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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2. 2018

도망치고 싶어요. 자꾸만..

어쩔 줄 모르겠을 땐, 어떻게 해야 좋죠.  

편지 열) 도망치고 싶어요. 그러나 도망치지 않아요. 이럴 땐 어쩌면 좋죠.. 엄마


 '엄마, 나 도망치고 싶어' 라고 넌지시 마음을 흘렸던 때가 많았죠.

사실 노골적으로 그 말을 달고 살기도 했었고요. 마음에 각인이 되지 않으면 역시 선명해지는 건 쉽지 않은 법인데.  엄마. 그래서 어느새 내겐 '도망'이라는 단어가 뚜렷하게 새겨졌나 봅니다. 여전히 이렇게 내뱉는 말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예요.


 명절 전 증후군이라는 게 이런 걸까요.

 여태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생각했어요. 순탄치 못한 일상이 다가왔어도 감정을 받아들이고 차분해지는 연습도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고요. 그러나 어느새 깡그리 무너지네요. 이렇게 와르르. 역시나 기대에 어긋나지도 않아요. 이 지긋지긋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할 때. 그리고 다가와 결국 나를 집어삼켜 먹은 그 이후의 후폭풍이란..


 지난 주말에도 전 입 밖으로 그 '금기어'를 내뱉고 말았어요.


도망치고 싶어. 정말.. 지긋지긋해


 아이 보는게 힘에 부치더군요. 요즘은 사실 내내 그래요. 평일은 오히려 편하죠. 회사라는 공간으로 잠시 벗어날 수 있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이게 현실인 걸 어쩔까요. 주말이 더 피곤해요. 쉬는 건 가당찮죠. 엄마가 오셔서 몇 시간 아이들을 봐 주시기라도 하는 저번 주말같아야, 그제서야 1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죠.


 이런 상황이니 하물며 완벽히 제가 소비하는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 내려 하는 건 사실 사치예요. 욕심일테고요. 엄마가 된 이후에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봐요.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 시간은 사치이나 그럼에도 만들려 노력해도 쉽게 얻어지지 못하는 상황에 참다가도 가끔 이렇게 화가 나나봐요. 남들은 말하죠. 신랑에게 맡기고 나가버리라고. 그치만 그것도 정도껏이죠. 더군다나 이 성격머리는 그러지도 못한다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죠. 그러니 직접 집으로 와서 제 구미에 맞게 몇 시간의 '자는 시간' 정도를 선물해 주시는. 당신의 배려는 역시 타인들의 서툰 말에 비하면 백배는 더 감사한 것이였어요..


 남편에게 맡겨만 두기엔 우린 쌍둥이라서..그것도 쉽지 않죠. '둘'이라는 강박이 언제나 있나봐요. 거실 바닥 이곳 저곳에 떨어진 아이들이 흘린 밥풀들과 반찬을 허리를 숙여서 걸레질을 해 대다가 문득 눈물이 날 뻔 했어요. 참았죠.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더더욱 마음이 저려 왔지만. 우는 대신 웃었죠. 별 수 있겠어요. 다만 랑스러운 아이 둘 앞에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라는 죄책감과 동시에  아이 둘에게서. 아니 이 집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설거지대로 가서 그냥 멍하니 서 있었어요. 넷이 같이 있지만 철저히 혼자인 느낌이 든 건 왜였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전 그런가봐요. 아직까지도. 엄마이고 싶지 않아요. 엄마. 난 혼자 살아야 됬나봐요. 이런 성격이면 더더욱... 바보 같죠. 내가 선택했는데. 감당하지도 못할 선택을 뒤늦게 후회하는 걸까요.


막상 혼자 있게 되도, 정작 뭘 할 지 몰라서 갈피를 못 잡았었는데. 그렇게 바보예요 아직까지도..


 무심결에 중얼거리던 제 속말을 그이가 들었나 봐요. 딴 때 같음 왜 또 그러냐고 약간의 핀잔을 줬겠지만 어제는 그냥 흘리더라고요. 이젠 이해를 하게 되었나 봐요. 그가 내게 대꾸 없이 다만 '힘들지'라는 말 한마디로 그 나름의 위로를 건넨 걸 보면. 예전엔 그 위로의 말 조차 없이 그러지 말라며 찡그리기만 했던 그가 원망스러웠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젠 찡그림 보다는 약간의 동조와 응원을 건네죠. 그렇지만 '약간' 이요. 엄마. 완전하게 위로받거나 따뜻한 응원을 받는다는 건 아직 그에게서 느끼지 못해요. 왜 그럴까요. 다만 그 '도망치고 싶다'는 그 순간의 감정이 더 커다란 암흑 같아서. 그의 담담한 동조는 씨알도 안 먹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혼자 살 걸 그랬나 봐요. 아니 여자로 태어나지 말걸.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성을 가져서 결혼을 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이제 와서 이런 말 해서 힘만 빠지지 무슨 소용이에요. 그래서 말 안 하고 살다가도 가끔 이럴 때 말을 하게 돼요 엄마.


