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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10. 2018

더 예민하게 살아보려고

'독'이었던 예민함이 '약'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편지 일곱) 예민함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원해요 


예민함도 소중한 마음이라며 기꺼이 환대할 용기를 갖고 싶은가 봅니다. 





예민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민한 '덕분'에 보이는 세상이 있습니다. 

엄마. 올봄 출간됬었던 제 두 번째 책 끄트머리엔 이 말이 적혀 있습니다. 중간 정도 읽다가 괜스레 마음 아파서 덮어버리셨다던 에세이의 에필로그 내용 중 한 단락이에요.  


넉살 좋음을 가장한 채 타인을 대하는 무례하고 냉혹한 시선. 애매한 희롱으로 상냥한 듯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절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더욱 멈추지 않아볼 작정이다. 지금의 모든 것들을. 죽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에서 최선을 해 볼 뿐이다. 이젠 더 이상 잃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 오늘의 이름이 나였으면 좋겠어, p. 320 - 



예민하고 아팠었던 과거의 기억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 제게 '때문'이 아니라 '덕분'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었으니 감사할 수밖에요. 그렇지만 역시 날 선 예민함으로 인해 다가온 나쁜 기억은 되도록 지우고 싶은가 봅니다. 상처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라는 당신의 문장 속 주인공이 설마 정말 될 줄은 몰랐던 거죠. 


그 전엔 알 턱이 있겠어요.
겪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미리 알 수는 없는 법이죠. 



정신과를 몇 번이고 망설이다 찾아갔었습니다.

유산의 잦은 반복, 시댁과의 대화 트러블. 살 부딪히며 살다 보니 그제야 알게 되는 생활 속 작고 큰 가치관 충돌의 연속들. 축복처럼 다가온 쌍둥이였음에도 그 뭉클했던 출산의 고마움은 온 데 간데 없어졌고요. 거짓말 조금 보태어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이 생지옥 같기만 했었던 신생아 다둥이 육아의 시간들은 제 예민함의 피크를 찍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연속으로 1시간을 채 자지 못하는 생활을 무려 반년 정도를 지속해 가다 보니 정말 가관이더라고요. 

제 스스로 괴물이 되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매일 같았으니까요. 책과 음악을 좋아했던, 타인들 앞에서도 밝게 조잘조잘 말하기를 좋아했던 생기 넘치는 여자는 이미 그때 한번 죽고 없어졌던 것 같아요. 살아있는 시체, 그 어디쯤. 뭐 과장하자면 그런 정도였으니까요. 


아기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끊임없이 들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음식을 먹고 나면 자주 토하기도 했고요. 쌍둥이 신생아 육아가 그 정도의 무게와 스케일로 초반부터 쓰나미같이 다가오더군요. 회사로 매일 출근하는 그이를 몹시 질투하기도 했었으니 말입니다. 야근으로 인한 피로가 쌓이는 것과 육아로 인한 수면 부족에 힘겨워하는 것. 둘 중에 분명 후자가 더 물리적으론 고통스러울 거라고. 전자는 끝이 있지만 후자는 끝이 정말 보이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자식 키우는 시간이 숭고한 시간이라 한들 철저히 개인이기도 한 부모들의 마음이 마냥 행복하고 기쁘고 좋은 건 분명 아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병원이라는 기관의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것들이 이상하게도 제겐 썩 도움이 되지도 않았어요. 결국 몇 시간의 상담과 처방받은 약에 손을 데지는 않았습니다. 그걸 먹으면 되려 더 이상해질 것도 같았거든요. 바보 같죠. 대신 혼자 숨어서 책을 읽거나 일기장에 글을 난도질 해 가듯 하염없이 아무 텍스트나 적어내거나. 오히려 이런 소위 은둔형 셀프 치료(?) 가 날 선 감정으로부터 어딘지 모를 홀가분함을 느끼게 해 주었어요. 다행히 약간의 견딜 수 있는 도구를 스스로 찾았다고나 할까요. 여하튼 위태로운 날들을 그렇게 온전히 혼자 삭혀내며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감추며 지냈었습니다. 


잠 드는 게 약 같기도 했고.. 그만큼 편하게 잘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은 정말 모르셨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모른 척해 주셨을까요.

당시엔 전자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요즘은 문득 후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합니다. 부모 된 이들의 깊은 속을, 누군가들의 부모가 되었으나 여전히 당신의 자식이기도 한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 싶어요...



송두리째 삶이 바뀌는 건 어쩌면 한순간 일지도 몰라요. 


