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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4. 2017

#19. 다시 찾았습니다.

늘,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 친구, 당신과 닮았거든요.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다시 보게 된 순간, 까마득히 멀어질 듯한 그리운 기억이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함께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우울했던 음습한 슬픔과 동시에, 그리움의 욕망 저 언저리를 붙잡고 마음을 차지하여 결국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말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재준 선배를 만났었다. 


정리는 다 했어?
네. 어느 정도는.. 허무하네. 근데 
이혼하니 어때. 예상대로야? 아 진짜 궁금하네 나로선 아직 붙잡혀 살고 있으니 하하  
예상은 무슨..
별생각 없어?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모르겠어.. 아직 덤덤해 그냥. 현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바뀐 게 별로 없어  
후회되냐 
진우가 항상 마음에 걸리지 근데.... 후회는 모르겠어 아직까지. 늙어서 후회할지 모르지. 수현이랑 헤어진 건 후회 없어. 10년 지나니 그냥 안 되겠다 싶더라고. 마음 안 가는 건 뭐 달라지지 않았고. 우린 좀... 신뢰가 없었어. 서로 이해하기엔 너무 멀어졌으니까.. 다른 사람 좋다는 여자 더 이상 미련 없고 사실 그전부터 나도 이미 마음 떠난 지 오래여서 정말 그러든 말든 상관없는 상태였으니까. 볼 장 다 본 사이지 뭐. 좀 특이한가. 하..... 다만  아이가 걸리는 거지... 형도 그랬다면서. 
나야 그랬지. 근데 나는 참고 살잖냐. 그러다 보니 또 살아지고. 그냥 그런 거 아니겠냐. 
...
됐어. 네가 선택했다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렇게 니 식대로 사는 거지 별거 있겠냐. 이제 자유다 인마
선배... 근데 좀 혼란스러워.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사실. 휴... 피곤하다 나이 들어가는 것도. 
네가 옳은 걸 수도 있어. 남들이 개새끼라고 욕할지언정 
형도 욕하지 않았어?
욕했지 짜식 졸라 용기 있는 새끼라고 부러워서 욕했지. 네가 정리했다고 했을 때. 그리고 떠난다고 했을 때 
하.... 하. 형도 참  
그 여자는. 좋아했다며... 하 이 새끼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진짜 놀란 거 알지. 이제 어쩔 거냐. 찾을 거야?
모르겠어. 찾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이대로 잊어보려고. 
찾아봐라 
... 
이왕 이렇게 된 거 찾아야 속 후련하지 않겠어? 도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너를 이지경까지 만든 여자야. 궁금하네  
하하 형도 참.......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그녀 생각이 난다. 전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어서 더 우울하기만 하다. 선택을 해 놓고도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 대는 미련 맞고 못난 남자의 표상이 된 것 같아서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술로 기분을 없애려 안간힘을 써댔다. 



헤라 탓이 아니야 내 탓인 거지.... 
그래 그니깐 말이다 이 새끼. 하여튼 잘 살아라. 갔다 언제와 
한 5년은 있어야 될 거 같은데 
5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건강해라. 그리고 잘 살아라. 사는 거 진짜 별거 있는 거 같으면서도 없을 수도 있어. 
형..
네가 솔직히 부럽지만 난 아쉽진 않으니깐. 
아... 그래. 아쉽진 않아. 이혼이 아쉽진 않고 다만 혼자 지낸다는 게 어떤 걸지 예상이 돼서 아쉽기는 해. 그리울 거 같으니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새끼. 술이나 마셔. 늙어간다. 내일 죽을지 누가 알아. 그러니 니 선택에 후회하지 마. 그냥 살아. 있는 힘껏 
어 그래 보려고. 
잘 다녀오고. 그 여자 찾음 꼭 붙잡고. 아깝지 않겠냐. 남은 삶이. 여전히 네가 그립다면 이젠 못할 것도 없을 테니..
글쎄... 모르겠어 그건. 만날 수나 있으려나. 아니 이제 만나선 더 안될 것도 같고. 
뭐가 그리 복잡해 단순하게 좀 살아. 기쁘면 움직이는 거지 안 그래 
아..... 헤라도 그 말했었는데. 


 헤라가 그랬었다. 자신은 기쁘면 그저 움직이는 거라고. 고양이들처럼 그런 거라고 했었다. 평소 사용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는 듯한 신기한 매력을 풍기는 그녀가 여전히 마음이 쓰이고 끌리고 그래서 보고만 싶어 진다. 


