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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8. 2018

'나의 아저씨'를 당신에게 고백했던 날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배반하죠. 그쵸 엄마

편지 여섯) 염병할 년, 쌍놈의 기지배 였었죠. 알아요. 아니 알 것 같아요 이제 조금은..


엄마. 오늘 아침엔 그이와 엄마가 나란히 쌍둥이들을 안고 있는 걸 봤을 때 눈물이 핑 도는 걸 겨우 참아냈어요.

 역시 시간이 약인 걸까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픈 기억은 죽은 듯 조용히 마음에 남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 세 사람에게 오늘 같은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저려왔어요. 두 사람에게 아니 당신에게 미안했었던 옛 기억이 생각나면서 한편으론 세상은 일단 살고 볼 일이라는 뒷방 늙은이 같은 고루한 생각으로 출근길 버스를 탔답니다.


당신에게 그의 존재를 알렸을 때, 끝까지 믿고 싶지 않으셨겠죠.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뒤늦게 알았지만 엄마는 이미 내가 그이의 차에서 내리는 걸 몇 번이나 봤었다고 했죠. 차마 먼저 물어보기 이전에 내 입으로 먼저 그의 존재를 알리기를 기다렸다고. 딸에게 말하고 싶은 그 단순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엄마와 아빠에게는 참 어려운 것이고 또 예민한 딸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조바심만 내야 했었죠.


 그때 당신들께 유독 더 차갑고 칼 같은 말을 잘도 휘둘러 댄
모지란 딸년이 바로 어리석은 나였으니까..


엄마. 그때 난요. 벗어나고 싶은 '현재'에서 새로울 것 같은 '미래'로 도망치려 했어요.

 네. 사실 도망이었어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다만 그 도망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어쩌면 사랑이라는 착각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결혼을 '도망'쳐내듯 해 버려도 난 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당신 둘의 티격태격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결혼하기 싫어졌지만,  이런 내 마음을 돌려놔준, 많은 마음들을 주 그 연하 남자 친구는 결국 떠죠. 자기 말로는 놓아준 거라 했지만 이별에 그런 개소리가 어딨겠어요. 그냥 떠나간 거죠. 이별을 대처하기엔 제가 또 찐따 중에 상 찐따였잖아요. 울고불고 오열하며 아파했던 걸 보면..


 더군다나 진저리 나는 회사 이곳저곳에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견디기가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더랬죠. 설상가상 오춘기인 심리적으로 단단하지 못했던 아슬아슬한 딸과, 우울증이 잠재해 있던 아빠 사이에 온갖 예민함이 돌았죠. 로를 경계한 우리 두 사람이 결국 마주한 한 사건 덕에 대번 가족사이가 틀어져 버리고 말고요. 그 와중에 갱년기가 오려는 듯한 당신의 히스테리적 성격까지. 그렇게 삶의 이모저모들을 도저히 받아쳐내며 살아여유가 당시의 제겐 있을 수 없는 것이었어요.


수면 위가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 것 같은 막막함 있잖아요 엄마. 제가 그때 마음이 '단디'하지 못했나봐..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뭐 그런 맛보지 못한 쓸데없는 상상만 한층 마음에 자리한 멍청이가 저였어요.

 더군다나 내 감정이 앞선 그 현실을 더 이상 이성적으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죠. 어디든 날 모르는 누군가에게 기대고만 싶었을 때 그가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빌어먹을 운명처럼 말이죠. 다행히 그는 당시 저에겐 좋은 사람이었어요.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니 만났겠죠. 결혼 후, 내가 날 스스로 붕괴하게 만든 그 일이 제게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그가 바래다주며 살짝 나눈 포옹을 당신에게 들킨 그 순간, 엄마는 얼마나 참담한 심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까요. 그때에도 '엄마가 다 큰 딸년인 내게 화 낼 자격이 있을까, 아니 엄마도 아빠도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라는,  자식으로선 다분히 못된 생각을 품고 지냈었어요. 바보 같이 미련 맞게도. 사실 다 컸다고 말만 했을 뿐 아직 정신머리는 한창 미성숙한 어른 행색 하는 애나 다름없었을 텐데 말이죠.


난 더 이상 숨기지 못했죠.

 이렇게까지 진전(?) 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고. 이러해서 만났고 저러해서 친해졌는데 당신이 보는 이 지경까지 왔다고. 그는 나와 결혼을 안 해도 문제없다 했지만 나는 그가 내 삶의 동아줄 같았거든요. 그러니 당시 제게는 결혼이라는 형태로 지금의 사랑이 떠나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어요. 오만방자한 착각이었죠. 사랑의 마지막 완성의 단계가 결혼이 절대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으니까...