가끔 육아로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글이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모르게 감정을 되살리게 됩니다. 제가 유독 예민하게 신생아 성장통을 둥이들과 함께 겪어서(?) 였을까요. 날 선 시선일 수 있으나 단언컨대 아이가 있고 없고의 세계와 단태아와 다태아의 삶은 분명 다르다고 여전히 그이 앞에서 볼멘 핑계를 댑니다. 또한 가난하거나 부유한 곳에서 태어난 아이들. 혹은 외벌이와 맞벌이 또한 다른 세계일 거라고. 여전히 이런 쓸데없는 투정을 해요. 저 참 못났죠.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인정하고 살면서도 때론 그 불공평함에 분노를 느끼니 말입니다. 힘이 모자라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이렇게 예민한 발언을 쓸데없이 이곳저곳 잘도 해대는 것 외엔 딱히 없는데 말입니다. 


방임받고 학대당하며 여전히 오늘이 아프고 다쳐질 아이들을 안다. 참혹하고 냉정한 현실에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면서도 생의 구질구질한 집착에 접착제처럼 붙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목놓아 혼자 웅크린 채 길바닥에서 울고 불고 생지랄 부렸던 날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래서다. 경제활동을 하며 자산을 모으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며 나만의 집필 노동과 기부를 꾸역꾸역 해 나가는 이유는. 모순적이나 쓰면서 살려면 안정적인 경제상태와 글쓰기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니 그것을 위해 10년이 넘도록 일터를 떠나지 않는 것도 다 이런저런 나를 향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 오늘의 이름이 나였으면 좋겠어, p. 321 에필로그 중 - 

 

오늘따라 책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네요. (미안) 

이 책의 저 문장이 나온 계기는 사실 엉뚱한 이유가 반은 섞여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으실 테지만요. 글쓰기로 셀프 치유와 마음 챙김을 하려는 이기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글쓰기 자체를 해 나가면서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어떤 기억 때문에, 기회가 생긴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전하고도 싶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쓰고 있는 마음과, 그 이야기를 읽어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고요. 



같은 이야기로 연결된 인연들은 고맙고, 그만큼 근사해요. 그래서 계속 기대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한 연결됨을..



아파트 옥상에서 두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엄마.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사실 저. 산후우울증이 심해질 무렵, 머리가 홱 돌아 버렸었는지 새벽에 쌍둥이들 잠든 틈타서 쪽잠 자고 있는 당신 몰래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었습니다. 정말 뭐에 정신없이 홀린 듯 말이죠. 근데 거기서 두 아이들을 만났어요. 


맞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로부터. 

한 명은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였고 또 한 명은 여동생으로 보이는 한 5,6세 정도였을까. 아무튼 어렸어요. 둘 다. 근데 맞고 있었다니까요. 남자아이가 여자 아이를 감싸고 있었고요. 그는 친부 아니면 계부? 아니면 어떤... 정체가 누구건 분명 그는 악마였어요. 그렇잖아요. 악마가 별거던가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처참하게 붕괴시키고 파괴시키는 게 바로 악마 아니던가요. 멀지 않은 곳곳에 숨어 있다니까요. 그런 악마의 존재들이. 옥상에서 왜? 집은 어디? 그런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면서도 사실 저는 비겁했습니다.


도망쳤었습니다. 

죽으려고 올라갔는데 되려 너무 무서워서. 바보 같이 도망쳤단 말이에요. 그 아이들은 분명 구원자를 원했을 텐데. 단 한명만이라도 그 아이들 대신 소리라도 대신 쳐 주었다면... 근데 저 그러질 못했습니다. 누군가 나서면 그때만 쉬쉬할 뿐, 그 이후엔 괜한 악감정에 더 맞지는 않을까 혼자 정신없이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요. 사실 그 장면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었고 무서워서, 결국 겁쟁이처럼 도망쳤었다니까요.


웅크리고 있던 아이들 옆에서 제 낌새를 보았는지 그 남자는 발로 아이들을 툭툭 차면서 욕을 하며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정말 못난 저였어요. 그 아이들이.. 문득 떠오릅니다. 요즘 같이 아동 학대 사건사고들을 더 잦게 들릴 무렵이면 언제나... 그 장면이 말이죠. 


되려 죽으려 올라가던 저를 살렸던.... 거였어요. 엄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나요. 끔찍하죠.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때로 세상은 정말 이렇게 잔인합니다. 그래도 도망친 이후에 걱정이 돼서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요. 그렇지만 그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아이들... 삶이 붕괴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에게 처참히 고통받으며 쥐 죽은 듯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감추며 살고 있을까요. 살아있는 시체처럼..


삶은 이미 산산히 조각났을 지도 모르잖아요. 매맞았던 그 아이들...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에서 아파할 어떤 생명들...


엄마. 전 어쩌면 그 이후부터 더 예민해진 거 같아요.

