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편지
마음과의 대화
넌 지금 외롭구나.
언제쯤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마음 편해질까.
마음을 편히 먹으라고 아무리 내게 말해준 들, 그건 그들이 내 입장이 돼 보지 않고서야 그저 가볍게 건드려 주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 밖엔 안 들려.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욕구.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그 기본적인 행위 조차, 아이 '둘'이 태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 알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다지만, 그럼에도 지쳐만 가.. 이런 피폐한 삶이 언제나 끝날까? 난 정말 나쁜 엄마 같아..갖 태어난 아기들의 존재가 너무 무겁고 버거워
진정해
네 감정에 너무 빠져 들지 마. 다시 말하지만 그건 네 것이 아닐 수 있어. 가짜일 수 있어. 충분히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걸 알고 있지만, 또한 상황이 지금의 너를, 너의 감정을 왜곡 시켜 만들고 있단 걸 알아. 진정하고 단지 지나가는 감정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지켜봐.
생명이 소중하단 걸 알잖아. 떠나보냈을 때를 겪어본 너이기 때문에 더더욱 절실히 알잖아. 그 사실을 기억해
사람들 대게는 자신의 진짜와 가짜 감정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슬픔이, 화가, 외로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본 일이 없기 때문이야. 그 마음을 하루 정도만 그저 지켜보는 연습을 해봐.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마치 널뛰듯이 뛰어 다니는 그 생각들 있잖아. 그 끊임없는 지껄임은 너무나 미친 듯 해서 마치 불안증 환자 같이 말씨름이 하염 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곤 하니깐…
지금의 어두운 그 감정과 이별할 용기가 네게는 있음을 기억해줘
가짜 감정
최근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접했다. 가짜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강제된 사람들이 그 자기 강제된 감정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였다. 슬픔을 화로 표현하는 사람, 화를 내야 하는데 우는 사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 자체에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가짜 감정에 중독된 상태'에 빠진다고 프로그램은 말하고 있었다.
마음의 통속극에 빠져들었었다.
그 때 내가 딱 그랬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무엇이 나의 감정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삶이 비극 그 자체였었던 시간이 있었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도 전이었다. 수술을 한번 두 번 이어 나갈 때마다 점점 그 상황에 넋을 빼앗기곤 했다. 그럼에도 일상 생활은 유지해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으니깐. 감정이란 게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무섭다. 어느새 내면을 갉아 먹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무거운 역할극
다시 기적처럼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쌍둥이. 두 번 이별했던 아이들이 다시 동시에 찾아오는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도 잠시였다. 출산 후 약 1년 간의 시간이 너무 힘들어서 행복한 기억이 사실 그다지 없다.
사람이란 극한의 피로와 원치 않는 시간의 반복을 일삼다 보면 정말 미칠 수 있다. 갖 태어난 두 어린 아기와 함께 했던 1년이라는 시간 덕에 짧지만 나는 절절하게 온 몸과 정신으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의 시험을 행하는 듯 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향한 내면의 욕구와 욕망이 모두 막혀버리는 느낌이었으니깐. 알 수 없는 환청에 시달리고 불면증이 반년 이상 지속되는 삶은 내겐 자연스러운 그것이었다.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채로 아이를 낳아서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은 순탄할 수 없다. 특히나 엄마들 중에서는 '독박 육아’를 경험해 가면서 점점 감정이 마모되어 가서 소위 산후 우울증에 걸리는 현상을 우리는 주위에서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 마모된 내면의 자아는 '슬픔, 분노, 화'라는 내 것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감정이 쌓여만 가고 때때론 폭발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감정과 분리 시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연습을 우리들은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슬픔과 이별하는 용기
‘왜 하필 두 명 이야, 한 명도 힘들 다고하는데…기쁨이 두 배 일거라는 얇잖은 위로 따위 제발 그만좀 해줬음 좋겠어. 그들이 내 대신에 마주해야 할 고통과 무게를 알 턱이 있을까. 누가 알겠어….’