 미국에 와서도 집도 일도 일상도 새롭게 다시 출발하고 정착을 해내가는 그 일상 속에서도 간간히 그녀가 생각이 났다. 여전히 한국에 남겨진 가족들을 챙기는 상황에서도, 그런 내게 그녀가 갑자기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유령처럼, 유펜 안의 스타벅스에서 불현듯 스친 그림자를 단숨에 쫒아간 나도. 그 모든 건 아주 처음의 우리들의 만남처럼 우연의 착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녀를 만났다. 

 나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녀를.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고로 정말 기억이라도 전부 잃어버린 탓인지. 성격이 좀 더 발랄하게 변한 듯, 그러나 여전히 아름답고 빛이 나는 청초하고 생그러운 그녀는 좀 더 어른 여자의 느낌이 강하게 그렇게 진한 향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목소리에서 나오는 당당함과 재기 발랄함, 어딘지 모를 담담함과 슬픔까지도 모두. 고헤라 다웠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간다. 

 기억이 있고 없고 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그녀를 기억하고 여전히 마음이 이렇게 그녀를 보았을 때 움직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주일 뒤, 첫 수강이 열리는 날, 나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긴장이 된 탓인지 왠지 모르게 코끝이 더 추운 날이었으나 추운 기운 보다도 다리가 이상하게 풀리는 건 기분 탓이었겠다. 그녀가 앉아있다. 청바지에 검은색 네이비 와이셔츠를 입고. 갈색 코트를 의자에 걸치고 이제 일어섰다가 앉으려 하던 찰나였다. 여전하게 아름다운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 진다. 이 추운 11월의 미국에 부는 바람이 좀 더 따뜻하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게. 


Good morning. 

Good morning... 아 훗. 


 그녀가 웃는다.

 그 웃음이 이제는 슬프거나 어딘지 모를 울적함이라기 보단 그저 밝기만 하다. 나도 덩달아 밝아지려고만 한다. 그럴수록 심장이 더 설렘을 느낀다. 아직 살아있는 느낌이다. 


오랜만이죠 정말...
네 일주일 만이시죠 안녕하세요 
네 아...
좀 일찍 오셨네요 
네...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 
네. 오늘 첫 수업이시죠 
네. 
즐거우실 거예요 
네. 즐거울 거 같습니다. 
기쁘셨으면 좋겠네요. 
네...?
기쁘면 움직이는 것. 단지 그것만 생각하면 큰 스트레스받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으니깐요 
아..... 여전하군요 
네? 
아.. 아닙니다. 
사실...
?
제가 좀 신기했어요 그때 이후로 
네...?
이렇게 말을 조잘조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미국 와서 줄곧 근데...
근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네요. 신기하네요 내담자님 뵙게 되면.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봐요 
네 그런가 봐요... 다행이군요 
네?
제가 한국인이어서... 참 다행입니다 
네.... 하하.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Sure. 물론이죠. 미국에서 이름 부르는 게 뭐 어렵다고요 
원래 그렇게 유쾌 발랄하셨나요 
아.... 음... 친구 말에 따르면 아닌 듯도 한데, 음.. 지금만 그런 거 같아요 
아.. 친구?
네. 같이 온 친구가 있거든요 
아...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남자 친구... 아 죄송. 말이 헛 나왔습니다. 
훗... 재밌는 분이시네요 
.... 저기 
네? 
아. 아닙니다. 
네... 


 어떤 사람과 만났을 때 내가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을 할 때도,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도. 바로 그 느낌이 내겐 기쁨의 감정이고, 이제 고헤 라 이 여자는 내게 기쁨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보고 있으면 마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여자. 그녀와 헤어지려 하는 순간 이상하게 내 삶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 그렇게 가슴을 아리게 하는 법 


그것이 내게 다시 찾아온 사랑이었다. 
기쁨을 주는 이 여자와의 헤어짐은 언제나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사랑에 빠진다. 
다시 우리가 만난 것처럼.. 





그가 다시 찾아왔다. 

 매사에 일희일비하면 너무나 피곤해지는 것 혹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면 불이익을 받기 쉬운 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유키가 말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다음부터는 별로 기억나는 추억이 없는 것 같다는 유키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다만 기억나는 추억이 정말 없지만, 진심으로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할 수 없는 이상한 그리움만 마음에 담은 채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감정. 그가 사무실에 찾아오고 처음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알 수 없는 희열과 설렘이 존재했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게 만드는 사람. 나를 이렇게 만드는 사람. 왠지 한국에서 몇 번 스쳐간 인연일까 라는 맥락 없는 상상마저 불러일으키게 하는 남자였다. 