현실에 맞추어 나가 보다 보니 어느새 탁월하게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원하지 않은 시간과 행동들. 그러나 해야만 하는 것들.. 그래야 살아지는 것..


엄마도 도망치고 싶었을까요. 엄마도 그랬죠. 분명 그랬을 거야...

 연년생 애새끼 둘은 빽빽 울어대고. 육아는 해야 되겠고. 무뚝뚝한 신랑은 말 한마디 곱게 해 주지 않은 그 와중에 죽은 망자들을 위한 제사상을 보느라. 세뱃돈도 줘야 하는데. 누가 내게는 그럴싸한 예쁜 봉투에 용돈 담아 주는 받는 즐거움을 느끼기 이전에 언제나 줘야 하고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의 뭐랄까. 외로움과 공허함. 억지스러운 분노와 서글픔.... 미안해요 엄마. 제가 오늘 그 감정을 느꼈나봐요. 조카들 세뱃돈을 챙기고 시댁 부모님의 용돈을 준비하려 은행에 가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선뜻 발이 떠나질 않았어요.


 엄마는 어떻게 견뎌냈어요? 제사 음식 만드는 게 당신에겐 대수롭진 않다는 거 알아요. 오히려 당신을 힘들게 만든 건 그 전후로 장보기를 준비하는 것들. 그리고 명절 걱정을 해야 하는 그 마음이 그 현실이. 가끔 저는 참담해요.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왜 힘들어야 하는 건지. 누구에게 좋고 기쁘고 쉬고 싶은 명절이 누구에겐 왜 전혀 반대의 시간들이 돼야 하는지를.


바라봄이 틀려서 그런걸까요. 엄마. 시선이 틀리면 같아도 다른 곳을 바라보게 되는 것 처럼요. 둘이어도 혼자 보는 것 같은 것..


 여자로서의 페널티를 당신만큼 경험해본 적이 아직도 별로 없는 제가, 이런 말을 하다니. 좀 우습기도 하죠.  

 당신과는 달리, 부모의 보호 아래 학교라는 걸 잘 다녔죠. 그 안에 있었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턱이 있겠어요. 다만 나의 세상 간접 체험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어른들의 오고 가는 이야기가 전부였으니. 스스로의 의식이 뚜렷해져 갈 때 쯔음엔 그저 내면의 무의식 안에 떠도는 여성성의 억압이 있긴 했지만. 당신에 비해선 그것이 저를 현실적으로 제압하거나 제약이 된 적은 없었어요. 결혼을 하기 전까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아이 낳고 보니 소름 끼치게 알아챈 것들이 있어요.
여자로 엄마로 붙박여야 하는 시간들..



엄마는 인내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지만. 엄마 저는 때로 그게 안돼요. 고장이 나요. 그것도 참 자주.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손목이 너무 아픈데. 아이는 울어대고. 근데 보기는 또 너무 싫어져요. 하고 싶은 게 있지만 할 수가 없어요. 정말 내 시간이 없을 때.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엄마 지긋지긋하지 않았어요? 내가 덜컥 생겨 버린 것도 비극이었을 텐데, 그런 당신에게 연년생 남동생마저 생겼을 때. 엄마는 낙태를 원했으나 그것 마저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채 그냥 아이를 낳았다면서요. 동생 없애면 후회할 테니, 내가 키워줄 테니 일단 낳고 보자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낳았죠. 그리고 결국 그 아이를 키우는 건 고스란히 당신의 몫이 되었겠고요.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면 엄마... 그만한 고통이 또 어디 있어요.
자기의 불행과 외로움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이에요.  



"왜 꼭 지금 해야 해. 나중에 쓰면 안 되니?"
"엄마는 나중에 해서 후회한 거 없어? 지금 아니면 안 돼.... 나 너무 답답해요. 진짜 도망갈 거 같아.."


엄마도 어쩌면 격리되고 고립된 사회에서 다만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순응하며 사셨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아이를 키우는 이 와중에. 정말 시간이 부족하고 체력 하나 더 딸리는 이 와중에. 새벽같이 읽고 쓰고. 일을 하고 쉬려고 안 하고 또 뭔가의 일을 벌이려 궁리하는. 이런 제가 절대 이해할 수 없으셨겠죠. 그러니 그런 말을 종종하시겠고요. 내 뱃속에서 태어난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엄마. 고통을 발산해 내는 최선의 방법을 저는 나름대로 찾은 걸요. 이럴 수밖에 없어요. 특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면 더더욱.


 결혼과 출산, 육아에 있어 여성은 많은 부분 소외당하는 사람이잖아요.

 엄마도 소외받았잖아요. 아무도 몰라줬잖아요. 아니 그냥 이게 다 해야 하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받았잖아요. 전담마크를 해야 하는 육아라는 상황에 철저하게 격리되고 철저하게 정형화된 이미지로만 존재해요. 그 안에서 그렇게 고립되가요. 엄마들은 엄마들만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 세계와 쉽게 만나지도 못하죠.