지금 꺼내어 생각하니 잘 커주고 있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그럼에도 사실 그 시절의 나도 나였음을 인정한다. 사실 육아를 시작하면서는 그 극한의 시간들을 인내하며 버텨내야 했기에, 오히려 내 안에서 나를 가둬둔 채 깊게 빠져들어만 가는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욕심 충만한 나의 자아는 바랐던 것 같다. 사실은 나라는 사람이 온전히 건강하기를. 하루 24시간 중에 깨어 있는 시간 동안은 부디 행복하기를 말이다.
어쩌면 화를 내고 슬퍼하고 감정에 빠져 들면서도 나의 무의식은,
끝이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지 모른다.
마음 성장을 시작할 준비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나를 괴롭혔던, 지금은 과거가 되어 버린 그 시간들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통속적인 멘트에 맞장구 치듯, 정말 시간이 지나니 감정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실 잊혀진 감정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그건 잊히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담긴 채 꺼내보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또한 고통의 순간이라 표현한 그 시간들도 겪다 보니 어느새 군살이 붙었는지 익숙해지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그때 나의 어떤 부분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까’라는 질문이 되려 나를 찾아온다.
이런 생각의 시작이 어쩌면 내 마음을 한층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일 지 모른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들이 겪는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BGM이 울려 퍼진다.
남들보다 배 이상을 고생할 수 밖에 없는, 겪어본 이들이 아니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지 모르는 쌍둥이 육아의 현실, 이해도 사랑도 받지 못하는 결혼 생활이라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가짜 감정과 가짜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처절하고 슬픈 연극을 하고 있는 무대의 여주인공인 마냥,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삶의 통속극 속의 나였다. 그런 나를 빼내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저 내 존재의 어떤 부분이 실제로 있고 또 없는 지를 끊임없이 탐색해 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생존 본능'덕분일 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미안해 아가.
하고 싶은 더 중요한 일들이 있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건 시간 낭비야.
이게 다 뭔 짓이란 말이야
혼자 마음이 지껄이는 이런 터무니 없는 생각들을 침묵 시켜보겠다는 나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지껄임은 도통 처음엔 절대 협조하려 들지 않을 지 모른다.
난 그걸 좋아해. 근데 저거 때문에 못해. 저건 싫어. 그러나 할 수 밖에 없어‘
멈추려고 해도 여전히 마음은 나를 향해 끊임 없이 지껄여댄다. 그리고 이게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이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과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서 자기가 마치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일 지 모른다.
나를, 나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각오
각오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또한 결국내 마음이 말하는 지껄임 일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 빠지려는 나를 구해내기 위해서 스스로 시간을 내서 하는 수행법. 내게는 그게 다행히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시간을 낼 수 있게 될 무렵부터는 아이들을 재우고 조금씩 스스로의 여유를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스스로 마음과 이성적인 대화를 해 나갔다. 겉으로 보면 조금은 우스울 수 있는 마치 머리에 꽃을 단 어떤 미친 여자가 길을 지나가며 읊조리는 것과 같은 모습일 지 모르겠다만, 그럼에도 한 꽤 치열한 연습을 거듭해 나갔다. 사실 마음으로부터 나를 좀 멀찍이 떼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즈음에 시작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우리들은 어쩌면 개인의 삶에서 정신이 가장 맑고 온전할 때 삶의 목표를 정하고 마음이 변덕으로 그것을 훼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을 지 모른다. 그것이야 말로 어떠면 ‘지금 이 순간을 산다’라고 하는 것의 실천일 지 모르고 말이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당신의 삶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하라’고. 어렵지만 사실 진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러하니깐.
지금 어떤 순간, 당신도 한 때의 나처럼 만약 곤경에 처해서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면, 진짜 당신의 내면, 바라는 그것을 되찾아 오시기를 응원해 본다.
삶은 단 한번뿐이니깐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당신의,
우리들의 소중한 단 한번의 삶이니깐..
그리고 이제 세 번째 편지가 시작된다. 그건 아주 미세하게나마 변화를 시작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