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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15. 2017

#20. Final) 사랑해

같이 있자. 있고 싶어요.

 그에게 빠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 그러나 분명 처음 보는 사람. 아니 처음인 것 같지 않은 그리움의 대상. 이런 감정이 바로 고양이 여자였을 때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을 사람세상의 감정인 걸까. 그렇지만 언젠가 이미 몸에 익숙한 듯한 울렁거림이다. 눈이 마주할 때. 스치듯 지나갈 때. 얕게 풍기는 폴로 향수 냄새. 늘 입고 오는 청바지의 곧은 옷매무새. 모두 이상한 끌림으로 내게 다가온다. 


보통의 시간이 특별해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그 덕분에.. 


똑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끝나셨어요? 첫 수업 어떠셨는지...
Good as I expected. and... 
And...
Because of you. 
Don't kidding me. 
No. It's real.... Yes. This is real fact that I am meeting with you again. 
Again
Yes. Begin again. 
당신.... 누구야 
.... 
아 죄송해요. 멋대로. 
생각이 안 나죠. 기억이 날 리가 없겠죠 
.... 저 아세요? 한국에서 우리 만난 적 있어요? 우리가 어떤 사이였나요? 
... 아니요 아무 사이 아니었어요 
아...
잠깐, 차 한잔 할 수 있어요? 
아.. 네 아직 근무가 
언제 끝나요?
한 30분 후쯤..
기다릴게요. 저기서. 


 그가 스타벅스를 가리켰다. 

 문득 똑같이 매일 찾아갔던 유펜 안의 스타벅스가 달라 보인다. 특별한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왠지 저곳을 이제 매일 찾아갈 것만 같다. 더욱 부푼 마음을 안고. 


Sorry late for a while. 
No. You are always Welcome 
Welcome...
Yes. Welcome back 
원래 그런 말투세요?
네?
아니 그냥 뭔가 자꾸 의미가 있는 듯한..
하하 아닙니다. 제가 헤라씨 보면 자꾸 말이 헛 나오네요.. 왜 그럴까
아....
음 아무튼 친구가 한잔 사겠습니다. 뭐 먹을래요. 
저는..
그린티 라테 좋아해요?
아....... 네.... 좋아... 해요 
네. 그럴 것 같아서 이미 주문해 뒀어요. 아 저기 나오네요 


 케이시가 날 쳐다보며 찡긋 웃었다. 매일 혼자였었는데 오늘은 둘이라면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가리키며 나를 본다. 왠지 모르게 수줍다. 입고 있던 검은색 블라우스와 회색의 모직코트의 옷깃을 매만지고 머리를 한번 쓸어 올렸다.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 나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제 친구가 좋아했어요 
그린티 라테요?
네... 얘기... 해 드려요?
뭐 네... 
아주 재미없는 얘기일지 모르는데 
그 재미없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도 친구의 몫이겠죠?
하하...헤라씨 여전해요 
네? 
아. 아닙니다. 음.. 한국에 두고 온 친구가 있어요. 저 때문에 사고를 당했죠. 아주 큰 사고였어요 
아...... 
그 사고 때문에 친구를 잃었죠. 살아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떠나갔죠. 행방을 찾질 못했어요 
안타.... 깝네요. 어떤 사고셨길래...
제 대신에 다쳤어요. 제 아이를 구했죠 
아... 결혼을... 하셨군요. 아 그렇죠 그 나이면... 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아 아니 그니깐 저는 
아니. 괜찮아요. 제가 못난 사람이라서, 아이를 구해준 그 친구를 떠나보냈고 제가 또 못나서 가족들을 지키질 못했죠. 지금은 혼자 삽니다. 
네..... 아... 
혹시 지지향이라고 아세요?
아....... 종이의..... 고향.....? 거기를 가보신 적이 있어요?
네. 그 친구 덕분에 가본 적이 있죠. 딱 한번. 단 한 번이었고 단 하루였어요. 그 친구와 함께 했던 밤이었죠 


 이상하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슬픈 눈동자였으나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왜 그 미소가 그렇게 편안했을까. 줄곧 쳐다보고만 싶어 졌을까.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면 좋을 순간이었다. 


