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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08. 2017

#2. 가짜감정에 이별을 말할 용기

두번째 편지


마음과의 대화 


넌 지금 외롭구나.
언제쯤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마음 편해질까.
마음을 편히 먹으라고 아무리 내게 말해준 들, 그건 그들이 내 입장이 돼 보지 않고서야 그저 가볍게 건드려 주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 밖엔 안 들려.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욕구.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그 기본적인 행위 조차, 아이 '둘'이 태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 알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다지만, 그럼에도 지쳐만 가.. 이런 피폐한 삶이 언제나 끝날까? 난 정말 나쁜 엄마 같아..갖 태어난 아기들의 존재가 너무 무겁고 버거워  
진정해
네 감정에 너무 빠져 들지 마. 다시 말하지만 그건 네 것이 아닐 수 있어. 가짜일 수 있어. 충분히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걸 알고 있지만, 또한 상황이 지금의 너를, 너의 감정을 왜곡 시켜 만들고 있단 걸 알아. 진정하고 단지 지나가는 감정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지켜봐.  

생명이 소중하단 걸 알잖아. 떠나보냈을 때를 겪어본 너이기 때문에 더더욱 절실히 알잖아. 그 사실을 기억해  

사람들 대게는 자신의 진짜와 가짜 감정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슬픔이, 화가, 외로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본 일이 없기 때문이야. 그 마음을 하루 정도만 그저 지켜보는 연습을 해봐.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마치 널뛰듯이 뛰어 다니는 그 생각들 있잖아. 그 끊임없는 지껄임은 너무나 미친 듯 해서 마치 불안증 환자 같이 말씨름이 하염 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곤 하니깐…  

지금의 어두운 그 감정과 이별할 용기가 네게는 있음을 기억해줘  


가짜 감정   

 최근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접했다. 가짜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강제된 사람들이 그 자기 강제된 감정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였다. 슬픔을 화로 표현하는 사람, 화를 내야 하는데 우는 사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 자체에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가짜 감정에 중독된 상태'에 빠진다고 프로그램은 말하고 있었다.   


마음의 통속극에 빠져들었었다.   

 그 때 내가 딱 그랬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무엇이 나의 감정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삶이 비극 그 자체였었던 시간이 있었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도 전이었다. 수술을 한번 두 번 이어 나갈 때마다 점점 그 상황에 넋을 빼앗기곤 했다. 그럼에도 일상 생활은 유지해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으니깐. 감정이란 게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무섭다. 어느새 내면을 갉아 먹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기 시작한 순간 마음의 굴레에 갇혀 버리게 되는 셈이지..


엄마라는 무거운 역할극   

 다시 기적처럼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쌍둥이. 두 번 이별했던 아이들이 다시 동시에 찾아오는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도 잠시였다. 출산 후 약 1년 간의 시간이 너무 힘들어서 행복한 기억이 사실 그다지 없다.


 사람이란 극한의 피로와 원치 않는 시간의 반복을 일삼다 보면 정말 미칠 수 있다. 갖 태어난 두 어린 아기와 함께 했던 1년이라는 시간 덕에 짧지만 나는 절절하게 온 몸과 정신으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의 시험을 행하는 듯 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향한 내면의 욕구와 욕망이 모두 막혀버리는 느낌이었으니깐. 알 수 없는 환청에 시달리고 불면증이 반년 이상 지속되는 삶은 내겐 자연스러운 그것이었다.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채로 아이를 낳아서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은 순탄할 수 없다. 특히나 엄마들 중에서는 '독박 육아’를 경험해 가면서 점점 감정이 마모되어 가서 소위 산후 우울증에 걸리는 현상을 우리는 주위에서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 마모된 내면의 자아는 '슬픔, 분노, 화'라는 내 것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감정이 쌓여만 가고 때때론 폭발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감정과 분리 시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연습을 우리들은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슬픔과 이별하는 용기   

‘왜 하필 두 명 이야, 한 명도 힘들 다고하는데…기쁨이 두 배 일거라는 얇잖은 위로 따위 제발 그만좀 해줬음 좋겠어. 그들이 내 대신에 마주해야 할 고통과 무게를 알 턱이 있을까. 누가 알겠어….’  