예전의 예민함이 '나'만의 위한 무언의 억울함들로 인해 타인을 향한 온갖 날카로운 시선만 가득했다면요. 그 시간을 지나고 저는 어느새 조금씩 썩은 감정은 누그러지며 대신 너그럽게 변하기도 했고요. (격세지감입니다 요즘...) 다만 바뀐 게 있다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예민한 관점을 더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사각지대 속 은폐되고 폐기되는 어떤 마음들에 대한 예민함


예컨대 육아를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말 못 할 사연의 양육자들이 있을 테고요. (엄마든 아빠든 편부모든 미혼모든 경계는 없어요) 제가 본 소스라치게 놀라웠던 그 학대의 현장은 이미 이전에도 있었고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는 무언의 예민한 생각들. 특히 약자의 범주에 드는 여성장애인권이나 아동인권이 파괴되는 순간들. 저는 이런 또 다른 세계를 이젠 방관하고 싶진 않은가 봅니다. 오지랖이라면 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누가 그러더군요. 피곤하게 산다고... 네. 그럴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있기에 이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삶 또한 이런 마음에 한몫했다는 핑계를 더해 보기도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마음이 있는 만큼 어떤 진실이나 진심에 다가가려 애쓰는 것처럼.



최근에 제 예민함으로 인해 올린 어떤 짧은 글 하나가, 조회수 30만을 훌쩍 넘기더라고요.


https://brunch.co.kr/@heaven/200


다행(?) 스럽게도 이 이야기를 카카오 어딘가로 노출시켜 주셨거나 혹은 우연한 어떤 계기가 있었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런 비겁하고 억울한 사건들이 되도록 아이들 세계에서 덜 일어나기를 바라는 절실한 무언의 감정이 증폭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당신께 미리 고백해 봅니다. 늘 제게 '아이들 잘 키우며 제발 좀 이젠 일 벌이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입에 종종 달고 사시지만. 그런 당신께 미리 사죄드려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어떤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는데 그 제품을 기획/개발/완성시켜 내고 싶은 무언의 절실함으로 현재 소셜 임팩트 공모전에 도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상상만 하고 관심만 앞섰던 '체인지 메이커'의 활동을 이젠 그럴싸한 말이나 마음이 아닌, 행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성공보단 뚜렷한 실패를 예상하지만 이젠 움직임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선한 인연들과의 연결을 꿈꾸며, 다만 움직이고 있는 이 예민한 활동에 감사한 요즘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적으론 뭐에 또 그리 마음이 예민하게 흔들렸었는지. 퇴근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이 앞에서 눈물을 터뜨려 버렸습니다. 그 소셜 펀딩 아이템 제안서의 스토리들과, 타 밀린 원고 작업들과 회사에서의 퇴사 의욕(?)에 가속도가 붙은 사내 사소한 갈등들과 늘 반복되는 여전한 육아의 연속들..(더하기 그토록 바라던 위클리 매거진 이건만 이 글들을 매주 예약 발행해야 하는 일종의 즐거운 압박까지도!)  


버거웠나 봅니다. 저도 사람이라.... 열망을 꿈꾸며 움직이지만 과부하였던 걸까요. 그렇지만 엄마. 이번 생을 대하는 이런 저의 예민 함들에 이제 지지 않고 오히려 반격하듯 활용해 보고 싶기도 합니다. 모든 경험이 제겐 글감이 될 테고 이런 활동들도 훗날 모두 스토리가 될 테니까요. 


예민한 사람이 되기를 머뭇거리지 않고 싶은가 봅니다. 

저의 아이들도 부디 세상을 살아가며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사실 듭니다. 사실 예민하게 따지고 드는 걸로 보이는 저 같은 캐릭터들은 소위 당신 말대로 정말 피곤하게 사는 종족일 수 있겠죠. 그치만요. 다들 그냥 쉬쉬하거나 눈감고 내 일 아니니 넘어가는 것을 누구 하나 안 따지고 들면요. 이상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 이상해지는 세상이 될지도 모를 테니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된, 후천적으로 길러진 제 이 성정을 계속 사랑하며 한번 살아내 볼까 합니다. 부디 이 예민함이 엄마, 딸, 동료, 아내, 그리고 '나'의 삶에서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가 더 많이 되기를 바라고요. 그 마음을 당신은 알아채셨던 걸까요. 돌려서 걱정해 주시는 걸 보면 말이죠. 


"너도 니 실속 챙기면서 살아. 이 예민한 것아." 
"응. 엄마." 
"뭔 일 있음 말해. 혼자 삭히지 말고."
 ".... 고마워. 고마워요. 말해줘서"
"됐다. 쉬어라."


예민해진다 한들 오늘 당신과 주고받은 이 짧은 톡 대화가 결국엔 삶의 결론이라는 것을 알 것도 같은 오늘입니다.


 결국 예민함 속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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