어리석고 어리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친구를 저는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왜냐하면.... 그 친구에게 빠져들수록 사실은 늘.... 늘 그랬거든요 
늘.....
마주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까 봐.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두렵고 무서웠죠. 그래서 멀리 하려 했어요 
아....
근데 결국 뒤늦게야 알게 됐죠. 그 친구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을 때. 선명하게 다가왔죠. 
부재... 에서 오는 그리움이 때론 선명할 때가 있죠.. 아...
아.... 헤라씨도 그럴 때 있었어요?
네.... 저는 미국 와서 매일 비슷한 꿈을 꿔요. 악몽은 아닌데 자고 일어나면 매일 눈가에 물이 고이곤 해요...
어떤...
검은 엘리베이터 같은 공간인데 아무도 없어요 근데 누군가 제 손을 잡고 있는 꿈. 그리고 작게 이름을 불러요. 
헤라.....
............
헤라라는 이름이 참 좋아요. 예쁩니다. 
.... 네 
...헤라씨. 
기억이 없어요. 당신을 몰라요. 누군지 모른다고요. 어디서 왔어요 도대체 누구예요 당신...
.......
도대체 왜 나타나서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죠. 누구세요. 제가 잃어버린 3년 안에 어디 계세요 
아... 어디...
어디... 계셨어요? 언제 만났어요 우리?
........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괜찮습니다. 다시...
..... 
다시 만났으니깐..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상하게 아픈 마음인데, 그 아픔이 싫지가 않다. 이대로 아파도 줄곧 저 미소와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괜찮을 것만 같다. 그 순간 그의 오른손바닥이 내 볼을 감싼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너무 따뜻해서.... 그대로 계속 손바닥이 볼에 머물렀음 했다. 그랬다. 그 정도의 감정이 갑자기 순식간에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혼란스럽지만 또 나쁘지 않은 따뜻함이었다. 


울지 마요. 예쁜 사람이 왜 우나 
..... 저희가 어떤 사이였죠. 친구였나요 
네. 친구... 망설여지는 친구. 늘 마주하면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친구. 그래서 두렵고 우울한 감정을 주는 친구. 그리고 
....
내가 새로운 내 모습을 보게 만드는,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드는 날 주체할 수 없이 만드는 그런 친구..
아....
수많은 날들이 견디기 힘들어서 결국 떠나왔고, 다시 만나게 된 친구 말입니다. 이제야 만났어요 그 친구..
....... 모르겠어요 전 
괜찮아요 몰라도 
.. 알고 싶어요 
알아가면 됩니다. 
..... 
헤라씨
네?
그 친구에게 하지 못한 말. 지금 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요 
..... 왜 못했어요 
못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해선 안될 말이죠 
..... 기쁘지 않았나 보군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럼 
그 친구가 그랬죠. 기쁘면 그냥 움직인다고. 보란 듯이 잘 산다는 건 날 속이지 않고 기쁘면 그저 움직이는 거라고 
아.... 그 말.......
헤라씨도 왠지 기쁘면 움직이는 쪽 같은데... 아닌가?
아니.... 맞아요.. 아니... 그니깐 나는. 
그러니 이젠 해야겠어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


 마주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앉은 2층 스타벅스의 창가 구석진 자리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석양이 창문을 향해 비춰지고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금세 어둑어둑해지는 바깥이었다. 카페 안에서 아델의 someone like you 가 들렸다. 우리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30대 중반의 여자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씩 웃으며 1층으로 책과 다 마신 커피잔을 들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은 건 오직 두 사람. 그와 나뿐이었다. 그가 일어나서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 좀 봐 줄래요 
.........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 왜 이러지 오늘..... 왜 이러세요 저한테 저희 고작 오늘 
오늘. 처음 봤을 뿐인데. 그렇죠 
그렇죠... 
오늘. 다시 처음 만난 것처럼. 이제는 미루지 않고 말해야겠습니다. 
.....
사랑합니다. 
아....
사랑한다. 고헤라. 