스스로 구원하며 생의 선물을 줘야 한다면.
도망치고 싶은 이 가짜 같은 삶을 진짜 제 것으로 만들어 보고 싶나 봐요.



도망치고 싶다고. 나 좋다고 달려오는 남자 친구라도 부디 생겨주기를.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같은 여자들끼리도 사실은 말하지 못하잖아요. 나라는 사람이 괴물처럼 보일까 봐. 그렇잖아요. 엄마는 철저히 아이를 위해 보내는 시간에 충실해야 하고 내 시간을 충분히 제멋대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건 사람들의 침묵이 있을지언정 그 기저엔 냉소와 비판과 따가움이 서리곤 하죠. 아이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라고. 결국 그래야 하는 거라고. 사실 제가 스스로 여전히 이 말을 하며 검열하고 있나봐요. 가족들이 첫 번째라고 마냥 바라고 느껴야 살아진다는 걸. 어느 정도 인정하고 동조하나봐요. 그러면서 그 안에서 그 할 일들을 최대로 해내다가도 문득 불행하다고 느끼면. 오늘같은 날은. 그래서 이런가봐요.


 사실은 다들 말하지 않잖아요. 말하길 꺼려 하죠.  때로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

 농담삼아 웃으며 말했던 어떤 지인이 생각 나네요. 그는 결국 벗어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농담으로 이야기 해냈지만, 그 웃음이 꽤 진지했어요..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니 웃더군요. 그렇게 사는 걸테죠. 다만 보이지 않는 속내와 어둠을 감추며 살 뿐.


 당신은 어땠을까요. 나는 엄마니까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이 따지고 보면 이 시대에는 얼마나 될까요.


알고 있어요. 다들 굉장히 괴롭고 불안해도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다만 안간힘을 다해 자기 최면을 걸며 살고 있잖아요.



엄마. 전 요새 되게 솔직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말도 가능한가봐요.

 도망치고 싶다고 대 놓고 말하는 걸 보니. 여전히 솔직한 건 어디 가지 않나 봐요. 나의 불완전함을, 나약한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도리어 제게 어마한 페널티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이제 그걸 발화해 내는 두려운 마음보단, 이 감정이 더 무서운걸요. '도망치고 싶다'는 이 마음이 계속 자리한다는 것 말이죠. 그래서 이런가 봐요. 자기 검열 따위 던져 버리고 스스로 감내해 낼 수 있다면 이 무한한 고통과 우울감도 그저 만끽하다가 지나가는 걸 봐 보자고. 어디까지 가 보나.. 싶은 심보 일지 모르겠어요.


막상 혼자 남게 되도 핸드폰을 쳐다봐요. 뭔가를 그리워 하는 게 습관이 되버린 걸까요. 아직 단단치 못한 걸테죠.


  가사 노동과 양육 노동의 덧없음과 무의미함 같은 것들을 남자들이 알 리가 있을까요.

  아니 남자든 여자든. 내 시간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자유라는 것에서 배제 당하고, 육아라는 행복한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 알리가 있을까요... 엄마. 그 숱한 보이지 않는 노동 속에서 가정들이 겨우 겨우 유지되고 있는 거잖아요. 당신이 그랬듯이.... 당신의 개성과 시간과 당신의 삶의 희생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아이 같은 대담함으로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아 보라고 말하고 있는 저 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안타까운 건요. '제사 안 지낼래' '너희들 이제 엄마한테 연락하지 마'라고 말해도 당신의 그 발언이 과연 씨알이 먹힐까.. 또 아이러니 하나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여태껏 몇십 년 동안 줄곧 유지한 것을 아버지는 절대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 과감히 떄려치우고자 하는 용기 어린 선언을 하진 않으실 거라는 걸. 알아서 더 서글픈가 봅니다.

                                                                                                                                                                               제가 그만 쓴다고 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지도 않겠지만. 반대로 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거예요. 여전히 오늘 평일 저녁 2시간의 시간을 낸다는 건 제게 불가능에 가깝고. 정시 퇴근을 눈치껏 마치고 부랴부랴 어린이집에 가겠죠. 저를 맞이하는 사랑스러운 아이 둘을 위안삼아, 씻기고 먹이고 재우기까지. 아가들이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을 여전히 어제처럼 잘 해낼 거예요. 그리고 잠든 이후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제 마음을 다독여 낼 준비를 하겠죠.


많이 도망치고 싶은 날엔 이렇게라도 써야겠어요.
 엄마.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답을 찾지 못한 채 이렇게 흘러가 보는 날

보고 싶어 집니다. 누구라도 이 속을 터 놓을 수 있는 이를.


 엄마도 그랬을까요. 부디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곁에 명이라도 있어 주기를.

그 한 명이 저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테고요... 이 마음은 도대체 언제 사그라들까요. 언제쯤이면 편해질까요. 정말 도망치고 싶은 날엔... 그래서 많이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매만지고 결국 전화를 할 제가 보여요. 결국 안부를 물으며 다만 목소리를 들을 뿐이겠지만.


전화 할께요. 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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