령 결혼하면 사랑일까라든지, 좋은 부모란 어떠해야 한다든지와 같은 우리에게 고정되게 교육된 신념들은 전부 어쩌면 결혼시장의 사회적 장치의 일부인 일부일처제가 오랜 세월부터 혹독하게 인간을 답습시키고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그 일부일처제는 '부부' 사이의 이음매가 터지지 않도록 단단히 결속시키는 또는 결속시켜준다고 믿는 매우 촘촘한 바늘땀으로서 작용할 테지만 과연 그 일부일처제가 도대체 왜 결혼시장의 표준이라고 하고 마는 것이지.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시선의 은은한 차이는 또 어떠할까. 당신은 왜 우리 아이들의 타고난 지정 성별이 남자라서 오렌지색보다는 파란색을 더 선호해야 하며, 시크릿 쥬쥬나 프리파라를 보는 것보다 헬로카봇이나 메카드 볼에 익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우리 아이들이 이성애자라고 그렇게도 확실히 믿는 연유는 무엇인지. 왜 아이들에게 '생리'라는 단어나 '젠더'에 대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알려주려고 할 때면 입을 막아 은근한 재갈을 내게 물려주려 하고 마는 것인지. 주디스 버틀러나 데이비드 버스, 리처드 도킨스나 에스더 페렐과 리처드 테일러를 알지 못하는 당신이라서 그 답답함과 어떤 면에서는 꽉 막힌 체증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분들은 그러려니 하지만. 



에로스는 부차적 문제라 하더라도 생활을 오래 윤활하게 유지하며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부부간의 시선이나 가치관의 간극이 되도록 적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게 되고 만다. 최소한 그에게, 그녀에게, '굿'이라고 불리려면.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끔 종종 때때로 내가 선택한 배우자와 결이 맞지 않는 생각에 부딪히고 말 때면 어떤 면에서는 '포기'라는 것을 선택하는 시간이 자주 쌓일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우선 의심해 보아야 한다. 결국 상대를 욕망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은 스킨십이 인색한 한쪽이 아닌 양쪽 모두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부간의 스킨십이 없어지는 이유가 단지 하지 않는 행위자의 탓이라고 그렇게도 자신 있게 '남 탓' 할 수 있는 것일지. 최소한의 노력과 개선점을 찾아 적절히 대화하고 소통하지 않는 양쪽 모두에게 무게중심이 쏠려야 한다고. 



@찰스 웹스터 호손, Young Man and Woman, 1915   



가족이라는 단체를 위한 인내나 정절 혹은 헌신이라는 미덕은 결국 사회를 위한 것으로 작동하여 지극히 개인이라는 실존적 인간으로서는 은밀한 구속이 되고 말아, 그것은 인간 본연의 개인을 위한 것이 사실은 아니라는 점. 당신의 몸과 마음은 서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서로 '부부' 로서의 파트너가 된 이상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고 마는 우스운 인지부조화. 무엇보다 우리는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바깥에서 돈을 적당히 번다고 해서 집 안에 있는 또 다른 배우자보다 똑똑하고 유식하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정말 확실한지. 반대로 집에 있다고 해서 그와 관련된 노동을 정말 확실하게 책임지고 현명하게 효율적으로 도맡아서 처리하는 배우자 종도 흔치는 않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하여 서로 그저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각고의 사투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로 치하를,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며 아껴야 한다는 것. 더 멀어지기 전에. 더 마음이 닫혀지기 전에. 



아무튼 당신에게 '굿 와이프'가 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아직은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왼쪽 엄지손가락을 반창고로 칭칭 묶고서도 가사와 양육을 묵묵히 하며 며칠 동안 손가락이 욱신거려서 글도 제대로 없었던 나는, 묘하게도 당신이 여전히 서운하고 조금은 미웠으니까. 그래도 설거지를 대신해 주고 대충 먹어도 괜찮다고 퉁명스레 말해준 당신이.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휴일이면 온 심신을 쏟아부어 함께 양육을 책임지려 애쓰는 당신이, 그렇지만 고마워서. 나로서는 안타까운 연민의 정이 더해지고 말아서. 



나는 아직 당신의 '굿 와이프'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야 할 것이기에. 

그것이 결혼을 한 우리들의 대가이자 책임일테니까. 



우리의 10월, 첫 연휴때 바라본 오후 5시의 풍경은 이러했다. 당신과 곁의 아이들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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