그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싫지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왜 난 그 말을 했을까. 왜 보고 싶었을까. 모르겠지만 마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제어할 수가 없는 말들이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리보다 몸이 더 반응하기 시작했던 걸까. 


.... 보고 싶어요 
... 보고 있어요. 지금 
보고 있나요? 
응. 보고 있어. 다시 
다시...


딴생각에 잠겨 걸었었다. 

 3년을 줄곧 그랬다.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하게 그립고 아프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붙잡은 채. 그렇게 매일의 일상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매일의 일상이었다. 아주 보통의 나날들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따뜻하게 데워 마신 우유. 유펜에 처음 와서 스타벅스에서 시킨 그린티라떼. 일을 하다가 잠깐 지치는 순간이면 케이트와 나누는 가십거리나 소소한 잡담들을 나누던 사무실 공간과 의자. 내담자들과 마주하는 회의실 위의 테이블, 그들이 앉아있었던 소파. 퇴근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잠깐 들르게 된 도서관. 도서관 안에서 발견한 어린 왕자 책. 그리고 다시 집과 학교. 사무실과 스타벅스.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날 비웃기라도 한 듯,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갔지만,
이제 모든 시간에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꾸만 밟히는 목소리, 눈에 선한 표정
마치 마지막 선물이 될 것 같은 그 한 마디가 내내 귀에 머문다.

 사랑한다는 말은 유키나 엄마 이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해주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갑자기. 아니 갑자기가 아닌 이미 오래전부터 망설여 왔었던 그 말을 하러 내게 다가온 것 같은 이상한 사람. 목소리가 좋은 사람.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 날 보면 슬픈 눈에 웃는 입술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기쁘다. 

이 기쁜 감정을 갖고 이제 변해버린 시간을 다시 흘러가 보고 싶어 진다.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사람과 함께. 이상하게 두려운 감정이 앞서지만, 이미 그로 인해 나의 일상은 파괴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떨리고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이 대신 내게 말해주었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모든 일상은 이제는 마냥 내겐 심장을 떨리게 하는 모든 것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 의미 없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붙는다. 사랑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란 이런 걸지 모르겠다. 


 그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게 된 순간 이미 내 모든 일상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나는 선택했다. 보란 듯이. 이 사람을. 이 남자를.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요.
괜찮아. 기억은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니까.
....
같이 있어요. 
... 있고 싶어요 
같이 있자
같이 있어요. 


우린 지금 같이 있다. 

 해가 저물고 12시가 지나도 이젠 혼자가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선명하게 내게 그녀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함께 한다. 그녀가 내게 오는 길이 이제 멀지만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만났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아껴두었었고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고 아니 말해야 될 것 같았다. 내일 죽음이 다가와도 후회가 덜 되게. 모든 것은 이미 변했고, 이 맘으로 그녈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녀가 품에 들어온다. 여전한 그녀의 향기와 체취가 온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지지향에서는 혼자 떠나왔지만 이제는 절대 그녀를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눈물이 그녀 눈가에 고였을 때 모두 흘려버리라는 듯 나는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며 그 눈물을 닦아 내기 시작한다. 


 기억해 내지 못해도 내가 기억하기에. 그녀와 함께 한 모든 시간들. 그녀의  눈동자. 밟히는 미소. 귀에 아른거리는 계속 조잘거려주기를 바라는 간지러운 그녀의 목소리. 그 여리고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의 감촉들. 여리지만 선명하게 풍겨 오는 그녀의 향기. 몸의 따뜻한 감각과 움직임. 머리는 잊었을지언정 몸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해내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내가 다시 나오고 있다. 


 그리울 때면 꺼내볼 수 있게 하나하나 내 마음에 깊숙하게 담아진 모든 과거의 기억을 뒤로한 채 다시 새로운 기억을 만들 생각이다. 다시 만난 이 곳에서. 언젠가 보았던 하얀색 털의 작은 새끼 고양이를 꼭 뺴닮은 그녀와 함께. 


그녀의 귓가에 대고 한 말에 그녀가 청초한 미소를 보인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다시 사랑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같이 있자. 사랑해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추운 겨울바람과 참 잘 어울리는 여자다. 그래서일까. 안아주고만 싶어진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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