 누가 미리 그런 것들을 알겠어요. 다만 그냥 살아 보는 거죠.  


 그의 나이를 보면 엄마든 누구든 다 그런 눈으로 날 봤었을까요. 그는 '나의 아저씨'로 보였을까요.

 엄마를 비롯해서 우리 둘을 둘러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그랬을 거예요. 의외로 남의 일에 신경을 안 쓰는 타인들이라 하지만, 왜 그렇게 또 뒤에서는 수군대고 안줏거리가 되는지. 한동안 정말 저로서는 웃을 수 없는 농담들을 회사에서 참 많이도 들으며 웃프게 지냈어요. 차장과 사원. 불륜과 임신. 뭐 이런 잡다한 키워드로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죠. 아무 결격사유(?) 없는 둘이 만나서 호감을 가졌을 뿐인데도요. 물론 우리가 좀 덜 평범한 캐릭터 조합이라는 게 그 시답잖은 농담을 들어야 하는 속상한 이유라면 이유였겠죠.


남들의 농담에 웃을 수 있는 누가 있는 반면, 결코 웃을 수 없는 이도 있는 법이죠.
시답잖은 웃음 하나에도 세계가, 계층이, 사람이 선명히 나뉘어져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알게 모르게 잘 떠들어대는것 같아요. 시끄럽게도. 그렇지만 그런 '나'들이 '남'의 진짜 속을 알 턱이나 있겠어요. 제대로 알려하지 않죠. 그럴 필요가 애당초 없으니까요. 다만 보이는 단편을 멋대로 해석할 뿐.

 

어둠 속에 있는 사람만 불을 밝히려 하잖아요.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이들은 그 어둠을 볼 수도 없을 테니까.


그날,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당신으로부터 다 전수해 받았기에 전 꽤 오래 살 듯한 느낌이었어요.

 안 좋은 기억은 재빨리 지워내는 게 엄마 특기라 했었죠? 부러운 그 특기..그러니 당신은 기억 못 하실 테죠. 그와 만남을 고백한 이후 결혼까지는 저도 솔직히 생각하지 않었어요. 다만 막연히 언제까지 만날 수 있을까 이대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막연한 상상만 있었을 뿐이죠. 그때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아빠에게 수차례 맞은 뺨과 얼굴 곳곳보다, 등짝에 시퍼렇게 든 멍보다, 엄마에게 들어야 했던 찰지고 걸쭉한 욕 한 바가지가 이상하게 더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속상했어요. 큰 딸년의 공개 선언에 엄마의 속상함을 미처 알지 못하고 그저 멋대로 당신은 날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당신의 욕을 다 시원하게 들어 주고도, 저는 흔들리지 않을 악다구니와 오기가 이미 자리했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핏대 세워 안간힘을 쓰신 들, 질주하는 마음과 감정에 빠진 저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죠. 때론 나도 내 감정에 속았으니까.. 그렇게 어긋난 내 앞에서 애쓰는 당신 또한 나는 모르지 않았기에 이상하게 더 본능적으로 당신이 안타까웠어요..  


"그 인간이 너 건드렸어? 사고 쳤어?"
"그런 거 아냐 엄마.. 나 그 정도 머린 있어. 자꾸 이상하게만 받아들여."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바른대로 말해. 숨기는 거 빨리 말해. "
"그런 거 없대두..그냥 나이가 좀 많은 보통 사람이야. 잘해줘 나한테... 엄마 아빠보다 더... 믿을 만해"
"미친년. 콩깍지 단단히 씌웠네. 야 눈알 뽑아라. 결혼해도 그놈이랑은 절대 안 돼. 너 엄마 보고도 몰라? 6살 차이 나는 아빠랑도 여태껏 티격태격이야. 나이 많은 남자들이 다 보듬아 줄줄 알지? 그것도 사람 나름이야. 네 아빠 착한 양반 맞아. 물론 너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해보니 나도 반은 속고 결혼했어. 알기나 해?  
"엄만 매사에 너무 부정적으로 말해. 그런 말에 얼마나 상처받는지 알기나 해? 그 사람은 안 그래! "
"너, 지금 아빠랑 틀어지고 몇 대 쥐어 맞았다고 지금 시위하는 거야? 아빠가 그 날 이후 얼마나 후회하는 줄 알기나 해? 넌 잘한것만 있는줄 알아! 그 소심한 양반이 몇 날 며칠 부두에서 잠도 못 자고 집에도 딸년 눈치 봐가며 못 들어오고 못 씻고 일만 하고. 니 년이 어떻게 나랑 아빠한테 그래. 미쳤어?"
"... 그건 아빠 선택이잖아. 난 아빠한테 일하라 한 적 없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도 없어"
"말이야 막걸리야! 이 기지배가 진짜 돌았나?!
"아무튼 할 거예요 결혼. 허락해 줘요.."
"허락 안 하면. 그래도 할 거야? "
"... 못 받아도 할 건 해야지."
"인연 끊어. 이 망할 년, 염병할 년, 쌍놈의 기지배, 네가 어떻게 엄마랑 아빠한테 그래! 네가 어떻게!