 지금 꺼내어 생각하니 잘 커주고 있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그럼에도 사실 그 시절의 나도 나였음을 인정한다. 사실 육아를 시작하면서는 그 극한의 시간들을 인내하며 버텨내야 했기에, 오히려 내 안에서 나를 가둬둔 채 깊게 빠져들어만 가는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욕심 충만한 나의 자아는 바랐던 것 같다. 사실은 나라는 사람이 온전히 건강하기를. 하루 24시간 중에 깨어 있는 시간 동안은 부디 행복하기를 말이다.

파도가 세차게 치는거야. 그럼에도 이렇게 잔잔함을 갈구했었어. 아주 절실하게...흔들림 없기를 바랐으니깐.
어쩌면 화를 내고 슬퍼하고 감정에 빠져 들면서도 나의 무의식은,
끝이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지 모른다.   



마음 성장을 시작할 준비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나를 괴롭혔던, 지금은 과거가 되어 버린 그 시간들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통속적인 멘트에 맞장구 치듯, 정말 시간이 지나니 감정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실 잊혀진 감정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그건 잊히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담긴 채 꺼내보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또한 고통의 순간이라 표현한 그 시간들도 겪다 보니 어느새 군살이 붙었는지 익숙해지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그때 나의 어떤 부분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까’라는 질문이 되려 나를 찾아온다.


이런 생각의 시작이 어쩌면 내 마음을 한층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일 지 모른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들이 겪는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BGM이 울려 퍼진다.  

 남들보다 배 이상을 고생할 수 밖에 없는, 겪어본 이들이 아니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지 모르는 쌍둥이 육아의 현실, 이해도 사랑도 받지 못하는 결혼 생활이라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가짜 감정과 가짜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처절하고 슬픈 연극을 하고 있는 무대의 여주인공인 마냥,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삶의 통속극 속의 나였다. 그런 나를 빼내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저 내 존재의 어떤 부분이 실제로 있고 또 없는 지를 끊임없이 탐색해 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생존 본능'덕분일 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미안해 아가.
하고 싶은 더 중요한 일들이 있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건 시간 낭비야.
이게 다 뭔 짓이란 말이야


 혼자 마음이 지껄이는 이런 터무니 없는 생각들을 침묵 시켜보겠다는 나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지껄임은 도통 처음엔 절대 협조하려 들지 않을 지 모른다.

  

난 그걸 좋아해. 근데 저거 때문에 못해. 저건 싫어. 그러나 할 수 밖에 없어‘   


 멈추려고 해도 여전히 마음은 나를 향해 끊임 없이 지껄여댄다. 그리고 이게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이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과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서 자기가 마치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일 지 모른다.   


내면의 나를, 마치 외부에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시선으로 보려 하는 연습이었어.


나를, 나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각오   

 각오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또한 결국내 마음이 말하는 지껄임 일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 빠지려는 나를 구해내기 위해서 스스로 시간을 내서 하는 수행법. 내게는 그게 다행히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시간을 낼 수 있게 될 무렵부터는 아이들을 재우고 조금씩 스스로의 여유를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스스로 마음과 이성적인 대화를 해 나갔다. 겉으로 보면 조금은 우스울 수 있는 마치 머리에 꽃을 단 어떤 미친 여자가 길을 지나가며 읊조리는 것과 같은 모습일 지 모르겠다만, 그럼에도 한 꽤 치열한 연습을 거듭해 나갔다. 사실 마음으로부터 나를 좀 멀찍이 떼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즈음에 시작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우리들은 어쩌면 개인의 삶에서 정신이 가장 맑고 온전할 때 삶의 목표를 정하고 마음이 변덕으로 그것을 훼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을 지 모른다. 그것이야 말로 어떠면 ‘지금 이 순간을 산다’라고 하는 것의 실천일 지 모르고 말이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당신의 삶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하라’고. 어렵지만 사실 진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러하니깐.   


바라는 걸 진정 안다는 건, 아니 그 전에 내가 나를 그저 바라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는 건, 아직도 궁금해...여전히 부족해서..


 지금 어떤 순간, 당신도 한 때의 나처럼 만약 곤경에 처해서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면, 진짜 당신의 내면, 바라는 그것을 되찾아 오시기를 응원해 본다.   


삶은 단 한번뿐이니깐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당신의,
우리들의 소중한 단 한번의 삶이니깐.. 

 

그리고 이제 세 번째 편지가 시작된다. 그건 아주 미세하게나마 변화를 시작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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