 감정이 움직여야 기억나는 것도 있는 법일 지 모른다.
한 번뿐인 다시 찾은 삶을 제대로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이 감정이 나를 감싼다. 



 감정이란 얼마나 소중할까. 

 고양이로 살았을 때 이만큼의 사람 감정이 느껴진 적이 크게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있다고 한들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심장이 기억하고 있는 건 낙엽이 떨어질 무렵의 지혜의 숲, 도서관, 어두 컴컴해졌었던 엘리베이터와 누군가가 나의 손을 잡아주는 듯한 느낌이 계속 반복되는 꿈들. 그 장면들을 상상하자면 이상하게 마음이 저려 왔다. 


 그리고 내 이름을 한국어로 불러 준 이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지금 이 순간 

 나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기억의 감정을 충분히 살릴 수만 있다면 왠지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남자 친구긴 하죠. 
....?
남자 기는 하다고요. 풉
네... 하하 
제가 지금 정말 신기하네요 수강생님 덕분에. 정말 한국인 친구가 처음이라 그런가 봐요 
친구... 음 헤라 씨 
네? 
저희 친구 할까요 
...?
친구 합시다. 
아...
제가 친구 해 드릴게요. 저도 친구가 사실 없어요 아니 있었는데 잃어버렸었습니다. 아주 소중한 친구....
아....


그가 어딘지 모르게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금세 나를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며 웃는다. 매력적인 미소, 동안의 외모, 청바지가 참 잘 어울리는 한국 남자다. 


친구였어요 아주 소중해서 제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 친구.. 
아.... 안타... 깝네요. 
그런데...
....?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 오는 건 왜 였을까 


다시 찾은 것 같습니다. 
.....
당신과 많이 닮았거든요. 그 친구. 
.... 네?
늘 보고 싶게 만드는 친구였는데. 그래서 제가 그 친구를 떠났었거든요 
아...
늘..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습니다. 지금 
..... 아 
헤라 씨랑 친구 해야겠어요 그래서 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말입니다. 



 유키가 그랬었다. 사람을 조심하라고. 

 상대방이 가진 것이 내 현재에서 매력적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낯선 욕망에 끌리게 되는 게 바로 사람 동물이라고. 그러나 그 말을 떠올리기 이전에 이미 나는 이 사람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어떤 우연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저 그를 단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어딘지 모르게 아주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이 남자에게 나는 조금씩 끌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입고 있던 청바지처럼, 이 사람도 청바지와 와이셔츠가 잘 어울린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마음에서 대며 나 또한 당신과 친구를 해야겠다는 이유 없는 마음의 목소리에 내 온 감각을 맡기고 싶어 진다. 


 이것이 비록 낯선 욕망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사랑을 읊조리기 쉬울지언정.
나는 지금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게 다가온 이 사람을, 나는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의 이 사람으로서 느끼게 된 낮과 밤의 온전한 감정이 어떤 우연적인 조건에 지배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상관없다. 그만큼, 희망이라는 멋진 미래를 약속받는다는 것만큼 가슴 설레는 일도 지금 내게는 있을 수 없기에. 


 지금, 미국에서 살게 된 고헤라라는 나의 과거는, 과연 이렇게 존재 이유마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런 필연적인 사랑을 한 번이라도 느껴 봤을까. 아니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나는 이제 감히 그런 사랑을 느껴보고만 싶어 진다. 나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라는 희망. 그 멋진 미래를 약속받는 느낌의 가슴 설레는 희망을 간직한 채. 


꿈속에서  내내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갔었는데, 그가 만약 이 사람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오늘이다. 


 불확실한 기쁨을 주는 이 사람과 나는 오늘 마주했다. 

그리고 내일도 왠지 마주하고 싶어 진다.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 이름을 다시 불러 주었다. 계속 듣고만 싶어 지는 목소리다. 


헤라 씨. 
네..?
우리 이제 친구 하는 겁니다. 
아.... 
좋군요 
....?
오늘따라 이 가을이. 11월이. 미국이. 그리고 제 앞의 한국인으로 다시 마주한 당신이. 
저도...
....?
이상하게 기대되는 걸요. 올해의 11월이. 제 앞의 한국인으로 마주하신 당신이. 


그가 웃는다. 저 웃는 미소를 계속 보고 싶어 진다. 



To Be Continued (Final 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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