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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9. 2018

행복에 겨워서

귀갓길에 내내 생각 났던 목소리에 잠깐 '드립글'

"지금 행복에 겨워서 그래."


 목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예전 같으면 왜라는 한마디로 바득바득 대화를 이기려 하는 어린아이의 순진하면서도 극악무도한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겠지만, 어쩐 일인지 이유를 되묻지 않고 그대로 '응' 이라며 그저 웃고 말았다. 그리곤 그 날 하루 종일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은 왜 또 안 오는 건지.  시차 부적응이라는 같잖은 핑계를 대 본다.


거짓말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도망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막상 도피라는 것에는 덜 친숙하고 싶은 나는 10월의 반을 외국에서 보냈고 아예 이대로 '한국이 싫어서' 떠나버릴까 싶은 마음에 진지하게 그와 대화를 나눴다. 생각해 보면 그와 그렇게 진하고 깊은 대화를 나눴던 게 얼마만일까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색했지만 자연스러웠고 반가웠지만 이상하게 불편했다.


외국이라 더 편했던 건지 시종일관 그는 내게 다가오려 했다.

여전히 날 좋아하고 있는 걸까, 가끔 거짓말 잘하는 괴물로 변해버리는 나이기도 한데, 아니면 가족관계로 묶여 있고 합법적인 관계라 이러는 게 그와 나에게 당연한 걸까 싶은. 정리 안 되는 제멋대로 어이없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잠깐 휘저어 놓으면서 소년 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애잔하면서도 고맙고 그러면서도 이상한 불편함이 나를 엄습해 왔다. 서로의 살갗이 깊숙이 닿았다가도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와서 결국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의 품에 안긴 채 잠들기 일쑤였다. 미국에서도. 언젠가부터 그가 원하던 소기의 목적(?)을 끝내 달성시키지 못해 종종 삐져 있는 그가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사실 그 모습이 귀여워서라고 하면 그는 분명 토라질 테지만 - 나의 목적(?)의 반 이상은 달성했으니.


서사. 이야기. 목소리의 섞임.

몸의 섞임을 원하는 누군가에 비해 나는 언제나 그의 목소리에 내 시간이 섞이길 원했다. 나 또한 피지한 욕망이 없는 인간은 아니라는 걸 알아채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스스로 기쁘거나 즐겁지만은 않았다. 가족이 된 그와 몸이 겹쳐지는 시간들이. 어쩌면 그게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의 시작이. '생각은 모든 것에 선행' 한다는 삶의 모토는 여전히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렵게 시간을 낸 누군가와의 시간을 소중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

언젠가부터 곁의 그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미안한 착각을 종종 하던 탓에 다툼은 잦아지기 일쑤였다. 아이를 낳고서는 심해지기도 했고. 그 와중에 벗들이 생겼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마음을 먼저 겪었던 이라 그런지 공감과 위로와 위안이라는 감정은 쉽게 내 속을 파고들었다.


미국에서 가족이 아닌 타인.. 벗들과의 아주 잠깐 대화를 주고받았던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함께였던 것처럼 편안했다. 섬섬옥수의 나의 벗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리곤 급히 혼란스러워지는 어리석은 나를 발견한다. 아팠을 때 곁에 있어주는 이는 다름 아닌 지금의 '그'라는 걸 알면서도 곧잘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거나 회피하거나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던 나를 발견하곤 죄책감과 미안함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서 되려 잘해주는(?) 경향이 짙어지곤 했었으니까.



 불안이라는 위안과 동시에 터무니없이 상냥한 위로와 사랑으로 변하게 만드는 건, 서로를 매만지려는 마음 떄문일지 모른다.



다시금 알았채버렸던 거다. 한결같이 바라봐주는 그이의 시선을.

그러나 그 시선을 받음과 동시에 어느새 자석처럼 다른 무언가 들에 이끌려 버리는 나의 옹졸하고 비겁한 마음조차도.


귀국 후 오랜만에 벗을 만났다.

그 날 꽤 많은 술을 마셨던 탓에 어떤 말들을 오고 갔었는 지 선명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 안타깝게도 - 손끝으로 서로의 어깨를 덧없이 툭툭 치며 잘 가라는 인사를 주고받았던 기억만이 마음에 남는다. 벗은 참 예쁜 손가락을 가졌다. 그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이 질투 나서 내가 가져 버리고 싶어 질 만큼.