 나이 많은 놈팽이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 그저 현실 도피를 택한 미련 맞은 딸년으로 보일 뿐이었겠죠.

  큰 문제(?) 없이 평범했던 딸을 꼬드겨 결혼이라는 함정으로 이끈 나이 많은 아저씨. 딱 그 정도의 스펙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에게 그는 처음에 돌로 쳐 죽일 놈이었겠죠. 그이가 인사를 하러 왔을 때, 그저 자기 탓에 딸이 이 지경(?) 이 되었다며 자책하는 듯 침묵했던 아빠. 쏘아보듯 노려보다 호구조사를 마치고도 막판에 스스로 화에 못 이겨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던 엄마.


당신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그땐 몰랐지만, 결혼하고 나도 때론 땅을 치고 후회(?)를 했을 뒤늦었을 때, 왠지 짐작하고도 남았어요. 아마 당신은 제가 결혼 후 우당탕탕 거리며 그렇게 힘들게 살 줄을 미리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요. 그러니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으로 당신은 나와 그이를 맞이했을 테죠. 엄마에게 난 세상의 전부였을지도 모를 텐데. 그런 나를 아마 평생 용서할 수 없었을 텐데..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사랑은 그런 것일테죠 엄마..이게 콩깍지일지도 모를테고.


되돌아갈 수 있는 길과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 있는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게 된 순간부터 이상하게 말은 참 무서운 힘이 있는 듯 속전속결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죠 엄마. 꽤 재빨리(?) 해낸 걸 보면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에 그렇게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신혼집을 마련했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뚜렷한 확신은 있었던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확신 말이예요. 그러니 제 성격 상 반드시 현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거죠.


그누구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난, 마음에서 그리는 걸 기어코 말로 뱉어 내어
결국 현실로 끌어 당겨 버린 셈이죠.



참 사연 많았죠 우리 둘에게도 그이와 나에게도..


결혼을 했고 과거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고, 그러고 싶지 않고,  이젠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고요. 그저 살아내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네요. 그저 감사해요. 다만 엄마. 이렇게 흘러가 보곤 있지만, 전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길보다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할 혜안을 좀 더 길러내 보고 싶어요. 여전히 미련하고 어리석지만, 이젠 노골적으로 저도 좀 기쁘고 행복하고 싶단 말이죠.


 어떤 길은 이미 지나쳐왔어도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 길 말이에요. 즐거운 설렘이 되고 기쁨이 되며 또한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희망이나 기대가 되 길.. 그러나 때론 어떤 길은 이미 너무나도 멀리 와서 이미 돌아가는 길이 가로막혀 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니 되돌아가려야 갈 수 없는 길이 돼버리기도 하듯 말이에요.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배반해요 그래도 그 배반이..
 부디 새로운 길을 기대할 수 있는,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에 마주하면 좋겠어요.


길을 가다 주변의 작은 기쁨들을 매만지며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가 이제는 좀 생긴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쵸 엄마..


 몰라줘서  미안했어요.

 딸의 폭탄선언에 세상이 무너졌을 것 같았던 당신 곁엔 당신의 엄마도 없고 이미 딸도 가버린다 하고.... 그랬을 테죠. 시간이 꽤 흘러 오늘, 그이와 엄마가 나란히 쌍둥이들을 앉고 나를 등져 둘이서 뭐라 주고받는 대화가 들리진 않았지만요. 뒤돌아선 그 등들이 이상하게 나를 애틋하게 자극시켰습니다. 문득 엄마를 뒤에서 껴안고 싶어 졌지만 전 말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이렇게 신세만 지는 모지리라 당신을 커다랗게 감싸 안아줄 자신이 없기 때문인가 봐요.


 그래도 엄마. 믿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도 오늘처럼 간혹 오는 걸 테죠.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아픔도 사랑도 먼 것 같은 추억이 되는 법이겠죠
또 사라지는 먼지처럼 조금은 가벼워지는 날이 올 거라는 부질없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니 엄마. 그때 '염병할 년'이란 말속에  담긴 아픔, 몰라줘서 미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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