'행복에 겨워서 그래'

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그러는 거라고. 아이들을 떼어 두고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그 환경과, 여전히 날 지켜주는 가족들이 건재하게 건강히 살아 있다는 것과. 돈벌이를 꽤 잘하고 있는 환경과. 더군다나 다른 이들은 쉽게 찾을 수 없는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았고. 무엇보다 그 좋아하는 걸 에너지 솟구치게 - 때로 꾸역꾸역 일 지도 모르지만 - 해내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내가 만들어 낸 이 모든 것들에 '행복에 겨워서' 그렇다는 말로 들렸다.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해 버리는 선택적 기억력의 소유자라고 웃으며 말할 벗 이겠다.


'응'이라는 대답을 하며 그렇게 웃어 보이고는 귀갓길에 이상하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정류장으로 옮겼다. 오랜만에 버스를 탔고 잠깐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갔던 지라 4 정거장 정도를 걸어서 돌아와야 했다. 걷는 내내 생각에 빠져서 혼이날 지경이었다.



비에 젖은 낙엽을 밟고 걸어 오는 그 길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왜일까..가끔 끝없이 걷고 싶은가 보다. 아직도..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뼈저린 각성의 시간이었다.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보다는 내게 기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외면했던 나였던 걸까 싶어서. 좀 더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글을 그만 쓰던가 회사를 그만두고 맺고 있는 관계들도 잠깐 올 스톱한 채 모두가 원하는 데로 아이들을 좀 더 잘 케어하면 정신 차릴 수 있을까. 하면서도 막상 지금의 업들이나 - 돈벌이뿐 아니라 - 혹은 어떤 관계들은 쉽게 끊어 낼 수 있는 있는 존재들이 아닌데. 싶어서. 아 이것이 지금의 내 현실이구나 싶어서.


둑이 터진 것처럼 감정은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었다. 누군가 없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는데  막상 거짓이라는 게 들통나 버린 것 같았다. 벗이 생각이 났고 동시에 아침에 캐리어 정리를 하고 있던 그를 보자마자 급 출장이라는 걸 알아 버렸을 때. 사소한 일상의 각자의 일정 조차 이렇게 알아버리는 우리의 관계에서 찾아오는 뭐랄까 아쉬움과 괜스런 미안함,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게 정답일까 싶은 쓸데없는 생각들 마저 모두 나를 엄습해 왔다.  내가 늦게 들어오던 그 날 저녁, 그는 일찍 퇴근하여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친정 엄마에게 늦게 들어왔다며 다음날 아침 핀잔을 있는 데로 먹은 탓에 배가 불러지려 할 무렵 어쩐지 엄마는 지난밤 술에 취해 들어온 딸이 안쓰러우셨었는지 큰 소리를 덜 내주셨다. 아이들은 재잘재잘 사랑스러운 어리광을 부렸고, 우리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들이 어느새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아침밥을 차려주며 그 고사리 손을 보고 있는 동안 나의 마음은 사랑으로 한껏 찼다. 이렇게 따뜻한 순간이 내 삶에 또 있었던가 싶어서. 이런 벅찬 행복을 주는 관계는 하나로도 족한데 나에겐 어느새.... 운이 참 좋은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삶은 흑과 백이 아니니 딱 잘라 대답할 수는 없다.

'벌써 11시야.'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 지도 나는 몰랐었는데. 이성적이고 현실적이고 냉철한 조언 덕에 환상 속에서 현실로 나를 잘 꺼내와 주는 착한 나의 벗은 기어코 시간을 일깨워주며 그날도 먼저 나를 보내 주었다. 그 다정한 벗의 목소리가 오늘 아침 다시 생각이 났다. 정말 나는 행복에 겨웠다. 누군가가 안부를 묻고 걱정을 해 주고 보고 싶은 관계가 여전히 곁에 살아있다는 생각 때문에. 날 살아있게 만드는 이들이 여전히 눈 앞에 보이기에..  


여전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이렇게. 그냥 행복에 겨운 이 마음을 간직한 채 오늘이라는 선물에 주어진 시간을 내 방식대로 채워 나가며 흘러가 보기로 결심하며.



가을이 다 지나면 또 겨울이 온다.  그리고 다시 봄. 그렇게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지나간다. 그 시간이 때론 아쉽고 붙잡고 싶지만 우린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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